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로노스와 아킬레우스가 다시 마주한 건 그날 저녁, 아킬레우스의 막사 안에서였다.
막사 주변은 고요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지휘관이, 핏발 선 눈으로 그 누구도 근처에 와서는 안 될 것이라 엄포를 놓고 들어갔으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어둑한 막사 안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반신의 시선을 받으며, 크로노스는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말해 주기 전에 하나만 더 묻겠다.”
아킬레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초조한 심정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그렇다고 크로노스에게 성질대로 화를 낼 수도 없던 탓이었다.
“……그러시지요.”
“아킬레우스.”
크로노스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너는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난 유일무이한 존재란다. 지금까지 너와 같은 이는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지금 너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하다.”
아킬레우스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 눈 속에는 그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아득한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과거는 물론이고, 예언의 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할 미래를 손안에 놓고 들여다보는 이의 눈동자였다.
“앞으로 이어질 네 삶은 명예로 빛날 것이다. 네 친인들은 너를 더없이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세인들은 한목소리로 너를 칭송하겠지.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버려도……. 정녕 후회하지 않겠느냐?”
방금까지만 해도 초조함에 어쩔 줄 몰랐던 젊은 반신은 문득 침착해졌다. 지금 이 물음에는 반드시 제대로 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버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선택한 겁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건, 그 운명이란 걸 제가 바란 적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삶의 시간들을 되짚는 눈동자가 잠시 짙어졌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고, 시간의 신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습니다. 명예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의미도 없는 칭송 같은 것은 제 삶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만……. 제가 바라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바라던 것은 언어로 정제해 털어놓자 더욱 분명해졌다.
“예, 그러니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오직 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이후였다.
이 땅에 남은 인연이야 있지만, 그들이 아킬레우스를 붙잡아 둘 만큼의 무게를 지니지는 못했다. 냉정하다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가장 많이 그를 이해해 주던,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믿고 따라 주던 이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사라졌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주변에는 언제나 귀하고 좋은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정말로 아꼈던 것은 거의 없었다. 몇 없던 것을 잃어버렸으니 남은 삶조차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인 것이다.
이미 죽은 이가 맞이한 평화를 깰 수는 없을지언정,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을 다시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여기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모든 답을 경청한 시간의 신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는 금세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 내고는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특별한 이유는 네 운명의 실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까지의 생에 걸쳐 바라던 대로, 너는 네 미래를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자격을 얻은 셈이지. 그리고 방금의 답으로……. 너는 선택했다.”
크로노스는 몸을 조금 숙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젊은 반신에게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끝났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선택을 철회하지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시간의 신은 만족하며 떠났다. 그렇게 이 시대에서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이의 운명이 다시 조립되었음에도,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었다.
***
아킬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오늘따라 그들의 지휘관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관에게, 심지어 그들의 고향인 프티아의 다음 왕이 될 왕자에게 할 만한 생각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오늘 그의 태도는 다소 기묘했다. 그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홀가분해 보였고, 어쩌면 들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 보일 만한 기색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불과 얼마 전 가장 가까이 두고 친하게 지내던 부관을 잃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살벌한 분노를 전쟁터에서 풀어내며 날뛰었던 사람이, 고작 하룻밤 만에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태도를 보이니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병사들은 아킬레우스를 매일 보는 것은 아닌 만큼 그 정도의 감상에서 그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아킬레우스를 봐 오던 연합군의 수뇌부를 구성한 장군들은 갑작스레 태도가 돌변한 아킬레우스가 이상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른 아침, 형식상의 회의가 치러지는 내내 장군들은 아킬레우스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뒤 아킬레우스가 막사를 나가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가멤논이었다.
“……오늘은 저자가 왜 멀쩡해 보이지?”
오디세우스가 애써 헛기침하며 그를 제지했다.
