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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3)화 (143/149)

떨떠름함을 애써 감추려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해인을 보며 제우스는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아폴론이 곁에서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아.”

의미 없이 잠깐 시선을 비껴 내 길거리를 스치듯 본 해인이 잠시 멈칫했다.

서서히 점심때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원래부터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답게 대로에는 사람들의 밀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연처럼, 혹은 습관처럼 익숙한 누군가를 찾아낸 탓이었다.

일단 현대에서 그만큼 체격이 큰 사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균에 비해서는 큰 편이었기에 거기서부터 눈에 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앉은 이 두 명의 머리 색과 같이, 염색하지 않고도 저렇게 햇빛을 받고 반짝거리는 게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은 흔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였다.

‘산책? 아니면 일이 생겨서?’

해인이 혼자 나왔으니 그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은 표정이 보일 법한 거리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아킬레우스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즉 ‘본인 혼자 남겨진’ 사태를 조금도 달갑게 여기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한 짐작이라기에는 나름대로 근거도 있었다. 그녀가 나오기 직전까지도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자신을 혼자 남겨 놓는 것을 묘하게 서운해하는 티를 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혼자 두고 계속 일하러 나간 걸 이렇게 돌려받는 거냐고 했었지.’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왜 그러니? 응?”

함께 그쪽을 돌아본 아폴론이 어렵지 않게 대상을 확인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딱히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을 것 같은데 묘하게 못마땅해하는 표정이었다. 해인은 남의 군에 역병을 풀어 놓은 건 본인이면서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 혹시 선약? 혼자 나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제우스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아뇨, 혼자 나왔기는 한데.”

주워섬기듯 대충 대답을 중얼거리며 해인은 눈앞의 두 신과, 다소 멀리 있긴 하지만 절대로 못 알아볼 수 없는 자신의 연인을 한 번씩 번갈아 응시했다.

결심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왜. 우리보다 저 녀석이 더 중요해?”

왜 당연한 걸 물어보지?

순간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질문을 애써 삼키며 해인은 그만 떠나려는 사람답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을 고르다가, 그녀는 제우스의 눈가에 깃든 약간의 장난기를 알아챘다.

“……사실 선약이었어요.”

“신 앞에서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벌 받나요?”

“아니, 그런 건 이제 못 해. 옛날에 너무 남발해서 그런가?”

“그럼 왜 안 되나요?”

“내가 네 백부잖아.”

“아아.”

농담 같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아킬레우스가 제법 가까워졌다.

해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일단 해인을 발견하기는 한 듯 걸음이 조금 빨라지는 게 보였다. 해인의 맞은편에 있는 정체 모를 두 명을 함께 확인한 탓일지도 몰랐다.

가볍게 미간을 좁힌 표정이 이제는 그럭저럭 보인다. 아킬레우스를 힐끗 본 해인이 백부에게 말했다.

“정 그러시면 아버지에게 연락하셔도 돼요.”

“조카가 날 버리고 갔다고?”

“예, 뭐, 내용도 마음대로 하셔도 좋고요.”

“포세이돈은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겠지……. 욕 들을 것 같은데?”

그거야 해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찍 떠나는 사람답게 말릴 틈도 없이 세 사람의 커피 값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해인은 약간 묘한 눈으로 제우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득한 과거에서 지낼 때는 한 번도 제우스를 본 적이 없어서, 그때의 그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는 그녀의 앞에서만은 조금 느슨한 백부로 있을 생각인 듯했다. 포세이돈이 기겁하며 만나지 못하게 하려던 노력이 무색할 정도였다.

물론 해인은 그게 제우스의 진정한 본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명한 눈동자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신들의 왕이라 불릴 법한 신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당사자가 직접 감추겠다는데 그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사촌 쪽은 싫어.’

아킬레우스를 발견한 직후부터 묘하게 시큰둥한 표정이 되어 있는 아폴론을 마지막으로 일별하고 해인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그럼 가 볼게요.”

“잠시만.”

아폴론이 불쑥 고개를 들며 붙잡았다.

“가기 전에 이것만 듣고 갈래?”

“어떤…….”

“내가 저 녀석이랑 감정이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아서 하는 소리 맞고. 마침 내 인상도 안 좋게 남은 것 같으니 마저 심술부리려는 것도 맞아. 자, 들어 봐.”

유치하게 운을 뗀 그가 짐짓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해서 이 시대에 되살아났다는 건 너나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알 만한 이들이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어. 너나 저 녀석이나 워낙 특이한 경우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 시대로 치면 유명인 같은 게 된 셈이지.]

해인이 멈칫했다.

아주 낯설고 이상하게 들리는 발음이지만, 해인은 그게 어디서 쓰이던 언어인지 알았다. 이 시대에서는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쓰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해인도 내뱉을 수 있는 언어.

