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는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빙그레 웃었다.
“이거 아니? 네 아버지는 어떻게든 비밀로 하고 싶어서 알려 주지 않았겠지만, 사실 잠들어 있지 않은 신들은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인간들에게 깊이 섞여 있단다.”
해인이 의아한 낯을 하자 그가 잠깐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네.”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카페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거기 도슨트로 일하는 네 또 다른 사촌도 있어, 헤르메스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인은 잠깐 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지적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사실 제우스의 입에서 ‘도슨트’라는 단어가 나온 것부터가 기이했다.
심지어 해인은 그 헤르메스를 먼 옛날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령의 신이었다. 당장 성벽에서 그녀를 안아서 땅으로 내려 주기까지 했었던…….
해인은 아연한 심정으로 물었다.
“……도슨트요? 어째서요?”
“응?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신이 왜 취직을.”
“할 수도 있지. 아테나는 대학원 다녀. 걔가 교수보다 더 많이 알 텐데 왜 그러는지 나도 이해는 못 하겠지만.”
또 물어보지 않은 정보가 치고 들어왔다. 제우스의 말대로, 정말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깊이 섞여 있었다. 해인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인간들 틈에 그렇게까지 섞여서……. 그러셔도 돼요?”
아폴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 될 이유가 없어. 우리가 신이라는 걸 네가 알아보는 것도, 사실 네게 반이나마 그 피가 섞여서 그렇거든. 이성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영역인 거지. 그냥 인간들은 우리를 봐도 단순히 눈에 띄는 인간 정도로 느낄 뿐이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제우스가 덧붙였다.
“그래. 그리고 이 시대 신이 어디 신이냐. 안 죽는 무언가에 가깝지.”
더없이 신랄한 말이었다. 적어도 신들의 왕이 할 만한 소리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해인이 눈을 크게 뜨고, 곁에서 아폴론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제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나 놓고 이렇게 사고가 굳어 있어? 아, 그게 네 잘못이라는 건 아니고. 이래서 자식을 좀 풀어 놓고 키워야 하는 건데.”
“아니…….”
아까부터 말할 때마다 기회만 되면 아버지를 비판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착각인가? 형제는 이런 건가? 이쯤 되니 느껴지던 긴장감은 흩어져 버렸고, 대신 다방면으로 어이가 없어진 해인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 어쨌든……. 그런 거란다. 나는 사실 네 얼굴이 궁금했던 거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이 녀석이라서.”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풀며 의자에 등을 기댄 제우스는 때마침 다가온 웨이터에게 무언가를 주문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기분으로 그 꼴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해인에게 아폴론이 말을 걸어 왔다.
“그래, 이름이 해인이었지?”
“맞아요.”
해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역병신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면모도 분명히 갖춘, 이 이성과 태양과 음악과 의술과……. 어쨌든 많은 것을 상징하는 신이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은 심정이었다.
‘마주친 적도 없는데.’
아르테미스라면 모를까 아폴론은 지금 얼굴을 처음 봤다.
“만난 적도 없는 사촌이 왜 나한테 할 말이 있을까, 하는 표정이네.”
“……아,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해인은 흔들리려는 눈을 애써 다잡았다. 아폴론은 정말로 나이 어린 사촌 동생을 대하듯이, 그저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고대에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해인은 도저히 방심할 수가 없었다…….
“사실 너는 나에 대해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겠지만, 나는 옛날부터 너를 알고는 있었거든.”
“옛날이면…….”
“이십 년 전 말고, 삼천 년 전.”
아폴론이 아득한 옛날을 되짚듯 눈을 내리떴다.
“내 누이에게 들었으니까.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 지는 얼마 안 되긴 했구나.”
“……아르테미스 님이요?”
“너랑 만났었다던데. 그렇지?”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반신 하나 도와준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남매인 아폴론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그 애는 지금 잠들었어.”
“잠들어요?”
그러고 보면 아까 전 제우스도 ‘잠들어 있지 않은 신들은’이라고 스치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뜻은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넘어갔는데, 또 듣게 되자 해인도 그게 무슨 뜻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아폴론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든 신들이 이 시대까지 눈을 뜨고, 인간들 틈에 섞여서, 할 일을 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단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인간들이 달에 발자국을 찍은 것도 꽤 옛날의 일이지, 안 그러니?”
해인은 먼 옛날 신들의 땅에서, 자신 역시 달을 보며 그 생각을 했던 것을 상기해 냈다.
“그럼…….”
“달은 더 이상 신성하게 여겨지지 않고, 야생성은 문명이 들어서며 많이 흩어졌지. 숲이 사라졌고, 사냥을 하는 이들도 줄어들었고, 굳이 순결을 강조할 이유도 없는 시대이니…….”
아폴론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 애의 존재 의미도 없어질 수밖에.”
“……잠든다는 게 그런 뜻이군요.”
