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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3)화 (123/149)

“잠깐! 거기 누구냐!”

속도가 가장 중요한 만큼 이번에는 발걸음 소리를 죽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등 뒤로부터 병사 하나가 곧바로 인기척을 눈치챈 듯 소리를 질러 왔다. 해인은 대답하는 대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등 뒤를 쫓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해인이 문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모퉁이를 돈 병사 하나가 비로소 해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저, 저분은……. 아가씨!”

해인은 닫힌 문을 훑었다. 나무로 된 거대한 막대가 문을 가로로 막고 있다. 저 막대를 치워 버리기만 하면 문은 열리겠지만, 당장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있는 와중에 거대한 막대를 힘써서 치우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해인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다른 방법이 거기 있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등 뒤에서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해인은 방향을 틀어 문 바로 옆의 창문으로 빠르게 향했다. 침입자가 쉽게 드나들면 안 되는 만큼 창틀은 제법 높았다. 그러나 해인은 이 시대의 평균적인 남성들보다도 키가 훌쩍 컸다.

손을 짚고 뛰어올라 창틀에 앉았다가, 그대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까지는 고작 몇 초면 충분했다.

“아가씨가 도망쳤다!”

몇 초 차이로 해인을 놓친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소란이 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며 해인은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급히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발이 꼬여 넘어질 것 같고, 누군가 당장 어깨를 잡아챌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탈출이 성공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던 탓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중정이 나오면 어떡해.’

해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가 달리는 길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만들어진 반듯한 중정의 가장자리였다. 이렇게 길만 달려 봤자 결국 원위치로 돌아올 뿐, 성내를 나갈 수는 없다.

나가려면 사방을 둘러싼 건물들 가운데 하나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낮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시간에 중정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가는 문이 열려 있을 리 없었다. 무작정 달려가며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만 확인하던 해인은 자신이 빠져나왔던 곳과 연결된 다른 궁 사이에 좁게 난 길을 발견했다.

이미 저만치에서는 이미 병사들이 문을 열고 나와 해인을 부르며 쫓아오고 있다. 소란이 이 정도로 커진 이상 깨어나 해인을 쫓는 데 합류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당장은 잡히지 않는 게 우선이지.’

마침 길이 난 곳은, 중정 밖으로 나갈 수 있어 보이는 거대한 문이 있는 건물 안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쪽으로 가서 정말 출구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작은 가능성이나마 행운에 걸어 보기로 하며 해인은 길 안으로 다급히 꺾어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쫓아오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건물 벽에 한 번 막혀 직전보다 한결 작게 들렸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늦추며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은 직진밖에 못 하네.’

막상 들어와 놓고 보자 이것이 외통수는 아니었을지 고민됐지만, 이제 와 되돌아 나갈 수는 없었다. 해인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를 놓친 듯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은 가장자리로 바짝 붙어 어둠에 몸을 숨기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다시 뛰었다.

그렇게 길 끝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꺾이는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한 발 내딛자마자, 해인은 맞은편에서 오던 낯선 사람과 거짓말처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상대 역시 해인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하며 멈칫했다.

그 낯을 보며 해인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상대는 남자였다. 달빛이 그리 밝지도 않고 상황도 급박한 만큼 이목구비 하나하나 제대로 살펴볼 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성별만은 확실했다. 심지어 상대는 체격도 꽤 좋았는데, 그로도 모자라 허리춤에는 번듯한 검까지 차고 있었다.

시선을 맞춘 것은 찰나였으나 그 순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해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시간에 잠들어 있지 않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쩌면 자신을 쫓는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나온 것은 아닐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남자의 얼굴 위로 먼저 한 줄기 깨달음이 스쳤다.

“그대는…….”

해인은 직감했다.

저 사람은 그녀에 대해 이미 당연하게도 알고 있었고, 지금 얼굴을 제대로 알아봤으며, 저 길 너머가 왜 소란스러운지,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녀를 마주치게 되었는지까지 전부 짐작하고 만 것이다.

‘망했네.’

통렬한 평가와 동시에 해인은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을 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서시오!”

