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36)화 (136/149)

“해인, 괜찮으냐?”

포세이돈이 침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나 괜찮은 것도, 괜찮지 않은 것도 아니었던 해인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포세이돈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자식의 표정을 확인한 포세이돈은 부모답게 먼저 침착해졌다.

“지금까지 내게 없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올랐는데, 그것들이 모두 너에 대한 것이어서 급히 달려왔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지.”

그는 손에 잡히는 근처의 의자를 아무렇게나 끌어와 그 위로 앉았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건 이십일 년 전이 아니라 삼천 년 전이었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해인의 눈동자 위로 얼핏 빛이 돌아왔다. 해인은 기원전의 땅에서 크로노스가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렸다. 미래에서 무언가를 했기에 과거로 오게 되었고, 과거에서 할 일을 마치면 다시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이 상황을, 그는 시간의 원이라고 표현했었다.

“……시간의 원.”

속삭이듯 나온 말에 포세이돈 역시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에게도 해인과 함께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선명했던 덕분이다.

“크로노스가 방금 다녀간 모양이로구나.”

“네, 그걸 통해서……. 제가 삼천 년 전에서 지금 이 시대로 방금 되돌아오며 원이 완성된 건가 봐요.”

중얼거리는 것 같은 자식의 목소리를 들으며 포세이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되는 거였군.’

해인이 현대에서 아득한 고대로 한번 이동되기 전까지는, 당장 포세이돈부터가 그러했듯 해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존재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존재했더라도 그것이 사실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해인으로부터 비롯됐던 작은 사건들은 개연성을 잃거나 교묘하게 형태를 바꿔서 구전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이제는 신화 속의 작은 이야기들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성된 지금은 포세이돈과 같이 불멸을 가진 신들, 혹은 당사자인 해인 정도만이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 나머지 해인에 대해 알 법한 자들은 이미 죽어서 흙이 된 이후였으므로……. 남겨진 신화에 해인의 흔적이 깃드는 일은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깔끔한 균열의 보수였다.

그러나 포세이돈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왜 내 딸이고, 왜 아킬레우스였고, 거기서 뭘 해서 다시 돌아온 거지?’

정확한 사정에 대해 들은 것은 아킬레우스와 해인 둘뿐이었으므로 포세이돈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포세이돈은 침대에 걸터앉은 해인을 힐끗 보았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그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다면 해결될 의문이기는 했다. 하지만 넋이 아직도 반쯤 나간 것 같은 자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괜히 손끝을 가만두지 못하고 까딱거렸다. 전쟁터에서 정신 못 차리고 검을 휘두르며 돌아다니다, 강의 신에게 잘못 걸렸던 아킬레우스를 구해 주었던 때가 떠오른 탓이다.

그를 수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맺은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의 얼굴 위로 떠오른 아득한 절망감이 새삼스러울 만큼 생생했다. 포세이돈은 약간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래서 그놈 결국 죽었지.’

모를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죽기 전날 크로노스가 그에게 찾아와 수호를 거둬 달라 요청한 바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귀찮은 일을 더는 셈이니 나쁠 것 없다며 당장 수락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오싹한 부분이 있었다.

‘본인이 바란 일이라고 했었는데. 이놈 설마…….’

만약 아킬레우스 역시 이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해인이 떠나고 나서도 다른 이들과 달리 해인에 대한 기억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면, 오싹함은 더욱 커진다.

‘내 딸 없다고 다 놓아 버리고 죽…….’

포세이돈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고 스스로 되새기며 급히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냈다. 그러나 신으로서의 직감이 더 빨랐다. 직감은 그 가정은 진실에 가깝다고 알리고 있었다. 그는 그럴 리 없음에도 문득 현기증마저 느껴질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수호를 거둔 걸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을 해인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걸 넘어 반드시 모르게 두고 싶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해인은 분명 아킬레우스를 제법, 아니, 몹시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 아니.’