삼천 년 전 이 땅에서 사용되던 언어였다.

[하지만 말이다. 살아나는 걸로도 모자라 저렇게까지 같은 인격과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존재’로 원하는 시대를 골라잡는 게 과연 선택만으로 가능할까? 크로노스 님이 무언가를 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사자인 저 녀석이 했다는 선택이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 중 하나를 고르는, 말 그대로의 선택에 불과할까? 혹시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기로에서 결론을 내린 건 아닐까?]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해인을 마주하며 아폴론이 씩 웃었다.

눈가에 선명하게 장난기가 맺혀 있다. 게다가 내용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둘째 치고, 누가 들어도 이간질 시도가 선명하게 엿보이는 문장들이었다. 해인의 표정이 서서히 식어 갔다.

“내가 이 시대에 와서는 크로노스 님을 가끔 뵈면서 지내거든. 그분과 있으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미래도 조금 보이고 그래. 물론 본다뿐이지 그걸 누구에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마침 너는 예외잖니.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본 게 있는데, 아까 내가 말한 점에 있어 저 녀석이 너에게 털어놓지 않은 게 있고 너는 그걸 저 녀석에게 물어보는 장면을…….”

“……가 볼게요!”

“말 다 안 끝났는데!”

“안 들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해인은 정말 그 자리를 ‘탈출’했다.

비어 버린 자리를 보며, 감히 자신의 앞에서 무례하게 먼저 자리를 떠 버린 인간을 대하는 신이 아닌, 사촌을 한바탕 놀려 먹은 친척 어른 같은 태도로 아폴론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다 들었는데?”

아폴론이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운을 뗀 이상 그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이를테면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한 것과 같았다. 심지어 옛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기울었던 해인은 들어야 할 건 사실상 전부 다 들은 이후기도 했다.

그 꼴을 보던 제우스가 혀를 찼다.

“너 그러다 네 사촌 얼굴 평생 못 본다. 저런 애가 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앞으로 칠팔십 년일 텐데 적당히 내숭도 떨고 그래야지.”

“그렇게까지 속 좁은 아이는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그렇지, 인간들은 나이를 먹으면 더 너그러워지는 경향도 있고.”

“그것도 정도가 있어. 너는 인상부터 글렀잖아.”

웃고 있던 아폴론의 낯이 금세 우울해졌다.

“아……. 그게 그렇게까지 질색할 말이었을까요…….”

“이래서 안 된다니까.”

***

해인의 짐작대로 아킬레우스는 일부러 이쪽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해인이 갈 법한 곳을 논리적으로 추측하기는 했다.

다만 그 추측이 맞아떨어져 근처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있는 걸 발견한 직후에는 또 뭔가 싶었다. 혼자 있으면 모르겠지만, 해인의 맞은편에 있는 뒷모습만 보이는 이들이 아무래도 수상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색…….’

아킬레우스도 자신의 머리카락 색이 아주 흔한 금색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굳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핏줄을 타고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그 색이 상식적으로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도…….

‘그렇지만 왜?’

왜 그런 자들이 굳이 저기에, 심지어 저렇게 인간인 척하면서?

그래도 그런 의문은 곧 상관없어졌다. 자신이 채 그쪽 테이블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인이 거의 다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그에게 달려와 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후…….”

심지어는 그렇게 품에 안겨 들고서 뒤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뱉기까지 했다. 해인의 등 뒤로 자연스레 마주 팔을 두르며 아킬레우스가 여상한 투로 말했다.

“내가 반가운 모양이네. 혼자 나갔으면서.”

그 여상한 어조 속에 남겨진 뒤끝이 선명했다. 그것쯤이야 익숙하게 넘길 수 있는 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이제 혼자 안 나갈래요. 일단 반대 방향으로 가요. 저쪽 스쳐 지나가기 싫으니까.”

“무슨 일 있었어?”

“일은 없었는데 더 엮이고 싶지도 않아요.”

품에서 떨어져 나온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둘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일부러 아킬레우스가 돌아볼 때까지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신들의 얼굴을 굳이 외우고 다니지는 않지만, 보자마자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폴론?’

아폴론이 앞서 자신이 아킬레우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처럼 아킬레우스도 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그에게 방해받은 적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트로이를 아꼈기에 유독 연합군에게 더 질 나쁘게 굴었다.

과거에도 딱히 그에게 예의를 차리지는 않았을 아킬레우스는 현대에 와서는 더 거칠 게 없어졌으므로,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엮이고 싶지 않다는 해인의 말에 깊이 공감이 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머리가 좋지.’

엮여서 좋을 것 없는 존재가 누구인지 잘 알아채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었다. 지극히 편파적이고 편애적인 생각을 하며, 그는 다시 연인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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