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들은 순간 확연하게 얼어붙은 해인의 표정을 보고서도 헥토르는 예상했다는 듯 희미하게 씁쓸한 미소나 잠시 떠올릴 뿐이었다. 그는 굽혔던 몸을 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오래 대화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방 앞까지만 동행하고 물러나 줄 테니.”
침착한 목소리와 태도였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해인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머리끝까지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사실 아주 부당한 것도 아닐 터였다.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게 전부겠어요?”
불쑥 내뱉은 말에 헥토르가 멈칫했다. 해인은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흐린 달빛 아래의 새파란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을 닮아 있었다. 사실 푸른 불꽃은 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헥토르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는데……. 정작 죽인 사람은 어디 다친 곳도 없고, 이렇게 태연하게 굴 만큼 아무렇지도 않다니.”
용케 욕이라고는 한마디 섞이지도 않았지만, 그 어조만은 날카로워 마치 칼날 같았다. 그러나 헥토르는 아무런 대꾸 없이 이어지는 말을 다 듣고만 있었다. 맞부딪쳐 오는 서늘한 눈빛을 피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하는 모든 비난과 분노를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듯, 어쩌면 겸허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 생각해? 미안하지도 않아?!”
말을 맺은 해인이 조금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굳이 억누르지 않았음에도, 화의 열기를 스스로 못 이겨 눈가가 젖었다. 해인은 인상을 쓰며 옷자락으로 눈 주변을 대충 문질렀다. 그동안 헥토르는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는 분명 내게 화를 낼 자격이 있지.”
순간 사방이 고요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직전까지 해인은 그저 치밀어 오른 분노를 되는대로 내뱉을 뿐이었으니, 헥토르에게 무언가 기대했던 반응이 별다르게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더라도 설마 지금과 같은 답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뭐?”
헥토르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을 빼앗아 왔던 수많은 이들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의 분노는 정당하오. 내 행동으로 인해 그대가 친인의 죽음을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니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죽음은 정말 유감이오.”
해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꺼냈더라면 적당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은 헥토르였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당사자가 그의 죽음을 유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면서 왜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나요? 책임을 회피하려고? 아니면 죽음을 모욕하려고?”
“그럴 의도는 없었소.”
“죽인 사람이 유감을 표한다고 해서 이제 와 무언가 달라지나요?”
“그렇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다만…….”
헥토르는 잠시 망설였다. 무심코 이어 가려던 말의 내용을 떠올리자, 과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였다. 그런 것을 오늘 처음 보는 여자, 심지어 트로이를 싫어하는 신의 자식에게 자연스럽게 털어놓으려 했다니,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 속에서.’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아군이나 가족에게는 할 생각 없는, 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던 탓이다.
누군가에게 말이나 꺼내 보고 싶었던 적은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을 생각도, 고통을 털어놓고 연민받고 동정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서였다. 가끔은 어깨 위에 얹힌 것들이 버거웠지만 그걸 들켜서는 안 됐다. 그는 항상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해인은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면 다시 볼 일은 없을 사람이다.
‘트로이가 승리한다 한들 포세이돈 님께서 데려가실 테고, 트로이가 패배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건 끝나 버릴 테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으로서는 별 의미 없는 사이였다.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이의 친인이기도 했으니, 이런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한들 드러내 놓고 동정을 건네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약간이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르지. 내가 태연해 보이는 게 싫은 모양이니.’
그는 직전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지금을 제외하면, 앞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말들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아니, 변명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내게 있어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소.”
“……해야만 하는 일?”
“나는 트로이의 총사령관이자 전장에 선 한 명의 장수였고, 그때 그는 내 적이었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죽는 건 나였겠지. 나라고 누군가의 삶을 빼앗는 일이 즐거운 건 아니오.”
그 말에 해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내 어깨에는 수많은 것들이 얹혀 있거든.”
