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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2)화 (122/149)

그리고 길을 제대로 고른 듯, 해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서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통해 우선은 일 층에 닿았지만, 위층과는 달리 바깥과 바로 연결된 곳이라서인지 얼마 걷지 않아 해인은 경비를 서던 듯 돌아다니던 병사 둘과 마주치고 말았다. 긴장하고 있던 탓에 내심 흠칫했으나, 그들은 해인을 보고도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등불에 비친 해인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은 서로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검은 머리카락, 파란 눈 따위의 단어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뒤이어 그들은 다시 해인을 돌아보더니, 굳은 낯으로나마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가씨께서는 어째서 이곳까지 돌아다니십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나이도 해인보다는 많은 듯했으니, 다른 때였다면 늘 그랬듯 상대에게 말을 높이고, 똑바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부러 말끝을 짧게 줄였다. 말을 길게 하면 말끝이 떨릴 것 같았던 탓이다. 긴장을 들키지 않기 위한 일종의 가면이었다.

그것이 통한 것인지, 아니면 카산드라의 말대로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포세이돈에 대해 경고하고 갔던 것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 병사들은 또 자신들끼리 눈짓과 속삭임으로 대화하더니 이내 해인에게 대답해 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너무 오래 돌아다니지는 마십시오.”

내용은 경고였으나 두 사람 모두 해인을 손수 방으로 끌고 가려 하지는 않았다.

해인이야 모르는 부분이었지만 헬레네는 전쟁이 이어지는 지난 십 년 내내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등불 하나와 함께 한밤의 성안을 정말 꾸준히 돌아다녔다. 그 탓에 트로이 왕궁의 병사들은 밤중에 등불을 들고 돌아다니는 여자의 존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헬레네나 해인이나, 이곳에서는 결국 애매모호한 처지의 인질이자 이방인이다. 지난 십 년 동안 그저 성안만 돌아다니던 헬레네에게 익숙해진 그들은 거의 비슷한 처지의 해인이 감히 속으로 탈출 같은 것을 꿈꾸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어색하게나마 허리 숙여 인사까지 건네고는, 미련 없이 해인을 지나쳐 갔다.

‘효과 좋네…….’

설마 이 정도로 의심 없이 흘러갈 줄은 몰랐던 해인은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뱉었다.

직전까지만큼 긴장할 필요는 없었음을 확인받고 나서야 해인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성의 복도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해인은 얼마 후, 어디를 어떻게 보더라도 바깥으로 통하는 것같이 보이는 거대한 문을 발견해 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길을 잃으셨습니까? 이쪽은 가시면 안 되는 길입니다, 아가씨.”

해인이 문가로 다가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지긋한 한 명이 다가와 해인의 앞을 막아서며 정중하게 경고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는 그를 제외하고도 무려 네 명이 더 있었다.

‘늦은 시간에 다섯 명씩이나 세워 두고도 이러는 걸 보니 저기로 나가면 바깥인 건 맞나 본데.’

곁눈질로 문과 그 근처를 슬쩍 훑어본 해인은 다시 앞을 막아선 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병사는 해인보다 키가 작았던 탓에 시선을 살짝 내려야만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기는 했지만, 아까 전 마주쳤던 다른 두 명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해인이 진정 탈출을 생각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듯 태도가 느긋했다.

“……갈 수 없는 길인 줄은 몰랐네요.”

“낯선 곳에서는 그럴 수 있는 법이지요.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길이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시종이라도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건 됐어요.”

짧게 대답한 해인은 그와 더 말을 섞는 대신, 한숨을 쉬고는 짐짓 느긋한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등불을 잠시 내려놓은 뒤 벽에 기대섰다.

‘저 문을 기준으로 근처를 좀 더 돌아보면…….’

여기는 신분제가 존재하는 과거의 땅이다. 대륙을 막론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같은 문을 쓰는 경우가 잘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왕궁이기도 한 만큼, 저토록 큰 문 근처 어딘가에는 사용인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간다면 그쪽이 편할 텐데, 그러려면 우선 큰 문을 발견했던 복도를 기준으로 그 좌우를 살피는 게 좋을 듯했다.

‘……아니, 굳이 작은 문까지 갈 것도 없이 창문으로 나가도 되겠지. 그 창문도 저쪽 복도에만 있는 게 문제지만.’

병사 다섯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그 복도를 걸어 다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소란이라도 피워서 저 다섯 명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면 편하긴 할 텐데……. 그게 되나?’

문을 지키는 이들이 제 임무마저 잊어버리게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을 꾸며 내려면 꽤 큰 소란이어야 할 것이다. 내려놓았던 등불을 다시 주워 들고, 왔던 길이 아닌 다른 방향의 복도로 천천히 걸어가며 해인은 주변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고민을 거듭했다.

복도 구석의 작은 문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응?”

문은 별다른 무늬조차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위치도 구석인 것을 고려해 보면 아마 창고인 것 같았다. 해인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창고 맞네.’

