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chap2. 현대
이런 현실에 처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안 나왔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인간은 특별히 허락받지 않는 이상 예언을 못 한다. 고작 코앞의 미래라도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해인은 있지도 않은 먼 산을 바라보듯 초점 잃은 눈을 했다. 차마 눈앞의 존재들을 똑바로 마주 보고 싶지 않았, 아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신이었다.
‘……이럴 생각으로 노리고 있었나?’
합리적 의심이 파고든다. 설마 신이 그렇게까지 할 일이 없어서 한낱 인간의 뒤를 쫓아다녔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타이밍 맞춰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직전까지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고 말았다.
***
연인과 재회하고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
포세이돈의 별장을 나온 지는 오래되었는데, 포세이돈은 기억을 되찾은 이후부터는 무언가를 상당히 내려놓은 듯, 반쯤은 해탈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에 떠나는 딸을 쓸쓸하게 바라볼지언정 붙잡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관광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므로 차라리 모두에게 익숙한 아테네의 호텔에서 지내며, 이전까지 그래 왔듯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내내 붙어 있지 않아도 누군가 갑자기 사라지진 않을 거라는 확신은 충분히 얻었다.
크로노스가 현대에서 행했던 그 단 한 번의 권능은 고대와 깊이 얽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을 제외하면 현대는 어차피 인간들의 세계였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해인의 입장에서야 고대에서 그 생을 끝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현대에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기는 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의외로 자세히 그 부분을 해인에게 설명했었다.
“거래를 했어.”
“거래요?”
“나 말고 크로노스 님이. 내가 한 건 선택이지. 원래부터 한 번 더 삶의 기회를 받거나, 엘리시움에서 영원히 살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기에 전자를 택했거든.”
“그게 전부?”
기억을 되짚듯 아킬레우스가 잠깐 허공을 바라봤다.
“그것 말고는 크로노스 님이 하데스 님과 따로 이야기를 했을 거야. 어머니도 무언가 부탁한 게 있었던 모양이고.”
과거와 관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처럼 간혹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인격을 지니고 똑같은 기억을 갖춘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득한 과거의 삶과 현대의 삶은 거의 모든 것이 다르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예의 시간 선의 문제 탓에 해인과 연관이 있는 부분의 기억을 되찾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정리가 덜 되었을 수도 있음을 해인 역시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 님이 적극적이셨지. 그분께는 그분의 문제였을 테니.”
해인도 크로노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성은 겪어 봐서 알았다. 납득이 어렵지 않았기에 의문도 그 정도만으로 금세 해결됐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확신으로, 해인은 아주 오랜만에 혼자 잠시 산책을 나왔던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애써 납득해 주려는 아킬레우스를 남겨 놓고 바깥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걷다 보니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해인으로서도 예상외의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붙어 있었는데.’
애초에 형제도 없고, 낯도 가리는 편이라서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것이 익숙했던 해인으로서는 낯선 느낌이었다. 바깥까지 좌석을 내놓은 카페에 앉아 메뉴판 위의 아무것이나 주문해 놓은 해인은 멍하니 햇볕을 쬐며 눈을 깜빡였다.
‘오히려 그래서인가…….’
결국 그녀는 오늘의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그냥 빨리 돌아가야지.”
“왜?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어 온 것도 그때였다.
멈칫하며 해인은 자신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의 의자가 비어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는 또 다른 비어 있는 테이블도 많은데 굳이 허락도 없이 합석하는 누군가가 보였다. 마치 원래부터 일행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누구…….”
당연한 의문을 내뱉으려던 해인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낯설지만, 동시에 정말 초면인 것은 아닌 느낌을 주는 외모다. 해인은 그가 이상하게도 포세이돈과 꽤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카락 색은 검은색이 아닌 화려한 금색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나이대도 그렇고, 이목구비의 세세한 부분 역시 눈에 띄게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포세이돈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존재였다.
해인은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고대에서 하도 신들을 마주치다 보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 그 존재들을 알아보는 요령마저 생겼다.
신이 맞았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고대도 아니고 현대에서까지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해인은 반쯤 의아하고 반쯤 떨떠름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래? 그럼 대화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때 또 누군가 다가오더니 남아 있는 의자 하나를 더 빼며 태연하게 합석했다. 해인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이번에 자리에 앉은 이는 처음 온 존재와 같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리고 그를 많이 닮은 아름다운 얼굴의 삼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안녕?”
“예…….”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구나.”
어투는 온화했지만 해인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불시에 몇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 신들의 성격을 손수 체감해 본 바, 자신의 아버지나 테티스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에서까지 그들을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포세이돈의 바람이 이상한 방향으로 이뤄진 셈이었다.
“그래, 일단 이게 먼저겠구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니? 내 옆은?”
해인의 맞은편에 나란히 자리한 둘 가운데 처음 앉은 이가 눈을 빛내며 말을 걸었다.
누가 봐도, 해인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해 봤자 순순히 놓아줄 것 같지는 않은 태도였다…….
