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30)화 (130/149)

***

다음 날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검을 들고서는 사실 이성적이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래야 타인의 검이 자신에게 어떻게 휘둘러지는지 똑바로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바르게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장에서 흥분하는 것은 곧 목숨과 직결되는 법이었다. 당장 파트로클로스가 그렇게 죽었다.

잘 알고 있음에도, 최근 들어서 아킬레우스는 전장에서 그리 냉정하게 굴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는 일부러 본능적인 형태로 몸을 썼다. 그렇게 해야 머릿속이 그나마 덜 복잡한 탓이다.

그러니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직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킬레우스로서는 기억나는 바가 없으나, 그는 지금 더없이 분노한 낯을 한 강의 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고 경고했건만, 기어코 내 강을 피로 물들이다니! 전쟁터이기에 참아 주었으나 정도가 심하지 않으냐! 이제는 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게 되어 버렸구나!”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고, 그보다 조금 더 느리게 상대의 말뜻이 이해됐다.

그러고 보면 멀지 않은 곳에는 흐르는 강물이 있었다. 그 강물의 색이 붉게 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 경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강의 주인이라면 화날 법한 일이기는 했다. 아킬레우스는 상황을 납득했다. 그러나 직전까지만 해도 살기를 담아 검을 쓴 탓에 본의는 아니나 기세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고, 강의 신은 그것을 눈앞의 반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자신에게조차 위협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기고 말았다.

“인상을 써? 이런 오만한! 한낱 반신이 능력에 취해 정도를 모르는구나!”

분노한 강의 신이 붉게 물든 자신의 강물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그렇게는 못 하네.”

누군가 그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 냈다.

“무, 무슨…….”

강의 신은 놀란 눈으로 곁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영역이 강에 한정되어 그 권위가 낮은 신이라지만, 그래도 강의 신은 엄연히 신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권역인 강의 물만은 완전히 다룰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신들은 자신의 권역이 아닌 것에는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지만, 강의 신들은 단 한 존재의 앞에서만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포세이돈 님?”

세상의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강의 신을 마주 보는 기이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지중해의 주인이 거기에 있었다.

“유감이지만 내가 있는 한 저 젊은 반신을 감히 해할 수는 없네.”

“……큭.”

차마 이유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바다가 아니면 강은 흘러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강의 신들은 자신의 권역인 강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자나 다름없으나, 포세이돈은 그 위의 또 다른 절대자였다.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강의 신은 결국 그대로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그가 떠나고, 포세이돈은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아킬레우스는 포세이돈이 기껏 자신을 구해 주는 와중에도 내내 말이 없었다. 다만 상황이 흘러가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포세이돈을 응시하는 시선은 관찰에 가까워 보였다. 지금 자신을 돕는 그 내심을 파악하려는 듯 끈질기게 이어지는 눈길이었다.

그런 아킬레우스에게 포세이돈이 몇 걸음 다가왔다. 직전까지 어지간히도 날뛰었는지 여기저기 피에 젖은 꼴이 가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응시하던 포세이돈은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는 의문에 가득 찬 낯빛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예.”

“내가 너를 구한 것은 네게 약속한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뒤로 이어질 말이 결코 바라던 방향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느껴진 탓이다. 그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상하군.”

포세이돈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왜 네게 수호를 약속했지?”

들은 순간 둔중한 충격이 내려앉는 물음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바라던 방향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킬레우스.”

그의 행동이 어떤 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신의 목소리가 재촉을 담고 무정하게 건네져 왔다.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포세이돈을 바라보았다.

“정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목소리에 담긴 알 수 없는 절박함에 포세이돈조차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포세이돈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에 의문을 가져야 할 건 본인이었다.

“네게 약속을 건넨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는 전혀 모르겠구나.”

그건 아킬레우스에게는 완벽하게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과 다름없는 답이었다. 그의 부관들뿐만 아니라, 포세이돈조차 해인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듯, 애초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것처럼, 지금의 이 땅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어째서.”

“뭐?”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약속할 만큼 아꼈으면서 왜…….”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을 잇던 순간, 아킬레우스는 한발 늦게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가 당황하며 무심코 손을 목으로 가져간 찰나였다.

기척 없이 누군가 그의 등 뒤로 접근해, 어깨를 가만히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포세이돈 님.”

반사적으로 접근을 뿌리치려던 아킬레우스는 그 목소리가 기억 속에 있어 익숙함을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서 있던 포세이돈은 아킬레우스의 어깨 너머에 선 자를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는 시간의 신이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크로노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앞으로 나서더니 온화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침 이상한 점을 알아채신 듯하니 제가 잘 맞춰 왔군요. 포세이돈 님께서 가진 의문을 이해합니다.”

“허면?”

“예, 이 일에 제가 엮였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끊어져 그리되었는데, 지금 그것을 고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지요.”

“……고쳐야 하는 일이로군요.”

“그러니 양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포세이돈은 미간을 좁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인 자신의 기억에 문제를 줄 만한 일이라니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의 신이 직접 그의 앞으로 찾아와, 고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 부탁해 오는 것에다 대고 화를 내기는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군요.”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꺼림칙하다 한들 당장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무엇보다 포세이돈은 지금 더 바쁜 일이 있었다. 인간들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으나, 며칠 전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인 이후부터는 신들 사이에서도 기류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포세이돈에게 지금처럼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한들 결국 시간은 크로노스의 것이고, 끊어진 흐름을 고치는 것도 크로노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크로노스에게 어떠한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물러나는 게 나을 듯했다.

“빠르게 해결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물론이지요.”

답을 들은 포세이돈은 그 이상의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떴다.

강변에는 그렇게 크로노스와 아킬레우스, 둘만이 남았다.

전장에 속해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변만은 고요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대화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크로노스는 몸을 돌려 아킬레우스를 마주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모습이 선명히 기억나는데, 지금은 온통 피에 젖어 있는 꼴을 보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 같은 것은 마주해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직감이다. 아킬레우스는 지금 당장, 눈앞의 이 신을 붙잡아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크로노스 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알고 있군요.”

“아킬레우스.”

“말해 주십시오. 왜, 어째서…….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크로노스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않으냐. 지금 이 시대는 그 아이가 태어나지조차 않은 때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 이를 기억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지.”

“……그럼 저는? 저와 크로노스 님께서는 왜 기억하고 있습니까?”

크로노스가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 질문을 듣고 싶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시간의 신이고, 너는 이 일에 가장 긴밀히 엮인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앞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그리고 조금 목소리를 낮춰 나직하게 말했다.

“모든 일은 상황을 만든 자가 끝까지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 아킬레우스, 어려운 질문을 하나 하겠다.”

시간의 신과 반신의 시선이 똑바로 맞닿았다.

“지금의 네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그 아이를 만나러 갈 수 있다면……. 가겠느냐?”

그 말을 들은 순간, 내내 흐리던 반신의 눈 위로 한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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