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34)화 (134/149)

***

한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고요한 시간대였다.

헤파이토스는 넓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작은 시계의 복잡한 부품을 조립해 나갔다.

태어났을 적부터 대장장이들의 신이었던 그는, 기나긴 시간이 흘러 기원후 이십일 세기에 이르러서도 멀쩡하다 못해 즐겁게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신 중의 하나였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고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여 년 전쯤 키클라데스 제도 부근에 위치한 작은 섬에 자리 잡고 공방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흥미가 닿는 대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며 취미 생활을 하는 동시에, 겉으로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고장 난 기계들을 고쳐 주며 생업을 이어 나가는 척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로서는 별달리 어렵지도 않은 일을 통해 인간들의 감사와 인정, 그리고 믿음을 받아 내는 셈이었으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공방을 차린 첫 번째 주인에서 그의 아들로, 그리고 다시 손자로 신분을 바꿔 가는 귀찮은 일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됐군.”

조립을 끝낸 시계가 멀쩡히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헤파이토스는 그것을 잘 정리해서 테이블 한쪽에 밀어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 끝에 닿은 것은 소파 위로 길게 늘어진 젊은 청년이었다.

“……흠.”

헤파이토스는 표정 없는 낯으로 눈을 굳게 내리감은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언제 봐도 완벽히 균형적으로 생겨 아름다운 얼굴이다. 태생이 대장장이의 신인 탓인지, 그는 무엇이든 잘 만들어졌다면 종류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호감을 갖는 편이었다.

잠깐의 감상을 끝내고, 헤파이토스는 아주 조용히 입을 열어 조심스레 확인했다.

“자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긴 속눈썹 아래로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눈동자는 또렷한 물빛을 띠고 있었다.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선명하다 못해 형형하게까지 보이는 눈을 살피듯 확인한 헤파이토스가 가만히 혀를 찼다.

“그래, 안 잘 것 같기는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괜찮으냐?”

청년은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익숙합니다.”

“익숙한 게 괜찮다는 뜻이 될 수는 없지.”

의자를 완전히 뒤로 돌리고, 헤파이토스는 청년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전, 아득하게 먼 옛날 헤파이토스는 티탄족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었다. 그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림포스에서부터 바다로 내던져졌는데, 신으로서 완성되었을 때가 아니었기에 그를 붙잡아 준 테티스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하여 그는 완전히 신으로서 상장한 이후로 테티스에게 직접 만든 장신구 등을 선물해 주며 은혜를 갚아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때에 이르렀을 때부터는, 그저 호의적인 관계로 꾸준히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것은 청년이 그 테티스와 몹시 닮은 얼굴을 가져서였다.

물론 닮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테티스의 첫 자식으로, 아득한 시간을 거쳐 기어코 다시 그녀가 자신의 자식으로 품은 이 시대의 몇 없는 반신이기 때문이었다.

헤파이토스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화를 이었다.

“네가 그러는 걸 보니 요즘도 기억에는 별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구나, 아킬레우스.”

젊은 반신, 아킬레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

섬세한 눈매 끝에 매달린 수심이 깊었다. 헤파이토스는 또다시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그러게 왜 레테의 강물을 안 마셔서.’

그건 언제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는 의문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아킬레우스 본인조차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아득한 시간을 넘어 다시 태어난 아킬레우스를 테티스는 정성껏 길렀다. 그러나 아이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하나를 멀쩡하게 어른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라며 합리화할 수도 없었다.

어느 때는 멀쩡하다가, 또 어느 때는 영혼이라고는 없는 텅 빈 인형 같다가, 어린아이면서도 갑작스레 어른처럼 말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기원후에 태어난 아이는 알 수 없는 지식을 이야기하고…….

부모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유를 알 수 없었겠지만, 테티스는 신이었기에 기어코 자신의 아들이 이상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어릴 때는 횡설수설했으나, 조금씩 더 자랄수록 내뱉는 말들이 논리를 찾아간 덕분이기도 했다.

모든 죽은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망각의 축복을 얻지 못한 것처럼, 아킬레우스는 그의 지난 삶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파이토스가 침묵하자, 이번에는 아킬레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모든 건 전부 떠오릅니다. 그저 하나만…….”

“어째서 레테의 강물을 마시지 않았는지?”