***
그렇게 됐던 것이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신 두 명쯤 만나는 게 뭐 그렇게 대수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했듯 해인은 현대에서까지 그들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삼키며 해인은 둘 중 나이 든 쪽을 티 나지 않게 돌아보았다.
그녀는 방금 들은 질문에 대해 어렵지 않게 답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포세이돈과 닮은 얼굴, 그리고 저 제멋대로인 데다 인간들의 문명에 익숙한 듯한 태도.
‘하데스 님은 아버지보다 더 바깥으로 안 나온다고 했지.’
그럼 결국 하나뿐인 것이다.
‘제우스 님…….’
그 옆은 더 쉬웠다. 제우스와 닮았고, 더 젊고, 기원전에서 얼굴을 보았던 헤르메스는 아니고, 마찬가지로 신인 존재.
‘아폴론 님.’
맑은 하늘, 환한 태양 아래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이 꼭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바람에 해인은 괜히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제우스나 아폴론이나 아킬레우스나, 저 반짝거리는 금색 머리카락만은 전부 엇비슷하게 닮아 있다. 혈연을 따졌을 때 아폴론은 말할 것도 없이 제우스의 아들이고, 아킬레우스에게도 거슬러 올라가 제우스의 피가 섞이기는 한 탓일지도 모른다. 즉 원본은 제우스라는 뜻이다.
물론 그게 호감을 가져다주는 요소는 아니었다. 제우스는 어째서인지 포세이돈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존재였고, 그 곁의 아폴론은 해인에게 결코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대면한 것은 처음이지만, 그가 권능을 행했을 때 피해를 입는 인간들을 지켜본 경험은 있기 때문이다.
‘전염병 퍼트리는 게 가능한 역병신…….’
해인은 그래도 신들이 자신의 생각까지는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폴론을 역병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빛나는 이성, 태양빛, 음악 같은 보다 우아한 것들의 신으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겪은 게 역병신적인 면모밖에 없는 해인에게는 의미 없는 소리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우리 조카는?”
제우스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자 마치 힌트라도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다.
조카라고 말하는 걸로 미루어 해인은 자신의 추측이 정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오늘 처음 봐 놓고 너무 친한 척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자, 일단은 백부인 건 분명한 존재에게 대놓고 그 떨떠름함을 드러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해인은 이제 딴생각을 그만두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우스 님이시군요.”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네 백부이지 않니.”
“옆은……. 아폴론 님인 것 같고요.”
“맞아. 영리하구나.”
칭찬을 들어도 별로 기쁘지 않은 기분은 현대에서는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되는, 됩니……. 되세요?”
상사를 대하듯 정중한 어투를 쓰려다 해인은 애써 선회했다. 하지만 선 긋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드러났다. 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되겠니. 네가 맨날 저 아래 틀어박혀 있는 네 아버지만 봐서 낯설어 보이긴 하겠지만, 사실 그건 네 아버지가 이상한 거야. 다들 이러고 멀쩡히 잘만 다니는데.”
“……아, 네. 그런가요.”
아주 자연스럽게 포세이돈을 매도하고 있지만, 해인은 제우스가 그의 형이라는 걸 되새겼다. 머나먼 옛날부터, 아주 아득한 과거부터 그의 가족이었던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었다.
“그럼 지금 이렇게 두 분이……. 저랑 마주치게 된 것도 우연인가요?”
해인은 높은 확률로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깔끔할 수 없었다.
제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아버지가 포기했는지 밑도 끝도 없이 싸고도는 걸 그만뒀잖으냐. 생각해 보면 너무하지 않니? 아니, 백부가 조카 좀 보러 가겠다는데 그렇게 오지 말라고 화를 내고 말이야. 그래도 이제는 너 좀 만난다고 해도 날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 같더구나. 기회다 싶어서 당장 보러 왔지. 내가 내 조카 얼굴도 모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주 당당했다. 논리에 반쯤 휘말릴 뻔한 해인은 할 말을 잃었고, 그 옆에서 머쓱하게 웃은 아폴론이 덧붙였다.
“뭐, 그 김에 나도 동행했지. 너랑은 대화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 같은 주제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는 너무 오랜만이라……. 그리고 어쨌든 우리 사촌이잖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 아르테미스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와 해인은 사촌지간이고, 아폴론은 그 아르테미스와 남매였으니까. 그러나 해인은 아르테미스의 도움에 감사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 혈연을 왠지 부정하고 싶었다.
“예…….”
“애가 낯을 좀 가리나? 이래서 애를 마냥 싸고돌고 키우면 안 되는데.”
제우스가 쯧쯧 혀를 찼다.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이 시대에는 살아 있는 자식도 없고 조카도 얼마 없어. 특히 너처럼 어린 조카는 정말 오랜만이야. 네가 뭘 해도 나는 예쁘게 볼 자신이 있다. 어지간히 새로워야지.”
해인은 그가 어쨌든 아주 오랫동안 신들의 왕으로 군림한 존재인 건 맞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이 적으니, 신들의 세계가 끝나고 인간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꾸린 지금에 이르러서도 저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는 것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