“그래. 이름이 남아 있는 한 죽지 않지만, 어쩌면 죽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 이 시대까지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건 사실 그 의미를 크게 잃지 않은 이들뿐이야.”
모든 신들의 왕이었던 제우스, 바다를 다스렸던 포세이돈, 이성과 문명과 의술까지 관장하던 아폴론, 지혜의 여신이던 아테네, 여행자와 상업을 관장하는 헤르메스, 그리고 몇몇의 신들이 더.
“자연에 가깝던 이들은 사실 숙부님을 제외하면 거의 잠들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바다는 아직 그 끝을 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언젠가 인류가 해저 가장 밑에 기어코 발을 딛는 날이 오면 포세이돈도 잠들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표정을 굳혔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아폴론이 뒤늦게 수습하듯 어색하게 웃었다.
“내 누이는 다른 이들보다도 유독 빨리 잠든 편이라서.”
“그래서 같은 주제를 공유할 새로운 존재가 오랜만이라고 하셨군요.”
“맞아.”
“하지만 저도 그때 빼고는 단 한 번도 다시 마주친 적이 없는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그래도 상관없지. 너는 아니어도 아르테미스는 너를 가끔 생각은 했던 모양이니까. 네가 그때 기준으로는 특이하게 생겨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심으로는 마음에 들어 했었던 걸지도 모르고.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웨이터가 커피 세 잔을 가져왔다. 슬쩍 그에게 웃어 보인 아폴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나도 신경을 좀 쓸 수밖에 없었어. 당장 네게는 전염병도 닿지 않았잖으냐.”
“……병이요?”
“네 처소 앞을 지키던 다른 인간 두 명도.”
말뜻을 이해한 해인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 그럼 일부러…….”
“당연하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너 너무 노골적으로 햇빛을 피하던데.”
“아니, 그것까지 알아요?”
막사에서 햇빛을 좀 노려봤던 적이 있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솔직히 그것까지 알고 있다는 게 더 죄질이 큰 것 같다. 해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잘못한 건 아니지 않나요…….”
“그건 그래.”
아폴론은 변명할 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야 그게 잘못은 아니었지만, 너는 이 시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내가 나쁜 놈이었겠지. 지금과 그때는 달라진 게 많으니까. 나도 이제는 나름대로 반성한단다.”
생각해 보면 해인의 아버지인 포세이돈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해인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물론 이제까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촌과 아버지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둘 다 신이라는 동일한 존재인 이상 그녀가 포세이돈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아폴론도 적당히 이해하는 척하며 넘어갈 수 있었다.
“아,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폴론이 자연스레 덧붙였다.
“카산드라도 그렇고 말이야.”
“네……. 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해 보니 너와 할 수밖에 없구나. 그녀를 만난 적이 있지?”
만난 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인은 이 순간 어떤 의미로 눈앞의 이 신을 다시 보게 됐다.
바로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제우스가 제멋대로 행동하던 것에 비해, 아폴론은 그냥 그의 곁에서 차분하게 웃으며 온화한 어투로 몇 마디 말이나 꺼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일단 그 역병 사건을 제외하면, 대표적인 상징 중 이성이 있었다.
과거에는 좀 성격 나쁘게 굴었을지언정, 그의 말대로 오랜 세월이 지났고 그는 이성의 신이니, 뒤늦게지만 그 성격이나 태도가 그에 보다 더 걸맞게 벼려졌을 것이라고 무심코 생각했던 것이다.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들이 남매였고, 해인은 아르테미스에게 도움을 받았던 저들 남매의 사촌이니 충분히 납득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생각은 처음부터 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연인 이야기까지? 처음 보는 사촌과 굳이?’
게다가 저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역병 사건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카산드라에게 아폴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가 떠오르자…….
해인의 시선이 점점 싸늘해지자 아폴론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도 내가 그녀에게 잘못했던 건 알아. 부정하지 않는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멋대로였지. 카산드라는 똑똑했을 뿐이야.”
제법 객관적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해인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실례지만 그걸 알면 더 이야기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고도 계속해서 생각나는 인간은 그녀뿐이라서…….”
당연하지만 납득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해 주고 싶지도 않은 발언이었다. 조금도 풀리지 않은 해인의 표정을 본 아폴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내 사촌이 나를 가치 없는 남자로 생각하게 됐다는 건 이제 잘 알겠구나.”
“그러게 왜 그런 말을 꺼내느냐? 하여튼 이런 데서만 헛똑똑이가 돼서.”
내내 침묵하며 제 아들과 조카가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우스가 혀를 차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는 해인을 돌아보더니,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다 들으란 듯 속삭였다.
“쟤가 원래 누굴 사랑하는 걸 못 해. 굳이 그 공주뿐만이 아니라 전부 다 예외 없이 망했을걸? 그냥 날 때부터 그런 놈인 거야.”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