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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9)화 (129/149)

chap.12 선택

트로이의 총사령관 헥토르가 죽었다.

그리고 그를 죽인 자는 아킬레우스였다.

물론 헥토르가 죽었다 해서 트로이가 곧바로 항복한 것도 아니고, 성벽이 당장 열린 것도 아니다. 프리아모스 왕에게 아들이 헥토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형이 죽었으니 그 동생이 대신 총사령관이 되어 전투를 이어 가고 있다. 물론 헥토르에 비할 바는 못 되어, 전황은 이전보다 연합군에 훨씬 유리하게 돌아갔다.

덕분에 연합군 소속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곧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젖었다. 그러나 그것은 윗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단편적인 감상으로, 연합군 수뇌부들의 감상은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를 죽인 당사자인, 그 아킬레우스가 지난 며칠간 보인 행적이 도무지 정상적이지가 않았던 탓이다.

연합군 수뇌부들 가운데 한 명, 비록 약소국의 왕이나 특유의 지략과 지혜로 많은 이들의 존중을 받는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막사 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으로 오늘 전장에서 스치듯 보았던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미친 건가?’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그 이상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원래도 누구보다 무위가 뛰어난 자이기는 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오디세우스가 보았던 아킬레우스는 평소 알던 이와 결이 달랐다. 고작 열다섯이던 소년 시절부터 전장에서 눈에 띄게 활약하던 사람이기는 했으나, 오늘을 비롯해 지난 며칠간 그가 전장에서 하던 일은 단순히 활약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화풀이?’

찰나에 떠올린 단어에 오디세우스는 쓰게 웃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실 대충 보면 화풀이로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얼마 전 그의 부관을 잃었고 장례식마저 치렀다. 단순한 부관이 아니라, 오랜 시절 알아 온 친우이기도 했으니 그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보기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화풀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킬레우스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보다 더 이전의 상황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전선에서 이탈했던 아킬레우스가 다시 연합군으로 되돌아와 참전했을 때부터였다. 물론 아킬레우스는 연합군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는 연합군 소속으로 헥토르와 결투했고 그를 죽였다.

‘그리고 죽인 뒤에는 시체도 멀쩡하게 되돌려 줬었지.’

아킬레우스의 성격을 익히 아는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그가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꽤 놀랐다. 물론 죽음에 대한 복수를 죽음으로 갚아 준 이상 시체는 멀쩡하게 돌려주는 게 상식적으로 바른 행동이지만, 주체가 ‘아끼는 부관을 잃은 아킬레우스’이다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는 것은 잠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킬레우스가 저런 선택을 내릴 정도라면, 분명 모든 슬픔은 갈무리한 지 오래고 진작에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상태라고 모두가 판단했다. 어쩌면 어려서 혈기 넘치던 시절 벌였던 언행들이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진작 어른이 된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문에 아가멤논은 다시금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자 했다. 이제는 그도 전리품 따위로 장난을 치며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정중한 태도로 실리를 챙길 때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서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의도하고 모욕하고자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반응이 있어야 사과를 할 텐데, 상대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낯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니 아가멤논도 화를 내기보다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 때도 반쯤은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것 같았고.’

장례식이 시작된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랬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아킬레우스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찾아오는 다른 모든 이들의 방문을 거부하고 그대로 하루 이틀 은둔했다. 오디세우스는 그가 그 시간 동안 제 막사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아니면 다시 전선을 이탈해 자신의 배로 돌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트로이 측에서도 헥토르의 장례식이 끝나고 전투가 재개되자, 그는 갑자기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오더니 다시 전선에 합류해 왔다.

뒤이어 미친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다들 눈치나 살피고 있겠지…….’

지난 시간의 회상을 끝내고 다시 현재 상황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침음하며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킬레우스가 빠진 직후부터 계속해서 밀리던 전선은 그가 합류하자마자 헥토르를 죽여 버리며 다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그가 전장에서 날뛰면 날뛸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또 언제 아킬레우스가 변덕을 부려 전선에서 이탈할지 몰랐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싸우는 걸 보면 살벌함마저 과해.’

오디세우스만 느끼는 감상이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이미 아킬레우스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적군에게 살벌한 것이지, 아군에게는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겁부터 먹는 태도가 결코 바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잘하는 일 같기도 했다.

오디세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됐다.’

혼자 떠올려 봐야 그로서는 아킬레우스 같은 이의 마음속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기껏 연합군에 도로 합류해 주었으니, 여차하면 비위나 좀 맞춰 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디세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간절히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으로부터 감히 벗어나 살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바라던 그것을 예기치 못하게 손안에 넣게 된 지금, 아킬레우스는 가능하다면 이걸 다시 내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우습지.’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지금처럼 혼자 있으면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른다. 진작 떠났어야 할 전장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분명 해인을 구하고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끝내면 전장에서 떠나 원래의 계획대로 프티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 주변에는 구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 봐도 지금이 이제껏 해 온 모든 일들의 결과라면, 결국은 공허해진다. 전장을 좋아한 적 없다 한들 몸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시의 괴로움이나마 잊기에 이것 말고는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이 몸으로는 죽을 일도 잘 없겠지.’

아킬레우스는 짧게 조소했다.

막사의 천 너머에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지휘관의 심정과는 별개로 그 아래의 부관들이나 병사들은 오히려 연이은 승전에 고양되어 있었다.

물론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도 끝났으니 눈앞의 현실로 다시 눈을 돌린 건 잘못된 게 아니다. 승전의 영광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애초에 파트로클로스를 제외하면, 아킬레우스가 전쟁터에서 떠나는 것조차 그리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쌓아 왔던 권위를 통한 설득으로 뜻을 관철해 냈긴 했으나, 결국 지휘관이 돌아와 영광스럽게 적의 총사령관을 물리친 지금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더 기꺼울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아킬레우스도 그들에게 별달리 깊은 이해를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이상해.’

그는 지난 며칠간의 포이닉스나 에우도로스가 보였던 태도를 새삼스러울 것 없이 되짚었다. 사실 매 순간 위화감을 느꼈으나, 기묘한 두려움 탓에 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이상한 태도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헥토르를 죽이고 돌아온 날에도, 파트로클로스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에도, 그리고 장례가 끝난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아무도……. 묻지 않지?’

해인의 부재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며칠간 두문불출하다 전장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렇다 한들 포이닉스나 에우도로스, 그리고 메네스티오스 같은 그의 다른 부관들과는 몇 번이나마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고 슬퍼할 뿐, 자리에 없는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마치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포이닉스도, 에우도로스도, 하다못해 메네스티오스도 해인과 서로의 이름을 알려 주고 몇 마디나마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이다. 해인의 부재에 대해서 궁금해할 만한 자격도, 이유도 있는 이들이었다.

사실 그 이상함을 인지한 순간 대놓고 그들에게 물어봐도 되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그게 누구냐는 말을 들으면.’

그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만으로도 최근 며칠간 느꼈던 두려움이 목뒤를 서늘하게 했다. 아킬레우스는 무심코 손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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