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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에는 별짓을 다 하며 나가려 해도 결국 나가지 못했던 왕궁을, 고작 몇 시간 만에 이토록 쉽게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반쯤 정신을 빼놓은 채 카산드라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해인은 어느새 성벽 위에 도착해 있었다.
성벽 위에는 트로이의 왕족들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전장에 나갈 수 있을 만한 젊은 남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를 모아 놓은 듯했다. 그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이가 해인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포세이돈 님의 따님.”
포이닉스와 엇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상대는 흰머리가 조금 섞인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하고, 그 위에는 금으로 된 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이 도시의 주인, 프리아모스라 하네.”
겸손한 단어를 썼으나 목소리가 또렷하고 안광이 선명했던 탓에 그 뜻이 잘못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해인은 채 대답도 하지 못하고 트로이의 왕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전날 해인이 탈출을 위해 그의 집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다만 정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비록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게 되었으나, 그것이 그대의 잘못은 아니지. 그러니 상황이 우리를 편견 속에 밀어 넣게 두는 것보다는, 다만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네. 문제가 있다면 그건 당신을 납치하여 이 도시에 내려놓았던 신들의 것 아니겠나?”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까?”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니 신들께서도 나를 나무랄 수 없을 거라네.”
쓴웃음을 지은 프리아모스 왕은 팔을 펼치며 권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보다 손님답게 대했겠지. 대신이라 말하기 뭐하지만, 내 앞이든 곁이든 바라는 곳에 앉아서 그대의 연인을 바라보게나.”
“아…….”
그 말에 해인은 조금 아연한 기분이 되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지켜보라니…….’
그것이 싫어 전날 방화범이 되는 불명예까지 무릅썼건만 결국 현실은 이 모양이다. 해인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카산드라를 무심코 곁눈질했다.
‘……할 수 없는 일.’
가시처럼 거슬리는 짧은 문장을 중얼거리며, 창백해진 해인은 프리아모스에게 이끌려 성벽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곳에는 해인이 익히 아는 얼굴인 헬레네를 제외하고도 몇몇 여자들이 더 있었다. 아마 공주들에 더해 전날 보았던 헥토르의 아내 역시 섞여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성벽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헬레네가 고개를 들고는 눈짓으로 슬쩍 아는 척을 건넸다. 그러나 해인은 도저히 반응해 줄 여력이 없어 그것을 보고도 어떠한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성벽 아래로는 전장이 훤히 보였다.
‘이런 구도 너무 싫은데.’
너른 평야 위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었다. 성벽 바로 아래에 집결해 있는 것은 트로이의 병사들일 것이고, 그 맞은편에 있는 이들은 아카이아 연합군의 병사들일 것이다.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 얼핏 익숙한 깃발이 보였다.
해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눈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이걸……. 어떡해야 하지.’
지금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상황은 급류를 탄 듯 빠르게 흘러갔다. 트로이군과 연합군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으로 누군가 말을 타고 뛰쳐나가더니, 중간에 이르러 훌쩍 뛰어내렸다. 그 사람의, 어딘가 익숙한 듯 낯선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인은 몇 초에 걸쳐 그 정체가 헥토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뒤이어, 그 맞은편으로 헥토르를 맞이하듯 나오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기어코…….”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벽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해인도 이 시대의 전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았다. 언젠가 파트로클로스로부터 자세히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으니 당연했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것처럼 수많은 병사들이 난전을 벌이는 게 일반적이나, 때로 저렇게 높은 지위의 장군 한 명이 앞으로 나아가 일대일로 결투를 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절하는 순간 명예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그 결투가 이어지는 동안, 당사자들이 아닌 사람들은 그 결투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결투하는 당사자들의 명예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명예를 신경 쓰다 보니,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결투를 벌일 때는 서로의 지위도 격이 맞아야 했다. 트로이의 총사령관인 헥토르가 나섰으니 연합군에서 내보낼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단어 그대로 ‘지위의 격’이 맞는 아가멤논, 아니면 연합군 내 가장 뛰어난 무위를 가진 아킬레우스, 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원한도, 심지어 나마저 여기 억류되어 있으니까…….’
아킬레우스가 저기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멀리서도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전장에 서 있는 걸로도 모자라 헥토르를 상대하러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 내내 했던 후회가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성벽을 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해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막사 바깥에 있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후회로 끝이 아니었다. 장소가 전쟁터이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웠다.
명예를 존중해야 하는 결투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누군가 숨어서 화살을 쏠 가능성은 없는지부터 시작해, 언젠가부터 내내 품고 있던 두려움마저도 새삼스럽게 다시 엄습해 왔다. 해인은 이전 아킬레우스로부터 직접 들었던 그의 예언을 떠올렸다.
