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 시간의 신이 꺼낸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낸 걸로도 모자라 지나칠 만큼 뜬금없는 내용이다.
해인은 분명 말을 귀로 들었음에도 그 뜻을 곧장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려 들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해인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반사적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보냈다. 해인은 그제야 다시 흠칫 정신을 차렸다.
“……잠시, 어째서……. 지금요? 제가 무엇을 했나요? 저는…….”
앞을 막아선 아킬레우스의 옆으로 몸을 틀어 돌아 나온 해인이 다급히 크로노스를 마주했다. 크로노스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낯으로 반신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에 해인이 자신도 모르게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분명 며칠 전 꿈에서 곧이라고 이야기했고, 심지어 지금 그들이 트로이의 앞에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갑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운명이자 없어진 미래이니 예언이라고 할 것도 없겠지. 둘 모두 알 자격이 있으니 알려 주마.”
크로노스는 손을 뻗어 해인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프리아모스에게 바로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야, 너를 만나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해 본 일이 없었더라면, 그가 타인의 고통에 과연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게 무슨…….”
“공감하지 못하는 자는 본인의 감정에만 더 깊이 빠져드는 법이지 않니. 특히 일신의 능력이 뛰어난 자는……. 더욱 그리되기 쉬운 법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고, 남들을 돌아보지 않게 되니 말이다.”
아킬레우스를 면전에 두고도 시간의 신은 욕처럼 들릴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 냈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를 찾지 못하면 너희 인간은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지. 트로이의 왕은 제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기는커녕, 전차에 매달려 성벽 주변을 끌려다니는 아들의 시체를 보아야 했을 터.”
그만 아연해진 해인은 크로노스를 멍하니 바라보다, 아킬레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킬레우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크로노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광경을 성벽 위에서 지켜본 헥토르의 누이는 마찬가지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를 찾지 못하고 몸을 던지게 된단다. 그 아이는 온 힘을 다해 펠레우스의 아들을 유혹하여…….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구나. 그러지 말거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해냈을 테니까.”
크로노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아무튼 그리하여 너희 모두 잘 알고 있을 팀블레의 한 신전으로 불러냈을 것이고, 그곳에는 미리 언질을 받은 트로이의 파리스가 숨어 있었겠지.”
시간의 신의 눈동자는 어딘가 아득했다. 해인도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듣기 전까지 몰랐던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길 하나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낱낱이 토해 낼 수 있는 그 권위가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그리 뛰어난 무장은 아니지만 유일하게도 활만은 제법 잘 다루는 모양이구나. 먼 거리에서도 소리 없이 약점을 단번에 꿰뚫기에 그만한 무기는 없겠지……. 자, 이제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지 않으냐? 이것이 해인, 네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정해진 운명이었다. 이제는 없어진 미래이기도 하지.”
“정해져……. 있었다고요.”
“그래.”
“그럼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이유는요? 왜 원래의 운명대로 되지 않게 일을 비트셨어요?”
크로노스는 예상한 물음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으나, 그에 대한 답은 어째서인지 들려주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원망하느냐?”
“그건…….”
방금까지 거의 신나다시피 말을 이어 가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다시 의뭉스러운 태도로 돌아간 그가 해인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이란 놀랍지 않으냐. 네가 살던 시대에 이르러 내 힘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경외심을 품고 있단다. 형체도 없는 그것은 때로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들고, 때로는 몹시 성장시키지. 이제는 없어진 미래 속 헥토르의 누이가 그런 일을 하게 만든 것도, 그 미래가 없어진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니 말이다.”
“크로노스 님, 그런 것보다 저는…….”
“너는 존재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성장시켰단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바뀐 운명 속에서 영광과 함께 천수를 누리겠지.”
결국 바라는 대답은 하나도 못 들은 해인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일부러 질문을 막기 위해 하는 말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크로노스는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눈앞의 두 반신을 한 시야 안에 담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 해인, 이제 네가 더 해야 할 일은 없다. 내가 해결해야 할 것은 남았지만, 어쨌든 너로서는 네 연인의 삶에서 죽음을 지워 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일 것 같은데.”
“크로노스 님.”
“석양이 지기 전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눈 뜨게 될 거란다. 현대의 내가 너를 부르는 것이니 그걸로 균열도 완전히 채워지겠지.”
홀가분한 얼굴로 크로노스가 가볍게 말을 맺었다.
“이제 이 땅에서 너를 보는 것은 마지막이구나. 우리는 삼천 년 후의 미래에서 다시 볼 수 있겠지. 나는 마저 할 일을 할 테니, 후에 다시 보자꾸나.”
그걸로 끝이었다.
시간의 신은, 방문했을 때와 같이 다시 소리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결국 본인 할 말만 하고 가셨잖아.’
해인은 크로노스가 사라진 자리를 차마 헛웃음도 짓지 못한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인 입으로 사랑이 대단하지 않냐며 떠든 것치고는, 인간들의 그 감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인간의 작은 사정에는 무심한 고대의 신 같은 면모를 이렇게 엿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충격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이제 시간만은 확실해진 것이다.
‘저녁이 되기 전.’
그때까지만 볼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도저히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을 법한 얼굴이 아니었다.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듯싶다가도, 지금처럼 정도 이상의 충격에는 지극히 감정적으로 변하는 걸 알고 있기에 해인은 먼저 움직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고 보면 예언을 결국 피하기는 했어요. 그렇지 않아요?”
