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39)화 (139/149)

외전chap1. 네오프톨레모스

“죽었다고? 그분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거짓말 마라, 그럴 리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끝을 늘이자,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사실입니다. 아킬레우스 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곁에서 함께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탄식을 내뱉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연히 선 채로 자신이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새겼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다의 여신인 그의 어머니 테티스와, 프티아에 있을 그의 아버지인 펠레우스 왕에 이어, 양자인 자신에게까지 마침내 전해진 부고(訃告).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킬레우스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분이었는데.’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만 아연한 심정에 말을 잃고 말았다.

***

아킬레우스가 스키로스에 왔을 때, 그는 열다섯조차 채 안 된 소년이었다.

당시 고작 대여섯 살 남짓 되었던 네오프톨레모스는 그가 무슨 이유로 스키로스에 머물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도 몰랐다. 다만 먼발치에서 겨우 스치듯 보았던 그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몇 달 뒤,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양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제법 놀라고 말았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어머니인 데이다메이아 공주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분께서는 제우스 님의 피를 이어받은 펠레우스 왕과 테티스 님의 자식이란다. 분명 영웅이 되실 거야. 그리스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겠지.”

데이다메이아는 자신보다 다섯 살쯤은 어린 소년에게 그분이라는 존칭을 썼다. 조금은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뒤따라오는 설명을 들으니 네오프톨레모스도 그 태도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한낱 인간이 아닌 신의 피를 그토록 짙게 이어받은 반신이라면, 어머니의 말대로 틀림없이 영웅이 될 존재일 테니까.

양부로 삼기에 고작 열 살 차이는 너무 적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킬레우스는 보통 열다섯의 소년이라기에는 이미 키가 훌쩍 컸고, 체격도 서서히 단단해지고 있었다. 네오프톨레모스에 비하면 충분히 어른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니까.’

그건 스키로스 왕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왕의 첫 번째 딸인 데이다메이아는 어느 날 왕궁에 들렀던 이름 모를 음악가와 밤을 보내고 네오프톨레모스를 얻었다고 했다. 단 한 번의 일탈치고는 커다란 대가였다.

공주를 유혹했던 음악가는 섬을 떠난 지 오래, 몇 달이 지나고서야 딸의 임신을 알게 된 왕은 노발대발했지만, 배 속의 아이는 열 달을 꼬박 채워 건강하게 태어나고야 말았다.

다행히 어머니를 빼닮아 네오프톨레모스는 붉은 금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데이다메이아와 정을 통했던 음악가도, 데이다메이아도 외모가 뛰어났기에 네오프톨레모스 역시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왕의 첫 자식이자 장녀로, 아름다운 공주로 사랑받았던 데이다메이아는 왕궁 구석진 곳에 갇히다시피 하여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끝에, 아꼈던 장녀를 도저히 외면하지 못한 왕이 간절한 호소로 얻어 낸 기회였다.

“아버지께서 너와 나를 가엾게 여겨 좋은 기회를 주셨다.”

데이다메이아는 눈을 내리깔며 속삭임을 이어 갔다.

“그분을 실망하게 하지 말거라. 많이 배워서,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모두가 너를 보면 그분을 함께 떠올릴 수 있도록 자라야 해.”

스키로스의 아비 없는 왕자보다는, 반신의 양아들이라고 불리는 쪽이 명예로울 테니까. 어쩌면 언젠가는 양아들이 아닌, 그냥 아들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등을 짧은 팔로 마주 안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하지만 아킬레우스와 잘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디 계시는지 모른다고?”

“예, 일단 왕궁 안에는 안 계신 것 같아요.”

일단 마주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아킬레우스는 왕궁에서 있을 때는 여장을 하고 지내야 했는데, 아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매번 왕궁을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여장을 했건, 하지 않았건,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의 어느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대체 눈에 띄지 않고 사라지는 걸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각고의 노력 끝에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나마 스키로스의 왕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킬레우스와 가장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스키로스의 왕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말이다.

그조차도 장장 몇 달에 걸쳐 쫓아다닌 덕분이었다.

