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14 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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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은 언제나 그랬듯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게이트를 빠져나오다 말고, 그제야 문득 제 행동을 되돌아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헤파이토스의 공방이 있는 섬은 관광지가 아니어서 오고 가려면 꽤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했다. 그 탓에 새벽부터 다짜고짜 섬을 탈출하려는 아킬레우스의 행동이 헤파이토스에게는 미친 것처럼 보였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공항이 있는 섬으로 한 번 이동했다가, 거기서 가장 빠른 아테네행 항공편을 타고 공항에 내리자 어느새 아침이었다. 환한 공항 안에서 아킬레우스는 크로노스로부터 건네받았던 종잇조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스키로스 부근.’
크로노스의 말대로 여기는 기원전이 아니니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인한 지 오래다. 문제라면 이쪽은 헤파이토스가 머무는 섬처럼 그저 관광지가 아니고 인구가 조금 적을 뿐인 섬이 아니라, 아예 개인이 소유한 사유지라는 것이었다.
이제 와 그만두고 일정을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약속이라 할 만한 것도 안 하기는 했지만, 아킬레우스는 반드시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정말 생각을 조금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았다. 그는 문득 여전히, 자신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음을 인지했다. 되짚어 보면 오늘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 내내 이 상태였다…….
‘정신없군.’
생각을 해 봐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걸음부터 옮겼다. 그가 공항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잠시만!”
낯선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아킬레우스의 팔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끌려가지는 않았으나 걸음을 멈출 정도는 되었다. 명백히 상대가 먼저 무례했던 행동이었으니, 아킬레우스는 당장 대응해서 상대를 제압하려 오히려 팔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아킬레우스는 대응하려던 것을 그만두며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당신은.”
시야에 들어온 건 반짝이는 금발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얼굴은 어려 보였으나 키와 체격은 아킬레우스보다도 조금 더 컸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상대는 신이었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하자, 빙그레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킬레우스.”
“누구십니까.”
“아, 우리 제대로 본 적은 없지. 난 헤르메스다.”
딱딱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늦게나마 이름을 밝힌 헤르메스는, 그러나 이내 이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아킬레우스의 팔을 잡은 손을 당기며 산뜻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튼 여기 있는 걸 보니 여행하러 가는 모양이지?”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초조하던 와중에 이상한 신에게 붙들려 버린 아킬레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그러나 헤르메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웃는 얼굴로 아킬레우스를 마주 보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라와, 내가 태워 줄 테니까.”
“예?”
“왜? 표정이 왜 그러지? 이 여행자들의 신께서 친히 기사 노릇을 해 주겠다는데.”
누구라도 어이없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해 놓고, 헤르메스는 당당하게 아킬레우스를 이끌어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마치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처럼 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진 스포츠카의 조수석으로 아킬레우스를 먼저 밀어 넣었다.
뒤이어 유유히 운전석에 탑승해 운전대를 잡은 헤르메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목적지가 어디야? 뭐든 줘 볼래?”
찰나의 생각 끝에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 같아 순순히 따라와 준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크로노스로부터 받았던 종잇조각을 헤르메스에게 건넸다. 숫자만 여러 개 쓰인 불친절한 위도 경도일 뿐이었지만, 잠깐 바라본 것만으로도 헤르메스는 어디인지 알아차린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숙부님 섬. 사유지인 건 너도 알지?”
“압니다.”
시동을 걸고 복잡한 공항 주변을 빠져나가며, 헤르메스는 태연한 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가려 했어? 이것 봐. 공항 주변 벌써 복잡하다. 정신도 없어 보이는데, 택시를 잡든 직접 운전을 하든 너 혼자였으면 공항 근처도 못 벗어났을걸. 게다가 사유지까지 가는 방법도 문제고.”
전부 맞는 말이기는 했다. 다만 그들은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 본 사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킬레우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헤르메스를 돌아보며 아까부터 의문이었던 것을 비로소 질문했다.
“감사하긴 합니다만 왜 도와주십니까?”
“뭐, 옛날에도 사람 여기저기 옮겨다 주는 게 내 일이었는걸.”
헤르메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없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는데, 그것이 불과 전날 공항에서 먼발치에서나마 잠깐 보았던 어린 사촌과 관련된 것이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겪어 본 신만이 알 것이다. 현대에 태어난 반신을 기원전에서 먼저 만나 봤다니,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황스러움은 금세 진정되고 흥미로움만이 남았을 때, 아프로디테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크로노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 주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언급한 다음, 한 가지 부탁을 해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연 사랑을 관장하는 여신이 관심을 가질 법한 내용이었고, 그가 듣기에도 꽤 재밌는 이야기였으므로……. 헤르메스는 오래 생각할 것 없이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부담 안 가져도 돼. 나도 나름 재밌어서 하는 일이고.”
지금 그는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부탁을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또 아주 남 일도 아니니까. 알지? 내 사촌인 거.”