아킬레우스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진 포세이돈은 애써 머릿속을 비워 냈다. 그리고 내내 침묵을 지키며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딸을 돌아본 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식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옆에 앉아 여린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는 말 없는 위로를 건넸다.

***

“아킬레우스.”

크로노스가 다녀간 이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상하게 굳어 버린 아킬레우스를 보며 헤파이토스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찾은 기억에 문제라도 있나?”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킬레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본인도 스스로가 어떤 기분인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탓이다. 되찾은 기억만은 더없이 선명했으나, 그 기억이 머릿속을 전부 차지해 버린 탓인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는 설명하기를 그만두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뭐야, 왜 이래?”

“찾을 사람이 있습니다.”

“갑자기 뭐?”

“지금 당장, 어떻게든…….”

헤파이토스가 슬슬 진지하게 걱정된다는 눈으로 아킬레우스를 응시했다.

“지금 새벽이다, 아킬레우스.”

그는 기원전에도 자신의 대장간에 틀어박혀 무기나 갑옷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에, 시간의 원이 완성된다 한들 굳이 되찾아야 할 기억 같은 게 없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헤파이토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아직 여기 있군.”

여전히 열려 있던 공방의 문을 밀어 열며, 불과 몇 분 전 이곳을 떠났던 크로노스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용건이 뒤늦게 생각난 듯 안으로 들어섰다.

“아킬레우스, 이것 받거라.”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황망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내밀어진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덥석 받아 살펴본 아킬레우스는, 종이 위로 쓰인 여러 개의 숫자를 훑었다.

“뭡니까?”

“내 선의인데, 위도와 경도다.”

그 말에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크로노스를 마주 보았다. 온화한 시간의 신의 얼굴 위로 즐거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여기는 기원전이 아니니 그 정도면 찾을 수 있겠지? 자, 거기로 가 보면 된다.”

그 말을 이해하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

해인은 완전히 해가 뜨고 난 뒤에야 겨우 본인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그의 기일로부터 삼천 년하고도 몇백 년이 더 지난 때에 눈을 뜨게 된 심정을 달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있었다.

떠나기 전 크로노스로부터 들었던,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삶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예언만 없다면 완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잘 살았겠지.’

애써 좋게만 생각하려던 해인은 오래 지나지 못하고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오래 기억했을까, 아니면 의외로 금방 잊었을까.’

정말로 궁금한 건 그쪽이었지만 이제는 답을 알 수 없으므로 의미 없는 의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아킬레우스가 했던 말이 맞았다. 그가 차지하던 부분이 너무 넓은 나머지, 해인은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곁에 있던 사람도 마찬가지로 삼천 년 전의 사람이 되어 버린 이 상황에 차마 말로는 표현 못 할 괴리감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눈에 보이는 현대의 풍경마저 고통이 될 것 같아, 그만 눈을 감았을 때였다.

문득 방문 바깥에서 낯선 누군가와 포세이돈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넘어왔다.

“……무슨.”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섬으로 찾아올 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부터가 이상함의 시작이다. 두 번째로는 포세이돈이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드물게도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낯선 목소리의 주인도 절대 지지 않고 함께 대거리를 해 대는 통에, 들려오는 대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인간이 아닌가.’

포세이돈과 저렇게 싸울 수 있다면 같은 존재인 신밖에 없는 법이다.

해인은 머뭇거리다 슬쩍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별장이 워낙 넓다 보니 그것만으로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소리만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해인은 천천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 근처에 다가서자 겨우 포세이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현관을 막아서며 바깥에 선 존재를 어떻게든 쫓아내려 애쓰는 중이었고, 상대는 어떻게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자 애쓰고 있었다.

“초대한 적도 없는 자는 안 받는다고 했잖소!”

“아, 치사하게 굴지 말고 좀 비켜 봐요! 내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닌데!”

“그건 댁 생각이고!”

