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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0)화 (140/149)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아들이 스키로스를 떠났음을 전해 들은 바다의 여신은 침묵했다. 혹여나 그녀가 노할까 못내 불안해하던 스키로스의 리코메데스 왕은 길어지는 침묵에 점차 의아한 낯을 할 수밖에 없었다.

“테티스 님…….”

“기어이 그 길을 택했구나.”

여신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을 왕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상관없어졌다.

여신은 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몇 년 전 손수 아들을 데려와 여장까지 시키고는, 어른이 될 때까지 스키로스의 왕궁에 맡겨 두겠다며 잘 살펴 달라 신신당부했던 태도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저 되었다며 말없이 바닷속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없어지자 섬은 언제 아킬레우스가 있었냐는 것처럼, 어쩌면 거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는 모두의 우러름을 받기는 했지만, 그만큼 눈에 띄고 강렬해서 어쩌면 약간은 주변을 피로하게 만들기도 했던 탓이다.

더없이 눈에 띄어 무시조차 할 수 없는 존재의 부재를 반기는 이들이 은연중 많았다. 스키로스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에게해 한가운데 위치한 섬에는 전쟁의 여파도 닿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의 평화로움 끝에, 전해진 것이…….

***

“……그분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전장에 존재했다고?”

전령이 떠나고도 네오프톨레모스는 믿을 수 없어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길 반복했다. 어쩌면 믿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킬레우스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서 겨우 그가 트로이와의 전쟁에 아카이아 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참전한 이들 가운데 가장 어린 지휘관이라고 했었던가.

말없이 떠났다는 사실에 주제가 안 됨을 알면서도 느끼던 서운함은 흩어지고, 아킬레우스는 분명 승전하여 전쟁 영웅이 될 거란 생각에 어렸던 네오프톨레모스는 조금 들뜨기까지 했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스키로스에 한번쯤은 들러 주겠지. 그래도 이곳은 그가 몇 년 지냈던 곳이니까. 소란스러운 전쟁터에 비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니 휴식을 취하기에 나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비록 끝까지 신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의 양자니까. 전쟁 이야기를 들려 달라며 다가가 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기다림의 끝이 이런 부고가 될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부고를 들은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이아 연합군으로부터 사절이 왔다. 그들은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승전을 위해서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그건 네오프톨레모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였다. 저들이 과연 그가 아킬레우스의 친자가 아닌 양자라는 것까지를 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그가 가진 것들 중 손꼽히게 가치 있는 수식언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요청을 수락했다.

마침 그는 아킬레우스가 스키로스를 떠날 무렵의 그 나이가 된 차였다.

전장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아킬레우스는 그토록 미련 없이 떠났고 돌아오지도 못했는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아킬레우스는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냥…….

어디든 화를 풀고 싶었다. 그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기도 했다.

***

전장에 도착해 연합군에 합류한 이후, 네오프톨레모스는 스키로스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가 먼저 죽었다고요?”

“그랬다네.”

네오프톨레모스는 머릿속으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온화한 표정의 사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십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아킬레우스의 부관으로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지만, 그들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아킬레우스와 제법 괜찮은 사이를 유지했다던 이타카의 왕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마 그가 죽고 아킬레우스도 제법 상심했겠지. 친척이기도 했고, 또 유독 친애하던 친우였으니까. 그의 죽음 이후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기도 했고……. 여러모로 좋지 않던 차에 무리하게 출전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네.”

그렇게 이야기를 맺으며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들을 건네주었다. 이버지의 물건은 응당 아들이 가져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무리하게 출전했다는 말로부터 비롯된 불쾌함을 겨우 누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로 무리한 출전을 감행할 사람일까.’

청동 갑옷을 손질하며 네오프톨레모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며칠을 더 진영에서 지내게 되자, 네오프톨레모스는 오디세우스가 오히려 자신이 충격 받을 것을 고려하여 채 하지 않았던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며 대충 얼버무렸던 그것, 그건 심지어 여자 문제였다는 것이다.

어디의 왕녀를 포로로 잡아들였다가 연합군 사령관인 아가멤논과 마찰이 있었다고,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마당에 위안 삼을 여자까지 잃게 되자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냐고…….

