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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멍하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애초에 자신이 어떤 낯을 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안녕.”
낯선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다.
등 뒤로부터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린 해인은 처음 보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곧바로 알아차렸다.
“당신은…….”
또 신이다. 현대에서는 아버지인 포세이돈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존재를, 고작 몇 달 동안 몇 번이나 만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맞은편의 신은 아주 젊고 수려한 청년의 낯을 하고 있었다. 위압감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존재감이 몹시 선명했다. 분명 낯선 얼굴인 것은 맞지만, 금색 머리칼 위에 얹어진 날개 달린 모자와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고 있어 누구인지 알아채는 것은 쉬웠다.
헤르메스일 것이다.
기이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해인을 빤히 들여다보던 상대가 불쑥 가까이 다가오더니 해인의 손을 낚아챘다.
“이거 숙부님이 보면 화내겠는데?”
그러고 보니 손끝이 돌에 긁혀 엉망이었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렸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아마도 여전히 반쯤은 정신이 없는 채여서일 것이다. 해인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안 들키면 되죠.”
“오, 그렇긴 하지.”
짧게 소리 내어 웃은 신은 그대로 해인을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끌어 올려진 몸이 허공에 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애초에 처음부터 발이 땅에서부터 두 뼘쯤 떨어져 있었다.
뒤이어 해인이 당황하기도 전 그가 먼저 용건을 밝혔다.
“자, 숙부님이 시키셔서 데려다주러 왔어.”
“숙부……. 그러니까 아버지가요?”
“어어. 내가 누군지는 바로 알았나 보네. 나한테 아쉬운 소리를 다 하시더라고.”
사방에서는 여전히 절망 어린 비명과 탄식이 가득했다. 그러나 헤르메스에게는 완전히 관심 밖인 듯했다. 애초에 헤르메스는 트로이와 아카이아 연합, 둘 중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신인 것이다. 그는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말거나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할 말만 중얼거림과 동시에, 느긋하게 성벽 끝으로 향했다.
“숙부님이 그렇게 굴 만큼 아끼는 자식이라니 궁금해서라도 와 봐야겠더라. 잘한 것 같아. 눈치도 있고, 맹랑한 소리도 할 줄 알고, 재밌네.”
그가 중얼거리는 말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다. 해인은 지금 헤르메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발밑이 허공이었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지금…….”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안 떨어트리니까 의심하지 마.”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으며 대꾸한 신이 그대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듯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고작해야 몇 초, 잠깐의 압박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발은 땅에 닿아 있었다. 팔을 풀어 주며 헤르메스가 자랑스러운 듯 턱을 들었다.
“이거 봐, 내 말이 맞지.”
“아, 네……. 감사합니다…….”
평소였다면 신을 상대하는 만큼 조금 더 예의를 갖췄겠지만, 지금 해인은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대충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곧바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사실 떨어져 있던 건 고작해야 하루뿐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몹시 긴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눈이 마주치자 차게 굳어 있던 낯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지듯 떨어트리고 뛰듯이 다가온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해인을 끌어안았다.
“……해인.”
어깨 위로 쏟아지듯 고개가 떨어졌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그 등을 감싸 안았다. 귓가로 채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띄엄띄엄 쏟아졌다. 혼자 둬서 미안하다거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 했다거나…….
하나같이 모두 자책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일도 포함해서, 이런 식으로 아킬레우스의 역린 같은 것을 건드리는 일이 몇 번째 자꾸만 벌어지고 있기는 했다.
“……아니야.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고…….”
닿아 있는 부분으로부터 지나간 하루 동안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쫓겼을 아킬레우스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에게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처럼 단순한 친인도 아닌, 어릴 적부터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였다.
“……괜찮아요.”
그런 존재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새삼 아득해진 해인은 자신에게 안겨 들다시피 한 아킬레우스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그때였다. 트로이 성벽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이 안쪽에서 열리더니, 인영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급히 뛰쳐나왔다.
프리아모스였다.
등 뒤로 병사 몇몇이 급히 따라 나왔으나, 늙은 왕은 나이 든 신체에 어울리지 않는 절박함으로 그들을 따돌리다시피 하고는 겁 없이 아들의 목숨을 날린 장수의 지척으로 다가섰다.
