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파이토스의 짐작대로 크로노스는 곧장 아킬레우스의 앞으로 향했다.
마치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다행히 문을 열러 가기 전 헤파이토스가 보냈던 눈짓이 효과를 발휘해, 아킬레우스는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지 않고 멀쩡히 앉아 있었으므로 문제없이 크로노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는 반가운 기분으로 눈앞의 반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금색 머리칼부터 선명한 눈동자, 반듯한 콧대나 섬세한 눈매까지 모두 익숙한 모습이다. 영혼도, 기억도, 육체를 구성한 모든 것들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크로노스는 먼저 입을 열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기껏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네 보려던 아킬레우스는 잠깐 침묵하다 물었다.
“……저를 이전에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주 오래전 몇 번인가 만났었지. 길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크로노스가 말하는 ‘오래전’이 지금의 삶이 아닌 지난 삶을 뜻한다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었지만, 그 지난 삶에서도 아킬레우스는 크로노스를 만난 기억이 없던 탓이었다. 애초에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크로노스의 정체조차 몰랐다. 헤파이토스의 태도와, 방금 전의 말을 통해 신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 아킬레우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크로노스는 더 뜸 들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알려 주었다.
“나는 시간의 신이다. 크로노스라고 하지. 그리고…….”
희미하게 웃은 크로노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네 잃은 기억을 돌려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볍게 덧붙인 것치고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마주하고 있던 아킬레우스도,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헤파이토스도 나란히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저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림을 내뱉던 아킬레우스는 말을 다 잇지 않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찰나에 눈앞에 있는 이 초면의 신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기회였다. 당장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마침 크로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 하는데, 어쩌겠느냐?”
“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라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답이었다. 아득한 옛날과 다를 바 없었다. 크로노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헤파이토스도 한번 돌아보더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을 흘려보낸 뒤 말을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들이 더 강력해지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들의 믿음과, 그 믿음의 증거가 되는 제물이다.”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다행히 아주 오래전 네게 미리 받아 두었던 제물을 내가 아직 갖고 있으니, 지금은 그리 큰 것을 받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허나 지금 같은 시대에 소나 양 같은 동물은 의미가 없으니……. 네 피를 조금 내어 주겠느냐?”
말을 들은 순간 아킬레우스는 바로 움직였다. 마침 장소는 공방이었기 때문에 날붙이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헤파이토스의 작업대로 곧장 다가가, 작은 나이프를 집어 들고는 말릴 틈도 없이 길게 팔을 그었다.
“야! 작업 도구로 피를 내면 어떡해!”
지켜보던 헤파이토스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아킬레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팔을 하고는 이제 어쩌면 되냐는 듯 자신을 돌아보는 반신의 모습에, 크로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꺼냈다고 말하기에는 제대로 된 형체조차 불분명한 안개 같은 것이었다.
“이 위로.”
크로노스는 허공에서 일렁이는 형태 없는 것을 아킬레우스의 앞으로 밀었다. 표정은 없으나 눈만은 선명하게 빛나는 채로, 반신은 신의 의도에 맞춰 안개 위로 피를 떨어트렸다. 그러면서도 제 피를 먹이고 있는 안개의 정체는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는 크로노스를 마주 보았다.
“이거면 됩니까?”
크로노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그가 펼쳐 든 것은 아득한 옛날 아킬레우스로부터 걷어 냈던 그의 시간이다.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영혼으로부터 빼내어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시간 위로, 이제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시간을 부여받은 영혼의 육체가 지닌 삶의 증거가 떨어져 합쳐졌다.
이조차 아킬레우스의 결정이고 선택이었으니 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요한 만큼은 되었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 크로노스는 손을 뻗어 길게 그어진 상처의 시간을 돌렸다. 이 정도는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멀쩡해진 팔을 힐끗 내려다보는 아킬레우스에게, 크로노스는 비로소 확답했다.
“조금 기다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더 머물지 않고, 당장 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헤파이토스의 공방을 떠났다.
***
스포라데스 제도 어딘가에 위치한 포세이돈의 섬, 그곳에 지어진 고요한 별장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도착했다.
그 손님은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걸어서, 깊이 잠들어 있는 포세이돈의 자식 한 명만이 존재하던 고요하고 어두운 방으로 스며들듯 들어섰다.
그는 소리 없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 달빛 한 줄기가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수려한 외양이었지만 동시에 좀처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을 가진 남자, 시간의 신 크로노스였다.
침대 곁에 선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비로소 시작이자 끝이로군.”
이것으로 그는 균열을 완전하게 마무리한다.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약간의 어긋남도 없이 매끄럽게 연결된 시간의 원의 완성이었다. 끊어져 있던 선이 이어지며 삼천 년 전의 과거에 누군가가 존재했던 것은 비로소 실제가 되고, 그때를 기억하는 자들의 기억 속 빈 곳은 다시 채워질 것이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잠들어 있는 반신의 이마를 스치듯이 짚었다.
“자, 아이야. 네 운명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또렷한 목소리가 흩어져 방 안을 채웠다. 뒤이어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다시 어둠에 스미듯 모습을 감췄다.
다시 고요해진 방 안에는, 직전까지의 풍경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익숙한 방 안에서, 해인은 문득 눈을 깜빡였다.
***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저 그런 기억들이 아니었기에 비어 있는 곳이 채워지는 과정은 더없이 강렬했다. 지난 시간 동안 느껴 왔던 섬뜩함의 정체가, 그 상실감의 근원이 순식간에 분명해진다.
악몽과도 다름없었으나, 원망하지 않고 그저 찾아내고 싶었던 그 무언가.
아킬레우스는 일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완전하지 않았던 기억 속,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새파란 눈동자가 비로소 다시 떠올랐던 탓이다.
***
무언가 알 수 없이 추운 듯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찰나 동안 어두웠던 것 같은 눈앞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있어 그럭저럭 주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이 낯선 듯 낯익었다.
현대였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눈을 몇 번 깜빡인 해인은 자연스레 침대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냈다. 몇 달 동안 만지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거짓말인 듯 전원 버튼을 누르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현대의 기술이 액정 위로 불을 밝혔다. 네 개의 숫자가 드러나 시간을 표시해 보였다.
“……새벽이구나.”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날짜였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익숙한 한글과 숫자를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해인은 지금이 기원후 이십일 세기라는 것을 완전하게 확신했다. 동시에 자신이 기원전으로 떠났을 때를 기준으로 해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몇 달 전, 혹은 삼천 년쯤 전, 절벽에 세워져 있던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크로노스를 만났을 때 그가 넌지시 건넸던 말속의 정보 그대로였다.
그때 크로노스가 굳이 해인의 시간을 고정해 주었던 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 몸의 시간도 그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대로였다. 해인은 지금 그녀가 기원전으로 이동 당했던 바로 그 순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찰나에 해인은 자신이 여전히 기원전의 의복을 몸에 걸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주제에 입고 있는 옷은 키톤이라니, 어쩔 수 없이 현실감이 떨어졌다. 어쩐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 같은 붕 뜬 기분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바깥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심각한 표정의 포세이돈이 방 안으로 급히 걸어 들어왔다.
“해인!”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 짙은 푸른색 눈, 거대한 체격, 모두 아득한 옛날의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모두 현대의 것들이었고, 손에 들려 있어야 할 트리아이나도, 얼굴의 반을 가리던 수염도 없었다.
“……아버지.”
현대의 포세이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