“흠, 흠. 그게 동료에게 할 말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나?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말끝을 흐렸으나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친놈처럼 굴던 게 왜 갑자기 정상인 행세를 하고 다니냐는 것이다. 아가멤논을 제지했던 오디세우스도 오늘따라 아킬레우스가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대로 침묵하고 말았다. 그 대신 아이아스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따라가서 상태라도 좀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러다 갑자기 돌변해서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큰일인데.”
“자네는 사촌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나?”
“사촌이니까 하는 소립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럼 자네가 상태를 보고 오면 되겠군.”
“예?”
“사촌이니까.”
“……예?”
그렇게 말 한번 잘못 꺼낸 죄로 아이아스는 반쯤 떠밀리듯 아킬레우스의 상태를 살피는 중임을 맡게 되고 말았다. 다만 아무래도 섬세하지 못한 아이아스를 혼자만 내보내기는 걱정스러웠던 탓에, 평소 가까이 지낸 죄로 가만히 있던 오디세우스가 아이아스와 함께했다.
아킬레우스가 막사를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둘은 잠깐 달리는 것으로 저 멀리 앞서가던 아킬레우스를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들이 쫓아온 것을 알아차린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더니, 곁에 있던 제 부관을 먼저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평온한 어조로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쫓아왔습니까?”
“아, 그게…….”
오디세우스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아주 멀쩡했다.
‘……어제까지 못 볼 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어떻게 납득은 됐는데…….’
지금처럼 말끔한 얼굴로 예의마저 똑바로 지키는 꼴을 보니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옆에 선 아이아스도 마찬가지의 심정인 것 같았다. 그가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오디세우스는 결국 한숨을 한번 내뱉은 뒤, 대놓고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 괜찮나? 어제까지만 해도 꽤 심사가 복잡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갑자기 모든 게 정리된 것처럼 굴다니. 다들 걱정하고 있다네.”
그 말에 아킬레우스는 스치듯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아이아스는 무심코 움찔했다. 무심한 눈길로 그런 제 사촌을 힐끗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싶더니, 이내 느릿하게 대답했다.
“……뭐, 이제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쉽게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지만 아킬레우스는 두 번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말없이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빤히 응시하더니,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인데…….”
“응?”
“고마웠습니다. 둘 다.”
뜻밖의 말에 아이아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그, 갑자기?”
그러나 단순히 당황할 뿐인 아이아스와 달리, 오디세우스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사람치고 머릿속으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있을 리는 없다는 판단이 선 탓이었다.
“아킬레우스, 자네…….”
“예.”
“……왜 그런 소리를 하나?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그제야 아이아스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복잡한 시선을 받아 내며 아킬레우스는 건조하게 웃었다.
“말했잖습니까, 그냥 생각이 났다고.”
말을 맺은 그는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는 어째서인지 차마 그를 쫓아가 더 붙잡지 못하고, 선 자리에 멈춰서 멀어지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딘가 지쳐 있는 듯, 그러나 동시에 홀가분해 보이는 것도 같은 묘한 뒷모습이다.
별다르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득 느껴지는 불길함을 도저히 부정하지 못했다.
***
부정하지 못한 불길함은 몇 시간 뒤 현실이 되었다.
아이아스는 다급히 전차를 몰아 진영으로 귀환했다.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멈춘 전차에서 비틀거리며 내린 그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상을 입어 후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몇몇 장군들이 그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고, 남아 있던 병사들은 당황하며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살펴본 아이아스는 뜻밖에도 눈에 띄는 상처를 입지는 않은 상태였다. 병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아이아스 님, 왜 그러십니까?”
“……내, 내 전차에…….”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전차라는 단어는 근처에 있던 모두가 알아들었기에, 병사들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아이아스의 전차를 확인했다.
그리고 전차에 무엇이 실렸는지를 확인한 이들은 곧 아이아스와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전차의 안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모습에 장군들마저 가까이 다가왔다. 뒤이어 전차 안을 들여다본 그들의 반응도 앞선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침묵의 끝에, 누군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킬레우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차에 실린 것은 아킬레우스의 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