해인은 당황하며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싸움이 생각 외로 유치했던 탓이다. 평소였다면 기척을 느꼈을 포세이돈은 어떻게든 현관 앞을 막고 있느라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불시에, 포세이돈의 어깨 너머로, 해인은 선명한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포세이돈과 싸우던 이가 기어코 해인을 먼저 발견한 것이었다.

“앗, 거기!”

상대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해인마저 똑바로 마주한 순간 아연해질 만큼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기원전의 땅에서 보았던 헬레네가 단순히 보기에 더없이 눈부셨다면, 이쪽은 무언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아름다움이었다.

“잠시만, 얘, 나 좀 보자!”

해인을 발견하자마자 화색을 띤 그녀는 더 이상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 손을 써서 포세이돈을 옆으로 거칠게 밀쳐 냈다. 해인이 뒤에 서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아 당황하던 포세이돈은 방심한 죄로 결국 길을 터 주고 말았다.

환한 얼굴로 해인의 눈앞까지 달려온 상대가 손을 뻗어 해인의 양 뺨을 감쌌다.

“맞구나! 네가 그 애야.”

가까워진 상대의 눈동자가 다시없을 흥미로 반짝였다. 반짝이는 금발, 흰 피부, 부드럽게 올라간 속눈썹까지 전부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그 속눈썹 아래의 눈을 마주한 해인은 상대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한순간 소름이 끼쳤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그 눈빛이 몇 배는 더 기이했다. 그렇지 않은 신들도 있기는 했지만, 일단 눈 속에 무언가 번뜩인다면 십중팔구로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노, 놓아주세요.”

“아, 그래.”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는 해인을 굳이 막지 않으며 상대는 순순히 손을 뗐다. 다만 그녀는 본인이 해인이 물러선 만큼 가까이 다가서서 거리를 유지하고는 그대로 질문했다.

“내가 누군지는 짐작이 가니?”

해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황스러움을 조금 가라앉히자 정체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생긴 것부터가 답을 알리고 있었다.

“……아프로디테 님.”

“그래!”

아프로디테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두어 번 박수 쳤다. 동시에 뒤에서 포세이돈이 다가오더니, 해인의 어깨를 슬쩍 잡으며 아프로디테로부터 약간 떨어트렸다.

달리 들려오는 말은 없었지만 해인은 힐끗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자식에게 본인을 제외한 다른 신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을 포세이돈은 이미 벌어져 버린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과, 늦어 버렸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포기해 버린 마음이 반반 섞인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의 행동을 본 아프로디테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해인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자, 네 말대로 나는 아프로디테가 맞단다. 우연히 크로노스 님으로부터 네게 벌어진 일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말을 끝까지 다 들어 보니 분명 오늘 내로 더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집주인의 격렬한 거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달려왔지.”

“……재밌는 일이요?”

아프로디테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과 사랑의 감정이 시들었던 적은 없었기에, 그녀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나름대로 즐겁게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의 힘이 강력했던 시대처럼 마음껏 인세에 개입할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지루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마침 그러던 찰나에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운명으로 엮인 사랑이라니.’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게도, 네게도 좋은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어쨌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좀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말한 그녀는 힐끗 포세이돈을 돌아보며 통보했다.

“들어갈게요.”

“나가시오.”

“들어오라고. 알겠어요.”

의미 없는 짧은 문답이었다. 포세이돈은 포기하는 마음이 조금 더 강해진 듯 더 이상 제지하지 않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해인이 기원전의 땅에서 이미 다른 신들을 몇 번쯤 만나 봤으리라는 걸 짐작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자, 같이 가자. 네가 쓰는 방은 어디니? 저쪽?”

아프로디테는 해인의 옆으로 붙어서는 친근한 친척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붙여 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포세이돈에게는 여전히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였다. 휩쓸릴 수밖에 없는 태도에, 해인은 그대로 아프로디테에게 반쯤 끌려가듯 함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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