“아킬레우스 님, 여기 계시……. 아.”

“응?”

그나마 왕궁에 있을 때 아킬레우스가 자주 찾고는 하는 정원으로 그를 찾아온 네오프톨레모스는, 이미 아킬레우스를 찾은 선객이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선객은 지난 몇 달 사이 어느새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네오프톨레모스구나. 오랜만이다.”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 파트로클로스가 친절한 투로 말을 건넸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약간 뒤틀리는 속내를 티 내지 않으며 마주 인사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아킬레우스는 검을 가지러 갔는데. 그를 찾으러 온 거라면 같이 기다릴까?”

“그래도 될까요?”

파트로클로스는 재밌다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그럼. 여기는 애초에 네 집이잖아, 왕자님.”

네오프톨레모스는 천천히 파트로클로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의 왕궁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네오프톨레모스만은 적당히 상대해 주었지만, 그건 계속해서 매달리는 네오프톨레모스가 귀찮아서인 게 뻔했다. 양자라고는 해도 정말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으니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보다 더 귀찮게 하면 아예 떼어 놓을지도 모르니까.’

그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소년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몹시 한정적이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알기로는 딱 두 개뿐이었다.

‘검, 그리고…….’

눈앞에 있는 파트로클로스라는 사내.

잘 웃지 않고 언제나 서늘하게 사람들을 노려보듯 응시하는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가끔 방문할 때면 그나마 표정이 풀려 화색이 돌고는 했다.

어릴 적 고향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소꿉친구이자 친척이라는데, 그런 존재가 있어 본 적 없는 네오프톨레모스로서는 사실 그 친애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자신은 매달려서 조금 얻어 내는 관심을 존재만으로 차지하는 것도 솔직히 질투가 났다.

그러나 그를 적대할 수는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네오프톨레모스를 양자로 삼는 것에 있어, 파트로클로스의 권유도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아킬레우스를 이름으로 부르니?”

“예, 그냥…….”

“어색해서?”

“예.”

사실은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굳이 길게 풀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네오프톨레모스도 아킬레우스를 정말 아버지로 여기고는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분이지.’

존재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오는 그 사람이 아버지라면 그 이상의 자랑거리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도망간 형편없는 남자가 아닌, 그가 진짜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란 적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그런 기대를 겉으로 드러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아직 아킬레우스가 오지 않았는데. 바쁜 일이 있어?”

“네, 방금 잊어버리고 있던 게 생각나서…….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어요.”

사실 그런 일은 없지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와 만날 때 누군가가 끼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괜히 방해꾼이 되어서 어설프게 끼어 있는 것은 처음 한번 경험했으면 족한 일이었다.

“그래?”

의자에서 일어나는 네오프톨레모스를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묘한 눈으로 지켜봤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동정받고 있는 것을 정면으로 인정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조심해서 가렴.”

“반가웠습니다.”

멀어지는 등 뒤로 약간 난처한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거슬리지 않도록 애쓰며 일이 년쯤의 세월이 흐르자 아킬레우스도 네오프톨레모스를 대하는 태도가 제법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파트로클로스를 대할 때와 비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네오프톨레모스가 자신의 양자라는 것쯤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을 때를 제외하면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귀찮은 티를 내지도 않았고, 심지어 가끔 내킬 때면 검을 가르쳐 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지나가듯 칭찬을 들었던 날에는 하루 내내 기뻤다.

드디어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네오프톨레모스만의 착각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분이 스키로스를 나가셨다고? 언제?”

눈을 크게 뜬 왕자를 보며 시종이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아무래도 새벽 같습니다. 이타카의 왕께서 타고 온 배에 함께 타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떠나셔서……. 원체 궁에 잘 계시지 않으니 완전히 떠나셨다는 것도 오늘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알아챘다고 합니다.”

스키로스의 아무도 그가 섬을 떠났다는 걸 몰랐다. 그나마 아킬레우스가 유하게 대하는 듯하던 네오프톨레모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에게는, 열다섯의 그 소년에게는 결국 스키로스의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불과했을 뿐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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