그 존재를 알아챈 해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는 자신에게 어떠한 무기도 없음을 증명하겠다는 듯,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완전히 젖히고는 양손마저 들어 보였다. 행동이나 표정, 그 모든 것에서부터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인기척만은 진작 알아차렸던 듯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노려보는 아킬레우스에게 해인이 작게 속삭였다.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왕이에요.”
뒤이어 해인은 끌어안았던 팔을 풀며 반걸음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프리아모스는 당장에 아킬레우스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약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무릎을 꿇었다.
“부디……. 부디 내 아들의 장례를 치를 시간을 주시오.”
혹시나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걱정한 듯 빠르고 간절한 어조였다. 프리아모스는 자신의 체면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아킬레우스의 손을 끌어 그 손끝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제발, 후에 무엇이든 드릴 테니, 내 아들을 죽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손에 입 맞추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장례식만이라도 치르게 해 주시오…….”
눈물을 흘리는 왕을 내려다보며 아킬레우스는 한숨을 삼켰다.
헥토르가 증오스러운 것은 변함없으나, 포이닉스, 혹은 그의 아버지인 펠레우스와 엇비슷한 나이의 노인이 가엾게 구는 꼴을 보니 힘이 빠졌다.
비록 아킬레우스는 오랜 친구를 잃었으나 이 노인은 아들을 잃었고, 어쨌든 파트로클로스의 시신과 소중한 이까지 돌려받은 그와 달리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가 거절하는 순간 돌려받을 것조차 없어지는 셈이었다.
해인의 앞이기도 했으니 그도 정도 이상으로 잔인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도 이 정도는 동의할 법한 생각일 것이다.
시선을 틀어 해인을 잠시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냈다.
“……그렇게 하시오. 나는 내 부관의 장례를 치러야겠으니까. 열이틀이면 되겠지.”
자신의 귀에 들린 말이 허락임을 알아차린 순간, 프리아모스는 오열하듯 눈물을 쏟았다.
“그렇소, 충분합니다. 고맙소, 정말로…….”
여러 번 반복해 고맙다고 중얼거리던 프리아모스는 얼마 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함께 온 소수의 병사들이 주섬주섬 자신들의 다음 왕이 되었을 이의 시체를 챙겼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시체를 달리 챙겨 갈 이동 수단조차 없어서,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시체를 업어야 했다.
해인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가는 프리아모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위로 금관을 쓰고, 또렷한 안광으로 정중한 태도를 보였던 왕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작게 느껴졌다. 그가 왕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닌, 단지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인.”
가라앉은 목소리에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다가와 있던 아킬레우스가 머뭇거리듯 손을 뻗더니 어깨를 안아 왔다.
“우리도 돌아가자.”
***
아킬레우스 본인은 이 참전이 임시라고 이야기했으나, 연합군의 수뇌부는 안 들리는 척하며 미르미돈족을 연합군 진영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한번 잃어 보고 나자 그 무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간의 의견 일치는 이루지 못했지만 어쨌든 연합군 진영에는 임시로 세운 아킬레우스의 막사가 있었다.
그곳으로 우선 돌아왔을 때였다.
사실상 급히 세운 곳인 만큼 기본적인 가구들만을 제외하면 거의 비어 있어야 할 내부는 기이하게도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막사 안이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이게 무슨.”
멈칫한 해인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조차 어느새 안개가 자욱해 방금 들어온 막사의 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킬레우스가 반사적으로 해인을 가까이 끌어당겼을 때였다.
「아킬레우스, 펠레우스의 아들이여. 이제 유일한 존재가 된 자.」
그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듯하며 막사 안을 채웠다. 한순간 안개가 서서히 걷혀 나가더니 시야 안으로 흐릿하게 인영이 보였다.
「그대의 삶은 기어코 운명을 틀어 유일한 것을 손에 넣었구나.」
세 명의 여신이었다. 그들은 각각 손에서 실을 자아내고, 자아낸 실을 감고, 실을 자르기 위한 가위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맡은 역할대로 손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감긴 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든 여신이 그것을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떨어진 실은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흩어지듯 사라졌다.
‘……운명을 틀어?’
그렇지 않아도 ‘운명’이라는 단어에 신경 쓰이는 게 많았던 해인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여신들은 그 이상 덧붙이는 말 없이, 직전에 사라진 실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안개로 가득 찼던 막사 안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삭막한 풍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전혀.”
당사자인 아킬레우스조차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금의 상황에 답을 주겠다는 것처럼 누군가 해인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는 해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조용히 말했다.
“아이야,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크로노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