‘……공을 세우면 단명하게 될 거라고 했지.’
그 예언을 기반으로 생각하면, 이기거나 지거나, 어느 쪽이든 모두 최악이었다.
아킬레우스가 승리한다면 무려 ‘트로이의 총사령관’을 상대로 이긴 것이니, 전장에서 세울 수 있는 그 이상의 공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단명 조건을 완전하게 충족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다면, 그저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다.
‘저 사람을 이렇게 전장으로 끌어내서 죽게 만드는 게 내 귀환 조건이면…….’
해인은 자신이 손끝으로 돌벽을 긁고 있는 것도 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거면 내가 없는 게 차라리 편했겠지. 그랬으면 전장에서 이탈했을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성벽 아래서는 결투가 시작되고 있다.
‘신은 정말 뭘 바랐던 거지?’
대답해 줄 이 없는 의문이 일렁이다 흩어졌다.
어느 사이 곁에는 해인이 모르는 다른 몇몇이 저마다 절박한 낯으로 성벽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헥토르의 누이들일 것이고, 한 명은 그의 아내일 것이다. 카산드라만이 무언가를 예상한 듯 초연한 낯으로 뒤에 물러서 손을 모으고 있다.
‘어떤 끝을 봤을까.’
그러나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눈앞의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불가능했던 탓이다. 이대로 보고 있는 이상, 결과는 어차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끝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빨랐다.
해인은 언젠가부터 거의 멈추다시피 하고 있던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아킬레우스.”
내려다보이는 성벽 아래서, 헥토르가 무릎을 꿇고 반쯤 몸을 무너트렸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려 해인은 주저앉지 않으려 성벽을 세게 붙잡았다.
“아아악! 여보!”
“오라버니……!”
같은 것을 보고 있던 사방의 사람들이 저마다 탄식하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해인이라고 홀로 기뻐하지는 못했다.
승리했으나, 더 넓게 바라보면 과연 이것을 그의 진정한 승리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던 탓이었다.
***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죽음의 신이 등 뒤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각 속에서, 헥토르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불과 직전까지 자신의 상대였던 젊은 반신의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헥토르는 쓰게 웃었다.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부터 느꼈으나 정말이지 인간 같지 않은 사내였다.
‘신의 피가 반은 섞였으니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닌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레스의 아들인 패배와 두려움의 신은 그를 무력화시키고자 그의 연인을 납치했으나, 때로 그들의 권역인 패배와 두려움은 의도한 적군이 아닌 아군에게로 흘러들어올 수도 있는 법이다.
전혀 무력화되지 않은 반신은 기어코 트로이의 총사령관을 꺾어 놓고야 말았다. 그가 보여 준 강함에는 비겁한 수를 쓴 신들에 대한 분노도 분명 들어 있을 것이다.
“내,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려주게. 패자로서……. 승자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니, 부디…….”
그 정도로 간절하게 말하자 그제야 답이 돌아왔다.
“……그건 네 가족들에게 달렸지.”
그래도 듣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서늘하고 짧은 대답의 뜻을 알아차린 헥토르는 내상을 입은 속에서 역류하는 피를 삼키는 와중에도 무심코 한숨처럼 웃고 말았다. 지난 늦은 밤 만났던 여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녀를 멀쩡히 돌려주는 대가가 내 시신이 되겠군.’
죽기 직전에 떠올리는 게 아내도 아닌,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승자의 연인이라니 우스운 일이었으나……. 이 반신처럼, 그 여자도 어떤 의미로 인상적인 사람이기는 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이 웃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러나 헥토르는 오히려 그 모습에 문득 안도하고 말았다.
칼끝 하나 허락하지 않던 무위,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 냉정하던 시선까지, 자신과 결투를 벌일 때의 아킬레우스는 다만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온 사신과 같이 섬뜩한 인상을 주었을 뿐이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려웠다.
그러나 막상 죽음을 정말로 앞두게 되자 하나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인간이기는 하구나.’
제 부관을 죽인 자였으니 시신마저 모욕하고 싶을지언정, 그 분노를 억누르고 자신의 손에 남아 있는 중요한 이의 안위를 챙기겠다 결심하면서도, 채 지워지지 않는 원한에 죽어 가는 자신을 끝까지 차가운 눈으로 오시하기까지, 그 무엇 하나 인간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자신의 시신만은 가족의 품에 돌아갈 것이다.
근거는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명제를 끝으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생각도 점점 느려졌다.
삶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