웃으며 덧붙인 헤르메스는 천천히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 오래 운전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어느새 항구였다. 그는 바로 내리는 대신 창문을 내리고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바닷가를 가리켰다.
“숙부님은 날아다니는 모든 기계를 싫어하셔. 경비행기든, 헬기든, 그런 거 타면 착륙 못 한다. 지금처럼 빨리 도착하게 해 줄 테니까 내 요트 타고 가.”
헤르메스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도와준 셈이었다!
***
아프로디테는 마치 이전부터 해인과 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현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고, 심지어 포세이돈은 이 만남을 몹시 싫어하고 있었지만, 아프로디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 같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해인을 이끌며 이것저것 옷을 대어 보고, 제일 나은 것을 골라 주고, 머리를 만져 주는 등 바쁘게 움직이며 홀로 즐거워했다.
그 탓에 해인은 반강제로나마 복잡한 생각들을 조금쯤 잊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참 휩쓸려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회의감이 든 것이다.
‘이게 뭐 하는 거지.’
해인은 멍한 얼굴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아프로디테가 어째서인지 설렌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문틀에 기대서 있던 포세이돈이 그런 아프로디테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남의 딸 데리고 즐거워 보이시는군.”
“너무 재밌네요. 나도 딸 하나만 낳을까.”
포세이돈은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프로디테는 창밖의 바다에 문득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천천히 나가 볼래?”
“어디를요……?”
“선착장으로.”
뜬금없는 말에 해인은 당황하며 포세이돈을 돌아보았다. 이분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의문이 담긴 딸의 시선에 포세이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로디테가 그랬던 것처럼 힐끗 바다를 바라본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해탈한 표정을 했다.
“저 말대로 한번 나가 보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그래! 자, 어서!”
결국 해인은 포세이돈의 동의와 아프로디테의 등쌀에 떠밀려 별장 밖으로 나섰다.
기온은 선선했으나 머리 위로는 햇살이 선명하게 부서져 내렸다. 잔잔한 파도가 이는 바다는 투명하게 반짝였다. 해인은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음.”
해인은 불현듯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분에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당장 어제도 갔었던 곳인 만큼 이제 와 낯설 리 없는 길이었는데, 어째서인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으로 묘한 감각이 따라붙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 혹은 긴장감, 그도 아니면 아까 전 아프로디테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던 것과 같은 설렘과도 비슷했다.
그 기분의 근원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아야만 할 것 같다. 느려졌더라도 해인은 멈추지 않고 걸어서, 마침내 선착장이 보일 만한 곳까지 도달했다.
푸르게 빛나는 바다, 그리고 그 위로 세워진 선착장은 그대로다. 그러나…….
길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문득 그 광경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해인은 걸음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익숙했기 때문이다.
기억보다 그 길이는 조금 짧았으나 저토록 짙고 선명한 금색 머리카락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못 알아볼 수 없었다. 아연한 기분으로, 제대로 걷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겨, 해인은 마침내 그 상대와 다섯 걸음쯤의 거리를 두게 됐다. 그 정도로 가까워지자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어 해인은 서서히 멈춰 서고 말았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울 거리, 그러나 설마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장소에서,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희미한 떨림을 품은 의문이 흘러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잊을 수 없는 색채의 눈동자가 수많은 말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감정들을 담고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복잡하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으나, 뜻밖에도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맞은편의 아킬레우스가 가만히 웃더니 천천히 팔을 벌렸다.
“……해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읽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기다림, 환희, 그리움, 그 모든 것이 얽힌 사랑까지, 수많은 감정이 똑똑히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틀림없다고 눈 속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찰나의 머뭇거림 끝에 얻은 확신이 무엇보다 선명했다. 그 확신에 힘입어 해인은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다섯 걸음 정도였을 거리는 고작 세 걸음만으로도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와 동시에,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펼친 팔 안으로 힘껏 안겨 들었다.
“아킬레우스……!”
[그래.]
기다렸다는 듯 단단히, 숨이 막힐 만큼 몸을 감싸는 팔과 함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말했었지. 내 모든 건 전부 그대 거라고.]
현대에서 듣기에는 이질적인 언어였으나 해인은 그것을 당연하게 알아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녀도 쓰던 언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대, 이 땅에서 저 언어를 아는 인간은 없는 것이 정상인 언어. 현대의 것이 아닌 아득한 과거의 것, 이제는 흔적만이 남겨진 머나먼 기원전의 언어다. 그렇기에 그건 하나의 증거였다.
저 말투, 단어, 모든 것이 자신과 같은 기억을, 감정을 공유했던 그 사람이 맞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그걸 두고 가면 안 되잖아.]
이어지는 속삭임을 들으며 해인은 손을 들어 눈앞의 기적을 더 세게 마주 안았다. 팔 안 가득 들어온 체온과, 전해지는 심장의 떨림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 사랑하는 사람은 기어코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다.
마침내, 긴 여정의 끝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