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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5)화 (125/149)

***

방 안은 나갈 때와 다름없이 어두웠다.

달빛만이 어렴풋이 비치는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간 카산드라는 해인을 침대에 앉히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등불을 써서 방 안의 등잔불 몇 개를 밝혔다. 곱게 큰 공주라기에는 혼자서 이런저런 잡일을 하는 것이 퍽 익숙해 보이는 태도였다.

해인이 멍하니 그 행동의 자취를 눈으로 따라가는 사이 방 안이 조금 밝아졌다. 등불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카산드라가 해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탈출을 꿈꾼 인질을 대하고 있음에도 태도나 표정에서 별다르게 부정적인 낌새를 찾을 수 없었다.

해인은 카산드라를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멀쩡하게 깨어 있는 걸 보면 내가 무슨 짓을 하면서 나갔는지도 대충 알고 있을 텐데.’

아까 전 처음 여기서 깨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새삼스럽게도 호의적인 태도다. 해인은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이 태도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느리게 말문을 열며 해인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카산드라가 천천히 몸을 낮춰 앉았다. 해인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으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름을 여쭤 보지도 않았군요. 말해 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해인은 당혹스러움을 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은,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았음에도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해인입니다.”

“그래요, 해인.”

말해 줘서 고맙다는 듯 살며시 웃은 카산드라가 손을 뻗더니, 몇 시간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해인의 손을 위에서 가볍게 덮어 쥐었다. 그러나 곁에 앉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몸을 낮춘 채여서인지, 시선의 높이가 너무 차이가 나 오히려 부담이었다. 해인은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무슨 말을 하려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일어나서…….”

“해인.”

부드럽게 말을 끊고 카산드라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인을 낮추는 대신 상대를 어르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늦었습니다. 애초에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해인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속삭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더없이 단단해 부서지지도 않을 확신이었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확고하게 말을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해인은 그제야 아까 전 카산드라가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했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운명을 손안에 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앞으로의 일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렇게 생각한 찰나 어째서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반발심이 느껴졌다.

해인은 여전히 잡혀 있는 손을 무심코 빼내려는 듯 움찔했다. 조금 의아할 만큼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 마음속을 지배했다. 카산드라의 말은 모조리 거짓말인 것만 같고, 카산드라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니 당연하다고 말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카산드라의 말 자체도 해인이 믿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이것은 그런 인간의 영역과는 분명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조종받는 듯한 불신이었다.

‘……이상해.’

대답 없이 빤히 내려다보는 해인의 시선을 느낀 카산드라의 얼굴 위로 흐릿하게 익숙한 체념이 떠올랐다. 그 기색을 본 순간 해인은 문득 생각난 사실에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뜬금없게도 그 순간, 카산드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가 생각난 것이다.

해인이 스스로 떠올리기 전 카산드라가 먼저 자신을 트로이의 공주라 소개하여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나, 사실 카산드라라는 이름은 현대에서 ‘공주’보다는 ‘예언자’의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굳이 따지자면 예언자에 선지자까지 더해서…….’

예언 능력 자체는 몹시 뛰어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자신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는 저주를 받게 된 사람이다. 해인으로서도 그게 정확히 무슨 사건이었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 탓에 믿어 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트로이의 멸망을 이야기했던 것은 분명했다.

곧바로 떠올리지는 못했어도 한번 기억이 나자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정보들이 몇 개 생각이 났다. 자신이 느끼는 이 거대한 불신도 어쩌면 그 저주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가요?”

“예?”

예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물음에 카산드라가 눈을 크게 뜨며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해인은 입매를 비틀었다. 사실 조종당하는 듯한 불신이 아니더라도 카산드라의 말을 믿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면전에 대고 거짓말하지 말라며 쏘아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해인은 솔직하게 불신을 내뱉는 대신, 내내 갖고 있던 억울함을 꺼냈다.

“왜 사람은 운명을 거부할 수 없나요?”

“어…….”