대강 훑어보더라도 그리 대단한 가치는 없는 잡동사니들을 모아 놓는 곳인 게 티가 났다. 그러나 해인은 개의치 않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러잖아도 소란을 피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겉으로 하찮아 보인다 해도, 뒤져 보면 무언가 쓸 만한 것이 나올지도 몰랐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등불을 써서 여기저기 비춰 보자 커다란 항아리 몇 개, 의자 여러 개, 오래되어 보이는 천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들이대면 태우겠다.’

그렇지 않아도 날이 건조했다. 자칫 부주의하게 굴면 불이 붙기 쉬운 물건이기에, 만약을 대비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던 해인은 자신이 방금 떠올린 생각에 문득 멈칫하고 말았다.

‘……불?’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벼락같이 어떠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시선을 돌려 창고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천 말고도 불을 붙이기에 적합한 물건들은 아주 많았다. 가치 없는 것들을 모아 두는 창고인 탓인지 금속제는 드물었고, 대부분 나무로 만든 상자나 의자 따위가 눈에 많이 띄었다.

마침 시간은 고요하고 깊은 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이런 때일수록, 불시에 타오르는 불씨는 더 거대하게 보이는 법이었다. 해인은 들고 있던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주변만 밝힐 만큼 작은 불씨였지만, 이것이 어딘가 옮겨붙는 순간 그건 커다란 재앙이 되기도 한다.

소란을 피우기에 이 정도로 적합한 건 따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하겠지. 게다가 이렇게 스스로 방화범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이십여 년 동안 현대인으로서 키워 온 도덕적 기준이 마음을 찔렀다.

날카로운 망설임이 파고들었지만,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다른 때처럼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을 여유가 없던 탓이다. 지금은 신중함보다 과감함이 필요했다. 평상시의 해인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등불을 잠시 내려놓고 낡은 천부터 상태를 확인해 챙겨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조심해서 해 보자.’

잠시 후, 천 말고도 몇 가지 더 늘어난 짐들과 함께 해인은 창고를 나섰다.

애써 소리 죽여 걷던 해인이 걸음을 다시 멈춘 곳은 아까 전 문 앞을 지키던 병사와 대화를 나누고 되돌아와 벽에 잠시 기댔던 바로 그 복도였다. 복도 끝의 모퉁이만 돌면, 정면으로 스무 걸음쯤 앞에 문이 있었다.

해인은 모퉁이 너머의 병사들에게는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에 가지고 나온 천들을 전부 펼쳐 놓고, 그 위로 창고 안에서 발견했던 화살촉 없는 화살들까지 장작처럼 쌓았다.

‘놀라게만 만들면 돼. 이만하면 눈속임할 크기 정도로는 타오르겠지.’

고작 하루라지만 활 쏘는 법까지 배워 놓고 화살을 불붙일 용도 따위로나 쓰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죄의식과 함께 심호흡을 한 해인은 천천히 등불의 불씨를 장작들로 옮겼다. 바짝 마른 천과 나무는 금세 불이 붙어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돌로 된 바닥이니까 옮겨붙을 일은 없어. 굳이 사람들이 손대지 않아도 천이랑 나무만 다 타면 알아서 꺼질 거야…….’

스스로 변명하며 죄책감을 달래던 해인은 불의 크기가 서서히 커지자 등불 위의 기름까지도 천 위로 전부 흩뿌렸다. 그 순간 확 커지는 불의 뜨거움이 이마를 스쳤다. 갑작스레 거대해진 불꽃의 크기에 급히 무릎걸음으로 물러난 해인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생각보다도 더 빨리 타는데?’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어졌다. 해인은 앞뒤 잴 것 없이, 손에 옷자락을 대충 감고는 비어 있는 청동 등불 접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돌바닥 위로 내던졌다!

고요하던 한밤의 성안 복도로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소음이 가득 찼다. 불빛이야 안 보일 법한 위치였다지만 소리는 일부러 들으라고 냈던 것이었던 만큼, 모퉁이 너머에서 곧바로 외침과 함께 두어 명 정도가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누구냐!”

저들이 해인이 있는 복도까지 올 때 필요한 건 고작 스무 걸음.

그러나 해인은 뒤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맞이하려는 것처럼 정면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정말로 모퉁이에서 병사들을 마주치기 직전, 바로 옆의 거대한 조각상 뒤로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그러자마자 병사 두 명이 모퉁이를 돌아 해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불?!”

“불이다!”

아슬아슬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는 심장 박동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해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려 손을 들어 입을 꽉 막았다.

“불이야! 불이 났어!”

달려온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모퉁이 너머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또 몇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나, 둘, 세 명까지.

해인은 아까 전 자신이 보았던 문 앞의 병사들이 전부 다섯이었음을 기억했다. 그들 모두가 눈앞을 지나갔다. 이제 문 앞은 비어 있을 것이다.

해인은 그대로 조각상 뒤에서 뛰쳐나와, 모퉁이를 돌아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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