애써 가볍게 말을 꺼냈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그리 태연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돌아온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었어.”
예언을 마주해 그로부터 당당히 벗어나고자 십 년을 달려왔다. 어쩌면 그 십 년간 바랐던 것이 이뤄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무너지듯 해인을 끌어안았다.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뒤로 몇 걸음 움직인 해인은 무릎 뒤로 걸리는 무언가에 휘청했다. 그대로 쓰러지는 듯했으나 다행히 뒤에 있던 것은 침대였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침대 위로 구르듯 넘어간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몸 아래 갇히다시피 했다. 쇄골 위로 이마를 기대 오는 아킬레우스의 체온이 언제나 그랬듯 뜨거워서, 문득 불을 끌어안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만들겠다고는 믿었더라도, 그게 이런 형태일 거라고는…….”
바라던 대로 죽음을 이야기하던 예언에서 벗어나 명예와 함께 천수를 누릴 거란 이야기를 들은 영웅의 목소리라 말하기에는, 그것은 절망에 더 가까이 있었다. 해인은 그런 그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 눈만 몇 번 깜빡였다.
아까 전 성벽에서, 그리고 사실은 더 이전부터, 자신의 귀환과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연관이 있기는 했구나.’
다만 생각했던 것과 결이 달랐을 뿐이다. 크로노스는 그래서 대체 뭘 위해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바꾸려 든 것일지 여전히 알 길이 없었지만, 해인은 아주 약간이나마 안도했다.
“그렇더라도……. 잘 살아요.”
“해인.”
이미 정리한 것 같은 말투에 아킬레우스가 탄식처럼 이름을 불렀다. 해인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라고 해서 혼란스럽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끝맺음도 아니고, 이대로라면 사랑했던 사람은 그저 오래된 신화 속 인물로만 되돌아갈 상황이 기꺼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낙관적인 믿음 정도는 가질 수 있게 됐어.’
테베에 머물 때 헤어졌던 칼리에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 칼리에를 만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해인은 칼리에가 이제는 가족과 함께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믿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마음이 따라 줄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상황만은 엇비슷했다.
“바라지 않았어도 이미 얻은 거라면 차라리 완전하게 누려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어?”
고개를 든 아킬레우스가 젖은 눈으로 해인을 노려보았다. 멈칫한 해인은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그 뺨을 감쌌다.
“나는…….”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그대가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대를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어. 항상 그랬지. 정작 그대는……. 언제나 떠나야 하는 걸 잊지 않고 지내서, 지금도…….”
말끝을 흐리며 아킬레우스는 눈을 내리떴다. 해인은 뺨을 감싼 손으로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손바닥 위로 고개를 기울여 기대 오며, 아킬레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는 이미 이전부터 계속 지금 같은 상황을 두려워했었지. 그걸 완전히 이해 못 했던 나는 이제야 깨달은 거고.”
“……그래서 후회하나요?”
“아니.”
아킬레우스가 헛웃음 지으며 단번에 답하고는, 잠시 후 덧붙였다.
“……화내서 미안해.”
“사과 안 해도 돼요.”
해인이 생각하기에도 화낼 만했다. 되짚어 보니 반쯤 강요나 다름없던 것 같다.
“나는 그냥, 곁에 있을 수 없어도 행복했으면 해서 한 말이었어요. 남은 삶은 아마도 길 텐데, 그 시간 동안 내내 슬픔에 잠겨 있는 걸 바랄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럼 그대는? 돌아가서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수 있나?”
“그건.”
“나라고 해서 그대가 잘 지내기를 바라지 않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정말 돌아가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어? 곁에 있을 수 없어도 행복했으면 한다고 했지. 그럼 그대에게 있어서는 내가 차지한 부분이 그 정도로 협소했나?”
해인은 그제야 어떠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적어도 본인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킬레우스가 비할 바 없이 훨씬 더 뛰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많은 생각들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아킬레우스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해도 이제 돌릴 수는 없겠지.”
인정하기 싫은 체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막사 주변은 소란스러웠지만, 막사 안으로 감히 들어오려는 이들은 없었기에 안쪽 공간만큼은 바깥과 한 겹 차단되어 기묘하게 고요했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크로노스의 말대로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불현듯 손끝이 흐릿해진 것을 인지한 해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때가 되었나 봐요.”
오랫동안 침묵한 탓에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든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눈길을 주더니,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해인을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겨 안았다. 해인은 어깨 위로 쏟아진 금색 머리카락을 헤집듯 쓰다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킬레우스, 인사해 주세요.”
“……난 못 해.”
해인은 억지로 아킬레우스를 밀어내고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던 탓이다. 마주 본 얼굴은 언젠가 그랬듯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해인은 애써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제대로 되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표정에 그 이상 신경을 쓰는 대신,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해요.”
“…….”
“이 말을 분명하게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걸 방금 깨달았어요.”
“해인.”
“그러니 아마 돌아가서도 아무렇지 않게는 못 지내겠죠. 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
“……나도 그렇겠지. 나는 내 모든 걸 그대에게 주기로 했으니.”
눈동자 색이 엷어지는 듯하더니 기어코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해인은 손을 뻗어 그것을 훔쳐 내려 했지만, 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손끝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해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희미한 온기가 닿는 듯하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