어울리지 않는 멍한 낯으로 자신을 보는 카산드라에게 해인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너무 불합리하잖아요…….”

태어나 안배된 운명을 거부할 생각도,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이 자랐던, 심지어 예언의 신인 아폴론의 사제이기까지 한 카산드라는 찰나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잠시 후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는 건 당신이 처음이니까요.”

카산드라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던 적이 없어……. 답해 드리기도 어렵군요.”

“당신이 예언가라서?”

“글쎄요.”

해인은 일어선 상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카산드라의 반듯한 얼굴 위로 언뜻 고민스러운 기색이 비쳤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사실 해인도 운명이 절대적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수도 있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려 들던 아킬레우스가 특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말을 멈추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어요.”

해인의 말에 대답할 만한 단어를 찾기 어려운 듯 카산드라가 미간을 좁혔다. 결국 나온 것은 그 말에 대한 답이 아닌, 주제를 바꾼 권유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쉬세요.”

어깨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겨주며 카산드라는 직전의 주제를 회피하듯 덧붙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편안한 밤 되세요.”

그러나 정말 그런 밤이 될 수는 없으리라는 걸 말하는 사람도, 해인도 모를 수 없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이 흘러갔다.

***

다음 날 날이 밝자, 또다시 카산드라가 해인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여종 몇몇을 등 뒤에 달고 들어온 그녀는 해인에게 씻을 물이나 옷, 아침 식사 따위를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포로 대우가 좋네.’

무심코 비꼬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해인은 천천히 그것을 억눌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 예를 들어 헥토르 같은 자라면 모르겠으나 카산드라를 비롯해 다른 여종들은 달리 잘못이라 말할 만한 게 없었다.

오히려 고생이라면 고생일 것이다. 카산드라는 어제부터 내도록 해인에게 상당히 헌신적이었고, 공주가 그런 태도를 보이니 다른 여종들도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러나 잠도 제대로 못 잔 마당에 음식 같은 게 목뒤로 넘어갈 리 만무했다.

카산드라가 바깥에서 그녀를 찾는 목소리를 듣고 잠시 방을 나간 사이, 근처에 서 있던 여종이 멍하니 음식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해인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독 같은 건 타지 않았어요, 아가씨.”

“……그랬겠죠.”

흘리듯 답한 해인은 초조함에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도 생각했지만, 죽음이 예고된 장소에 아킬레우스가 오는 꼴은 도무지 보고 싶지 않았다.

‘트로이에 오래 있으면 안 되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경계가 더 심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해인.”

방 안으로 돌아온 카산드라가 어딘지 복잡한 얼굴로 해인의 곁에 다가왔다. 해인이 고개를 들자, 카산드라는 힐끗 눈을 돌려 창밖을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함께 나가야겠어요, 해인.”

그 순간 기묘한 불안감이 문득 등 뒤로 성큼 다가왔다. 초조함에 식었던 손끝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식었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를요?”

카산드라가 선언하듯 답했다.

“아킬레우스가 성벽 앞에 왔습니다.”

듣고 싶지 않던 말에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고작해야 하루였다. 아킬레우스가 서두를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빨랐다. 황망하게 흘러나온 되물음에 카산드라가 입가만 끌어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애가 탔었나 보지요. 내 오라버니가 이미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는군요.”

“……안 돼요. 안 되는데…….”

“해인.”

“그가 트로이로 오면 안 돼.”

반쯤 넋 없이 중얼거리던 해인의 입을 카산드라가 손을 뻗어 막았다.

“그 이상 말하시면 안 됩니다.”

입가에 닿는 체온에 흠칫 놀란 해인이 눈을 들자, 카산드라가 똑바로 시선을 맞춰 왔다.

“이미 바꾸기에는 늦었어요.”

지난밤과 같은 말이다. 또다시 차오르는 반발심에 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을 선명히 보면서도 카산드라는 말을 번복하지 않은 채, 다만 한숨처럼 속삭였다.

“성벽으로 함께 가지요. 제 아버지께서도 당신 역시 곁에 오기를 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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