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13 시간의 원
***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다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존재였다. 불사의 신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압도적인 무위는 물론이고, 매번 전장에서 활약하면서도 언제나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무의식적으로 확고한 신뢰를 품게 했다.
스스로 의도치 않았더라도, 아킬레우스는 연합군 소속 병사들의 믿음이자 또한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충격이 컸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거의 확정적이던 연합군의 승리마저 아킬레우스의 죽음으로 불확실해졌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연합군은 다 이겼던 전장의 흐름을 여기서 빼앗길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킬레우스라는 사람은, 그의 부관과는 달리 많은 사람과 사교적으로 우정을 나누던 사람이 아니었다.
창창한 미래를 가졌던 젊은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은연중 그 죽음에 대한 의혹마저 제기될 정도였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도중에도 소리 죽여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저렇게 상처 하나 없이 죽는 게 말이 되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장례식에서 처음 본 장군이 속삭였다. 그 말대로였다. 굳게 눈을 감은 시신은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곁에 있던 동료가 조용히 핀잔을 주었다.
“목소리를 좀 낮추는 게 좋겠네.”
“하지만 자네는 그리 생각하지 않나? 심지어 부관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있었던 전투에서 이렇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리 작정하고 독이라도 먹은 게 아니고서야…….”
“조용히 하라니까!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말하지 않는 것뿐이네. 안 그래도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병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흘러 나갈 여지조차 없애는 게 옳아.”
“……내가 생각이 짧았군.”
“그래. 사실이 어쨌든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것이고, 지금은 장례식 중이니 그에 태도를 맞춰야지.”
그렇게 겉으로나마 정중하게 치러진 장례식이 끝났다.
전장의 일상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받았던 충격의 크기에 비하면 회복도 망각도 오히려 빠른 축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의 친인들도 그런 흐름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의 상황은 급박했고, 누군가 죽었다 해서 다음 날이 밝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간들의 삶은 대체로 이런 법이었다.
***
……그러나 그 이면, 인간들이 들여다볼 수 없는 어떤 영역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일의 시작은 젊은 반신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 그날의 밤부터였다.
아킬레우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과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 준 후, 그의 막사를 떠난 크로노스가 곧바로 찾아간 이는 다름 아닌 포세이돈이었다. 그가 아킬레우스와 맺었던 약속의 내용인 수호를 거두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주 보고 앉아 꺼낸 본론에 포세이돈은 아주 뜻밖이라는 어조로 되물었다.
“수호를 거두라고 말하셨습니까?”
“예. 물론 그리하셔도 포세이돈 님에게는 어떠한 문제조차 없을 겁니다. 아킬레우스가 먼저 바란 일이니 말입니다.”
포세이돈은 묘한 얼굴로 눈앞에 앉은 시간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연합군의 젊은 반신, 펠레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대가로 수호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언가’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기억나지 않는 연유는 눈앞에 앉은 이 시간의 신의 영역인 시간과 관련이 있는 듯했는데, 비어 있는 기억을 지금 당장 찾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영역을 관장하는 신이 안 된다는데 억지를 쓸 수는 없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약속은 약속이어서 그는 오늘 위기에 처한 아킬레우스를 기꺼이 구해 내야 했다. 대단히 어려운 일까지는 아니었으나, 솔직히 번거로워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마당에 부탁을 들어준 당사자가 대가를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확실합니까? 그 녀석이 바란 게.”
그는 조금 기막힌 기분으로 물었다. 필멸자가 당장 목숨을 한번 구명 받아 놓고서 내릴 만한 결정은 아닌 탓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신은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요.”
“음.”
포세이돈은 짧게 침음했다. 일이 이렇게 되면, 그로서는 아주 손쉽게 귀찮은 일을 덜어 내는 셈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먼저 바란 일인 이상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어딜 봐도 나쁠 건 없었다.
‘내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지.’
생각을 정리한 지중해의 지배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 그러면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인사를 들을 일은 아니니 되었습니다.”
그 말에 크로노스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저는 할 일이 많아 서둘러야 하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혹시 할 일이 끝나면 내 기억도 원래대로 돌아옵니까?”
“아, 그렇습니다.”
크로노스는 의미심장하게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덧붙였다.
“……그러니 부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시길.”
대화를 끝내고 크로노스는 유유히 포세이돈의 거처에서 돌아 나왔다.
그리고 밝아 온 아침을 지나, 한낮이 되었을 때였다. 크로노스는 이제 어느 누구의 수호도 두르고 있지 않아,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의 아킬레우스를…….