곧바로 등 뒤로부터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잡히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라는 불길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거리를 꽤 많이 벌려 놓고 시작했던 데다가, 문이라는 장애물도 하나 있었던 병사들과 달리 이쪽은 거리도 아슬아슬하고 장애물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그 이상 가 봤자 잡힐 거요!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설득의 외침에 해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가 이미 큰 소리를 냈으니, 길 바깥에서 해인을 찾던 병사들에게도 위치가 발각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무례하지 않고 기묘하게도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 같은 저 어조 때문에 기분이 더 이상했다.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초조함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잖아도 내내 뛰어다녔던 탓에, 누군가 발목을 잡아끄는 것처럼 달리는 행위 자체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쫓아오는 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길의 끝, 다시 바깥과 연결되는 경계선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아……!”

기어코 타인의 손이 한쪽 어깨를 낚아챘다.

그에 이어 반대편 팔뚝도 상대의 손아귀에 틀어 잡혔다. 상대도 급하게 잡았다 보니 동작이 그리 친절하지는 못했던 탓에, 붙들린 순간 받은 충격으로 가빴던 숨이 일순 막혔다가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윽, 허억, 흑…….”

숨을 몰아쉬는 해인의 등 뒤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어깨를 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한쪽 팔은 여전히 잡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몸을 지탱할 수는 없었던 탓에 해인은 그대로 무릎이 꺾여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에 대한 동정인지, 아니면 어차피 저 상태로는 일어나 다시금 도망가지도 못하겠다 싶었는지, 팔을 붙잡고 있던 손 역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때 저편에서 사방을 살피던 병사 몇몇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급히 뛰어왔다.

“거기! 찾았나!”

크게 소리치며 지척에 다가온 그들은 해인의 뒤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에 띄게 멈칫한 그들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남자가 피곤한 목소리로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되었으니 돌아가라. 내가 해결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괜찮으니 쉬도록.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전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때쯤이 되어서야 겨우 기침이 멎은 해인은 순순히 몸을 돌려 떠나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인상을 찌푸린 채로 응시했다. 남자의 말 몇 마디에 곧바로 순응하는 충성심 어린 태도들을 보아하니, 상대의 정체가 반쯤이나마 짐작이 갔다.

‘……최소한 왕족쯤은 되나 보네.’

방화범이 되는 불명예까지 감수하며 탈출을 감행했건만, 운이 나빴다.

병사들이 모두 떠나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해인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시선의 높이와 서로의 거리가 모두 가까워지며 겨우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인이 생각했던 대로 생김새조차 왕족 같은 사내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 법했는데, 반듯하고 단정한 얼굴은 절세의 미남까지는 아니었으나 보기 좋았고, 무엇보다 은연중 드러나는 위엄은 태어났을 때부터 떠받들어지며 자란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얼핏 카산드라와도 닮은 것 같았다.

“……달리 할 말도 없고, 하지도 않을 테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오.”

점잖은 말투였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에서는 어딘가 착잡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방금까지 탈출을 꿈꿨던 포로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오히려 해인을 안쓰럽게 여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문에 해인은 오히려 본인이 울컥하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묘한 짜증과 억울함 속에서 해인은 대답 대신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체격이 좋고, 무기도 있고.’

덤벼서 이기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명확해진다. 방법을 조금 바꿔 주변에 도주로는 없을지 살펴봤지만, 제대로 길을 찾기도 전에 상대와 마주쳐 도망 다녔기에 제대로 된 길이 어딘지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편 해인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당연히 모르는 듯했으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상대는 그리 아랑곳하지 않는 낯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의 오류를 깨달은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니, 마구잡이로 도망쳤으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갯짓하며 말했다.

“데려다주지. 유감이지만 그대가 혼자 왕궁을 빠져나가는 건 보다시피 쉽지 않을 테고, 나간다 한들 혼자 성벽까지 가는 건 어려울 거요. 나쁘게 대우하지 않을 테니 당분간은 방 안에 얌전히 있어 주었으면 하오.”

해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누구신데…….”

헬레네를 만난 이후로는 내내 입을 다문 채 긴장한 상태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만 해서인지 목소리를 내는 게 힘겨웠다. 채 문장이 되지 못한 의문이었으나 상대는 해인이 무엇을 묻고자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었으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 도시의 주인인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헥토르라고 하오.”

그때쯤이 되어서야 겨우 숨을 평소처럼 쉴 수 있게 되었던 해인은, 상대의 이름을 들은 찰나에 찾아온 깨달음에 또다시 호흡을 잠깐 잊을 만큼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트로이의 헥토르.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그의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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