‘그 사람이 정말 마음 붙일 곳 없어서 상심할 사람일까.’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던 날,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럼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 되잖아.’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했으며, 스키로스의 어느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원래부터 그렇게 벽이 높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아킬레우스가 직접 골라 맞아들이지 않았어도,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양자였다. 그를 정말 아버지로 모시고 싶었다. 아킬레우스가 인정하지 않아도,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토록 노력했었다. 그의 높은 벽을 넘으려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결국 소용없던 것이다. 정말로,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던 거다.

어릴 적 한번 느껴 보았던 어둑한 감정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어릴 때는 서운함이라고 여겼던 그것의 이름을 이제는 제대로 붙여 줄 수 있었다. 그건 배신감이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어둠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가, 결국 견뎌 내지 못했다. 동경하고 경애하던 사람을 향한 배신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의 여린 정신은 조금씩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니겠지.’

그래, 아닐 것이다.

다들 헛소리나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저들은 아킬레우스처럼 어디 있든 혼자 빛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랑, 친애, 그런 사소한 감정들이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래서 아킬레우스 역시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중일 게 분명했다.

……그렇게 믿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 착각을 고쳐 놔야 해.’

네오프톨레모스는 조용히 다짐했다.

자신은 아킬레우스의 아들로서 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니 자신이 굳건하고 어느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들 역시 아들을 그렇게 키워 낸 아킬레우스를 다시 볼지도 모른다.

아들조차 저렇게 키운 사내가 고작 그런 사소한 감정에 휘둘릴 리 없다고, 그의 죽음은 그저 운명에 의한 불운한 사고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물론 아킬레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를 키운 적 없었지만, 그거야 저들이 알 길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네오프톨레모스는 처음으로 전장에 나선 순간부터 인간의 마음을 버렸다. 평화롭던 스키로스와 정반대로 다른 전쟁터가 낯설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마음을 내려놓으니 그 정도의 낯섦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연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로군.”

“그러고 보면 그가 처음 참전했을 때도 저랬었지. 전장에 온 것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했었어.”

간혹 들리는 다른 지휘관들이나 참모들의 감탄 역시 네오프톨레모스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잘하고 있어.’

확신이 더해졌다. 그는 점점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사람을 죽이는 건 거듭할수록 더 쉬워졌고, 전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무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트로이의 성벽 안으로 진입한다는 위험천만한 작전에 참여하면서도 떨지 않았다. 트로이의 성벽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이후로는 가장 선두에서 검을 휘둘렀다.

얼굴로 피가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화살조차 두렵지 않았다. 매캐한 연기, 피어오르는 흙먼지, 날카로운 비명, 바닥을 적시고 고이는 핏물.

그 속에서 네오프톨레모스는 트로이의 왕자를 죽였고, 왕을 죽였고, 왕의 손자도 죽였다.

하여 마침내 트로이가 완전히 몰락했을 때.

“당신이 내 모든 걸 잃게 했어. 모든 걸…….”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에게 배당된 전리품, 그의 아버지가 죽였던 헥토르의 아내이자, 그가 죽였던 왕의 며느리이자, 그가 죽였던 어린 아기의 어머니인 안드로마케가 자신을 노려볼 때도…….

어떠한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러면 편해졌겠군.”

대꾸하지 않을까 하다 가볍게 던진 말에 안드로마케가 표정을 굳혔다. 고작 포로 주제에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으나,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어 중얼거렸다.

“의미 있는 것을 두어 봤자 좋을 건 없지.”

실은 그건 네오프톨레모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째서 그토록 전장에서 눈에 띄고자 노력했는지조차 흐릿했다. 아킬레우스에 대한 배신감도 어느새 희미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되기 이전에 힘들었던 것을 떠올리면, 네오프톨레모스는 차라리 지금이 좋았다.

▶ 이 소설 속에서는 양자로 나왔지만, 실제 전승에서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친자입니다. 어머니는 스키로스의 공주인 데이다메이아가 맞고, 아킬레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를 꽤 많이 아꼈습니다. 나이는 열 살 남짓인데 너무 어린 것 같아 임의로 늘렸습니다.

전승 속에서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 사망 후, <승리를 위해서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필요하다>는 예언에 따라 참전하게 됩니다. 그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에도 참가하는데,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후 연합군이 승리하고 그는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를 포로로 받아 옵니다.

헤르미오네라는 이름의 스파르타 공주를 약혼녀로 두고 있었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안드로마케와의 사이에서 자식도 많이 얻었는데, 많은 전승이 존재하지만 항상 언급되는 자식으로는 몰로소스가 있습니다.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그의 피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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