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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데스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크로노스에게 느릿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로노스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군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예,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둘 사이에 어떠한 문제도 없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실제로는 크로노스가 말없이 하데스의 영역을 일부 침범한 상황이었지만, 하데스는 조금도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근본적으로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게다가 하나뿐인 아내도 지상에서 지내고 있을 시기인지라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던 차였으므로, 굳이 크로노스와 대거리하며 날을 세우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물론 크로노스가 드러내 놓고 싸움을 걸듯 행동했다면 반응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금을 슬쩍 밟아 오는 것에 가까웠다. 심지어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자식이다. 하데스에게는 백부인 셈이었다.
이 지하에서만은 하데스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크로노스는 함부로 대해서 좋을 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유를 들어 보고 합당하다면 적당히 넘길 예정이었다.
하데스는 곧바로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바로 말씀해 주시지요.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런 하데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크로노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데 괜찮겠습니까?”
하데스는 순순히 답했다.
“예, 들어 보겠습니다.”
망설일 것 없이 크로노스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를 처음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데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합의를 거쳐야 할 문제가 더 있었기 때문에, 헤르메스와 나눴던 이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하데스는 주의 깊게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나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데스가 입을 열었다.
“……이해했습니다.”
크로노스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일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며 하데스는 쓰게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이었고, 사실 크로노스쯤 되는 신이 나서서 수습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하데스는 ‘시간’을 관리한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의 감상과는 별개로 크로노스에게는 이런 균열조차 섬세하게 다뤄야 할 중요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제대로 된 방향으로 흘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낭만적이기는 했다……. 아마도 페르세포네는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크로노스가 곧바로 이어서 물었다.
“그럼 남은 일도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으니 그리하지요.”
말 그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데스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몇몇 영혼들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새로운 무언가로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낙원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 어쩌면 이조차 이미 알고 계셨겠군요.”
“그렇습니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지요.”
“뭐, 되었습니다. 어쨌든 당신께서 시간을 거둬들인 그 영혼은 원래 기회를 주었을 자였으니, 바란 대로 해 주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이내 재차 확인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길 선택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굳이 다시 확인한 이유가 있는 답이었다. 하데스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엘리시온을 마다하다니, 별난 놈.”
혼잣말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에는 둘뿐이어서 크로노스에게까지 목소리가 들렸다. 크로노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약간 머쓱해진 하데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이 바라시는 건……. 그 영혼의 시간에 대한 전권.”
“그렇습니다.”
하데스는 크로노스에게 일회적으로나마 어디까지 허용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계산해 보았다.
“다시 인간으로 탄생하게 될 시기, 그리고 기억이면 충분합니까?”
그건 시간 속에 기억이 쌓여 가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크로노스는 밝아진 얼굴로 수긍했다.
“정확히 바라던 부분이었습니다.”
합의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그대로 크로노스를 보내는 대신, 약간의 염려를 담아 마지막으로 질문을 꺼냈다.
“허나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이 정도로 공을 들이는 영혼이지 않습니까. 이곳에 도착한 영혼들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쌓인 기억은 별것 아닌 듯 느껴지더라도 사실 무엇보다 강력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 이미 지나간 것들을 품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훗날 다시 잃었던 기억을 돌려주면 될 일.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계획에 동의했을 정도면 나름대로 진실한 마음이라는 것일 텐데, 그 정도면 떠오르는 게 없더라도 느껴지는 바가 있기 마련입니다.”
크로노스가 빙그레 웃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그에 대해 미리 알렸습니다. 당사자의 뜻이 지금과 달랐더라면, 하데스 님에게 기억까지 부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본인의 각오였으니 거기까지는 그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하데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말로 별난 놈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시길.”
대화의 끝이었다.
“감사합니다.”
크로노스는 만족하며 일어섰다. 사실 하데스를 찾아올 때부터 일이 잘될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이 된 것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다른 법이었다. 그는 아주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하 세계를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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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그들이 볼 수 없는 이면, 신들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삶이 지속되는 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이후부터 언제나 그래 왔듯 그들의 삶을 살아갔다. 전쟁이 이어지고, 그 끝에 마침내 하나의 도시가 멸망했으며, 승자들은 패자들을 노예로 삼고는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그들이 제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각자의 운명에 달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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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신들은 인간들의 전쟁이 끝난 뒤로는 할 일이 달리 없었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세상 속에서 그들은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내키는 일을 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지상을 지켜보았다. 정작 전쟁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지하에 머물던 하데스만 홀로 할 일이 늘어나 바빠졌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바쁜 가운데 하데스는 심지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손님마저 간혹 맞이해야 했다.
어떤 반신 한 명이 낙원으로 향하는 대신 인간으로 굳이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 반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들이라는 사실을 듣고 단번에 지하 세계로 달려온 테티스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부탁드립니다. 하데스 님, 자식에게 해 준 것 없는 어미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그…….”
계속해서 몰려오는 망자들 탓에 일이 끊이지 않던 차에,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는 여신이 방문하여 거두절미하고 애원부터 해 오자 하데스는 슬슬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애는 제 첫 자식입니다. 자식의 이야기를 남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으나 그조차 제 잘못이라 여겨지니 어찌 미련이 남지 않겠습니다. 그 애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랐다면 다시 한번만 더 제 태로 낳아 아껴 기르고 싶습니다.”
멍하니 미간을 문지르던 하데스가 물었다.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 달란 소리십니까?”
“예, 부디.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데스도 자식을 두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그리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먼 길을 달려와 몇 번 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리는 테티스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지금의 제 남편에게 영생을 주어 함께할 생각이었습니다. 비롯된 육체도 그대로일 테니, 다시 한번만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어 지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과는 별개로 테티스는 쉽게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락을 듣기 전까지 계속 하데스에게 매달려 부탁할 각오가 충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밀려드는 일 속에서 계속 테티스를 상대하고 있을 수도 없는 마당에, 하데스는 문득 모든 게 귀찮아지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예?”
“단 시기는 당신이 정할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어쩌면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시기를 정하게 될 존재인 크로노스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하데스와 크로노스 둘만의 합의로, 테티스와 같이 관계없는 자의 앞에서라면 하데스는 완전한 죽음의 지배자여야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원하시는 바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테티스는 한 조각의 망설임 없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기다리는 게 어찌 어렵겠습니까?”
원하는 바를 얻은 테티스는 후련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기다리는 것은 정말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변화가 생기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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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격변을 거듭했다.
인간들은 언제나 그래 왔듯 그들끼리 화합하고, 다투고, 나누고, 빼앗으며 그들만의 세상을 살아갔다. 그런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신들의 영광이 가장 빛나던 시기의 신전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으며, 사제와 신도 역시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춰 갔다.
하지만 그토록 바뀐 세상 속에서도 신들은 조용히 불멸의 삶을 이어 갔다.
그렇게, 삼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