“예, 그런 행동을 왜 했는지.”

아킬레우스는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릴 적에는 인지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떠오르는 기억들을 수습하느라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자아가 확립되고 전생과 현생을 완전히 구분하게 되며 아킬레우스는 겉으로나마 그럭저럭 멀쩡한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남들이 보기에 성격은 나빠 보였겠지만,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헤파이토스도 그렇게 되기까지 나름대로 도움을 주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단단하고 침착한 성격이었던 그가, 불안정한 자식이 중심을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테티스가 종종 아킬레우스를 헤파이토스에게 맡겨 놓고는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그들은 신과 반신 사이면서도 드물게 제법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실 헤파이토스의 입장에서 아킬레우스는 한때 양어머니처럼 여겼던 테티스의 아들이니만큼, 이제는 그를 어린 의동생 정도로 생각하게 된 채였다. 헤파이토스는 아킬레우스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마음을 좀 여유롭게 가져 보거라.”

“그게 안 됩니다.”

아킬레우스는 쓰게 웃었다.

겉으로 멀쩡한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건, 사실 속은 멀쩡하지 않다는 뜻과도 같았다. 사실이 그러했다. 모든 기억을 정리하고 난 아킬레우스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건 상실감과도 비슷했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 상실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실은 지금도 아킬레우스의 등 뒤를 내내 덮어 오고 있었다. 그는 아까 전 했던 말을 한숨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가 상실감의 근원일 것이다. 하지만 짐작이라도 가능한 건 거기까지다.

그런 행동을 하게끔 이끈 무언가가 분명 존재할 텐데, 그것만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듯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들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껏 잠들었다 한들,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송곳 같은 무언가에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게 되는 탓이다.

어쩌면 악몽 그 자체였으나 원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반드시 찾아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어 버린 아킬레우스를 보던 헤파이토스가 침묵을 끊어 내며 입을 열었다.

“됐으니 더 쉬어라. 잠이 안 오면 눈이라도 아까처럼 감고 있든가. 잠깐이라도 생각을 비워. 네가 반신이라도 불사는 아니야.”

“압니다.”

“아는 놈이 그러고 있어?”

아킬레우스는 더 대답하는 대신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삼천 년 전이었으면 반신이 감히 신에게 할 법한 태도가 아니었겠지만, 바뀌어 버린 세상이었으니 헤파이토스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 가운데 헤파이토스가 고쳐 낸 시계의 초침 소리가 희미하게 공간 안을 채웠다. 평화롭고 지루한 소리였다. 헤파이토스도, 아킬레우스도 그저 그렇게 흘러갈 새벽이라고 생각했다.

……뜬금없는 방문자가 공방의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은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그건 지금 같은 시간에 들릴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천천히 눈을 뜬 아킬레우스가 눈가를 좁히고, 헤파이토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문이 있을 방향을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찾아올 인간은 없는데…….”

작게 중얼거린 헤파이토스는 다음 순간 문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확실히 찾아올 ‘인간’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든 예상외의 방문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표정을 굳힌 그는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바로 앉으라고 눈짓한 뒤, 손수 일어나 작은 공방을 가로질러 문 앞으로 향했다.

닫혀 있던 문을 직접 열고 헤파이토스가 바깥에 선 이를 마주했다.

상대는 달빛 아래서 은색으로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였다. 헤파이토스를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현기를 머금고 온화하게 빛났다. 고상하고 아름다우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 얼굴을, 잠깐의 시간을 들여 알아본 헤파이토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나 누구신지는 선명히 기억나는군요, 크로노스 님.”

그 말에,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어딘지 즐거운 기색으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기억해 주어 고맙소, 헤파이토스.”

헤파이토스가 자연스레 옆으로 몸을 비켜 주었다. 오래된 신이 만든 그만의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서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기꺼이 안으로 발을 디디며, 크로노스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늦은 시간에 실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와 미안하오. 다만 지금 꼭 만나야 하는 이가 있어서.”

아까까지 공방 안에 있던 이는 헤파이토스와 아킬레우스 둘뿐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헤파이토스는 어렵지 않게 크로노스가 찾아온 이는 아킬레우스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작 그 정도뿐인 깨달음으로도, 그는 이 순간부터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문득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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