헥토르는 중정을 둘러싼 왕궁 건물을 한번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것들은 내려놓을 수 없고, 내려놓아서도 안 되는 것들뿐이오. 내가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질 테니까. 그래서 나는 파트로클로스를 만났을 때 죽을 수 없었소.”
처음 꺼내 보는 마음들이었으나 오랜 시간 벼려 냈었기에 잔잔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다. 변명, 혹은 고백이라고 부를 법한 말은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하며, 헥토르가 해인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비록 내 손으로 그의 숨을 끊은 것은 사실이나, 유감을 표한 것에는 다른 어떠한 의도도 없었소. 그의 어깨에도 나처럼 수많은 것들이 얹혀 있었겠지. 당신도 어쩌면 그의 미련 중 하나였을 테고.”
해인은 그 자리에서 한참 침묵했다. 그러자 헥토르는 마찬가지로 말없이 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상대의 옷자락 끝을 노려보듯 응시하던 해인은 눈을 꾹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서인지,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말을 들었다 한들 전부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결심한 바를 언제나 완벽하게 행하지는 못하는 생물이었다. 헥토르의 말을 들은 순간, 해인은, 상대가 매일의 삶마다 어느 정도의 무게를 얹고 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말았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때로는 악역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깨우치고 싶지는 않았다.
헥토르는 방 앞까지 동행하겠다던 본인의 말을 지키려는 것인지, 해인이 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리듯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늦은 시간이니 사람을 부르기보다 깨어 있는 자신이 일을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합리성일지, 아니면 남에게 시켜서는 안심할 수 없다는 완벽주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짜증 나네…….’
어느 쪽이건 해인은 헥토르가 싫었다. 사정이 있기에 더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탈출도 실패한 마당에 여기서 계속 시간을 끌어 봤자 얻는 것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장서세요.”
어쨌든 오늘은 방으로 돌아가 순순히 갇혀 있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알아들은 헥토르는 그 말대로 했다.
해인은 안내자 겸 감시자의 뒤를 따라 뛰쳐나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창문으로 빠져나왔던 건물 안으로 문을 통해 들어섰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노려보는 눈길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해인은 거기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저렇게 볼 만도 하지.’
복도에 불 피우고 자신들을 따돌린 채 도망간 사람을 고운 눈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생각했던 대로 불이 크게 번지지만은 않아 다행이었다. 어렴풋이 남은 바닥의 탄 자국이나 공기 중을 떠도는 탄내는 남아 있었지만, 그 이상의 피해는 없어 보였다.
이 왕궁이 비록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쓸 이유 없는 장소이기는 했으나, 불이 크게 번져 무고한 사람이 다치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 층 복도로 올라갔을 때였다.
“……오라버니!”
저 멀리서 등불을 들고 서성이던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얼굴이 보였다. 카산드라였다. 잠들지 않고 있었는지, 늦은 시간임에도 또렷한 눈동자를 한 여동생을 알아본 헥토르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불렀다.
“카산드라? 이 늦은 시간에…….”
지척에 온 카산드라는 헥토르의 뒤에 선 해인을 곧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매를 잠시 누그러트리는가 싶더니, 헥토르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이분 곁에 있을게요. 오라버니는 이제 돌아가세요.”
“카산드라.”
“가서 아내와 아들의 곁에 있으세요. 전장에 서 있지 않을 때는 그들 곁을 지키는 게 오라버니가 해야 할 일이니까.”
빠르게 말한 카산드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헥토르를 스쳐 지나 해인의 곁에 다가오더니 주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해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저와 가요.”
당황스럽긴 했지만, 해인에게 있어서도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자보다는 무고한 왕녀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해인은 굳이 카산드라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럼 오라버니, 편안한 밤 되시길.”
“……너도, 카산드라.”
해인의 반응도 그렇고, 카산드라가 하고 간 말도 그렇고, 자신보다는 카산드라가 여러모로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헥토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한 뒤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