……친히 거두어 죽였다.
***
크로노스는 전쟁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한가롭게 전장을 오시했다.
‘이제 찾아올 때가 되었을 텐데.’
인간들의 삶과 죽음이 찰나를 두고 오가는 곳은, 시간의 신인 그와는 이제까지 별다른 연관성이 없던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 시간의 균열을 보수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 영역에 한 발을 걸쳐야 했다.
그는 자신이 거두어 죽인 젊은 반신을 떠올렸다.
사실 죽였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사자와의 은밀한 합의를 통해 그의 영혼이 가진 시간만을 걷어 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삶과 죽음이 혼잡하게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불과 몇 분 전, 크로노스는 아킬레우스의 영혼이 가진 모든 시간을 거두어 소유했다. 그 일련의 행위를 통해 크로노스는 이제까지 그의 영역이 아니었던 ‘죽음’에 교묘하게 한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원래 이런 일에 엮여야 할 신은 죽음을 관장하는 타나토스, 망자를 하데스의 앞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망자들의 땅을 다스리는 하데스까지 총 셋뿐이다.
이번은 예정된 죽음이 아니었으니 타나토스는 그리 신경 쓰지 않겠지만, 헤르메스나 하데스의 입장에서는 크로노스가 지금 그들의 영역을 가르는 금을 미세하게 밟으며 아킬레우스를 인질 삼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였다.
“크로노스 님.”
기다리던 이의 등장이었다. 크로노스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헤르메스, 오랜만이네.”
웃고 있는 그와는 달리 크로노스를 찾아온 헤르메스는 난처한 동시에 약간은 화난 얼굴이었다.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예, 오랜만입니다. 다만 다른 때였다면 마음 편히 인사하겠으나, 이번은 조금 곤란하군요. 왜 이러신 겁니까?”
말을 이으며 그는 전장의 어느 한곳을 곁눈질했다. 거기에는 영혼이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아킬레우스의 육체, 다시 말하면 시체나 다름없어진 그것을 전차로 옮기는 아이아스가 있었다.
“이게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잘 알고 있소.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사과하지. 내가 관장하는 것에 생겨난 균열을 어떻게든 메우려다 보니 벌어진 일인데, 아킬레우스와는 합의를 거쳤으나 그대와 지하 세계의 지배자께는 미처 말을 하지 못했군.”
무어라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길게 흘러나온 사정 설명에 헤르메스가 멈칫했다. 그 틈을 타 크로노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미 일을 저질러 놓고 이렇게 말하려니 면구스러우나,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소?”
“……그, 무엇입니까?”
“그대의 역할은 죽은 이를 지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지. 그러나 이번에 내가 거두어들인 이 시간의 주인은 내게 묶여 그대를 따라갈 수 없으니, 내가 이번만 그대의 역할을 대신하였으면 하오.”
헤르메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탁 자체는 그의 영역을 얼핏 침범하는 무례에 가까웠으나, 크로노스는 위계로 따졌을 때 그보다 훨씬 윗대였다. 가이아(제우스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의 증조모)의 자식이었으니 사실상 아득한 태초의 신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게다가 부탁의 내용과는 별개로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으므로 계속해서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그는 속으로 짧게 투덜거렸다. 지금처럼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는 죽는 이들이 많다. 그건 다시 말해 헤르메스의 할 일도 많아진다는 뜻과 같았다. 당장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할 일은 계속해서 쌓여 가고만 있다.
결국 헤르메스는 더 대화하는 대신 한숨과 함께 크로노스의 부탁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다만 말씀대로 이번만입니다. 그 하나의 영혼만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데스 숙부님과는 또 따로 이야기하셔야 하는 건 아시지요?”
“물론이오.”
크로노스의 답을 들은 헤르메스는 고개를 몇 번 털고는 허공으로 한 뼘쯤 날아올랐다.
“예, 그러면 저도 그냥 좋게 생각하겠습니다. 마침 일이 바쁘니 크로노스 님께서 제 일을 조금 덜어 주시는 셈이라 치지요.”
“너그럽게 생각해 주어 감사하오.”
“별말씀을.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인사를 끝으로 전령의 신은 조금 더 높이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크로노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는 망자에게 향했을 것이다. 가만히 웃은 크로노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지난밤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번거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자신 역시 이 일을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크로노스는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잘 쌓아 가고 있다.’
그러니 이제 헤르메스와 이야기한 대로, 지하 세계의 왕을 보러 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