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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1)화 (121/149)

연합군 진영에서 해인은 몹시 조용하고 얌전하게 지냈다. 아무래도 다른 어느 곳보다는 막사 안이 가장 안전한 공간처럼 느껴졌고, 괜히 바깥을 돌아다니다 사건을 만들어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여기는 트로이다.

그리고 폐를 끼치기 싫은 감정은 호의를 보일 만한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일환이었다.

‘트로이에까지 그런 존중을 보일 필요는 없어.’

몇 시간 전 계속 곁에 있어 주던 카산드라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흐린 달빛에 의지해 문을 찾아낸 해인은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것을 확인하고 살짝 밀어 보자, 바깥에서 잠그지 않은 듯 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감금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짧은 안도와 함께 바깥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그 순간, 해인은 문득 아킬레우스를 직전보다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운명을, 자신에게 내려진 예언을 거부하고 정면으로 마주해 뛰어들어 부수고자 하던 그 마음이 어떤 심정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던 크로노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해인은 객관적으로 따져서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이 시대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 트로이 왕궁을 탈출할 가능성이 높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덮쳐 오는 파도를 그대로 얻어맞고 있기는 싫었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아킬레우스가 올 터였다. 해인은 그 꼴만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 도사린 장소에 와 봤자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 기어코 이렇게 흘러간 상황이 억울했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해 봐야 했다.

‘아까 카산드라가 그랬지. 이 왕궁에서 내게 해를 끼치고자 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믿기로 하며 해인은 완전히 복도로 나섰다.

팀블레에서 머물렀던 곳도 왕궁이었으나 트로이의 왕궁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넓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복도의 창문으로 내다보자, 아까 전 방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풍경이 보였다. 멀리 성벽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성벽…….”

작게 중얼거리며 해인은 왕궁과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꽤 멀었다. 만에 하나 왕궁에서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한들, 성벽까지 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성벽을 지나는 것, 나가서 연합군 진영에 닿는 것 모두 문제였다. 하다못해 진영에 닿아도 그 진영이 누구의 진영인지까지조차 도박이었다.

아킬레우스를 제외하면 해인이 연합군에서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셋뿐인데, 그중 하나는 아가멤논이었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탓이다.

“으.”

해인은 짜증스레 탄식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은 멀리까지 내다볼 필요가 없지.’

당장은 일단 움직여서 무엇이라도 해 보는 게 옳았다. 가능성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속으로 고개를 저은 해인이 작게 한숨을 내쉰 찰나였다.

“혼자 나가 보시려고요? 어려우실 텐데요.”

등 뒤로부터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던 와중에, 정확히 속내를 찌르는 말에 해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무슨, 누구…….”

말을 살짝 더듬으며 해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상대가 완전히 시야에 들어온 순간,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해인에게 말을 건넨 이는 누가 봐도 놀랄 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등불의 일렁이는 불빛에 비치는 얼굴선이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었는데, 그조차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빛내는 하나의 장식 같았다.

“왕궁을 나가기도 어렵겠지만, 나간다 한들 저 성벽을 넘을 수는 없을 거예요.”

찰나에 말문이 막힌 해인과 똑바로 눈을 마주한 상대가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잖아요, 이 트로이의 성벽, 누가 지은 것인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해인이 당연히 알 것이라는 태도였다. 그러나 정작 해인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트로이의 성벽을 누가 지었는지?’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해인은 저 말의 내용과 맥락이 맞는 이야기를 하나 떠올려 냈다.

‘아버지와 아폴론 님이 제우스 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그 벌로 어느 왕에게 보내져 그를 위해 성벽을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실제였나? 그게 트로이?’

그리 좋은 내용도 아닌 만큼 한번 읽고 흘렸던 것이었기에 별달리 반가운 깨달음은 아니었다. 해인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상대가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일부터 시작해 무엇 하나 좋을 게 없는 지금까지의 상황 속에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했던 탓에, 태연히 저 말을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어머.”

그런 해인의 표정을 등불에 비치는 빛으로 확인한 상대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짐짓 놀란 체했다. 그녀는 처음 말을 걸었을 때보다도 더 나긋하게 목소리를 늘여,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실례했네요.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답니다. 저 혼자 너무 친근하게 굴었군요……. 이제까지는 미처 몰랐던 사촌 자매를 본 게 반가워서 그만.”

“……사촌?”

“그래요, 우리는 사촌이죠. 제 이름은 헬레네입니다.”

기억에 있는 이름에 해인이 멈칫했다. 헬레네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당신처럼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남편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제우스 님께서 제 진짜 아버지시지요.”

“아…….”

해인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헬레네라는 이름은 알았으나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당연하게도 잘 몰랐다. 그저 십 년 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이 된 여자라고, 단편적인 이야기만 어렴풋이 기억했을 뿐이다. 그녀가 제우스의 자식이라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제우스가 어떤 여자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누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현대에서도 ‘신들의 일화’가 아닌 ‘그런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 볼 만큼의 의지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쪽 이름은 안 알려 주시나요?”

“……해인입니다.”

해인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제우스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해인에게 있어 그가 백부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의 자식이라면 해인과 사촌이 되는 게 맞기는 했다.

다만 첫인상부터 묘하게 어긋났던 데다가,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로 덧붙인 말들이 하나같이 비꼬는 것처럼, 혹은 자학하는 것처럼 들려서 아무렇지 않게 굴기는 어려웠다.

‘더 대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바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더 낭비하는 게 내키지 않던 해인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무작정 상대를 무시하고 자리를 뜰 수도 없어 더 곤란했다. 이 순간 헬레네가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면, 몰래 나온 게 모두 허사가 되는 탓이다.

그런 해인을 빤히 바라보던 헬레네가 마치 알 만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해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요, 해인. 걱정 말아요. 방해는 안 할 테니까. 선물이라기엔 뭐하지만, 이걸 드리죠.”

그 말과 함께 건네진 건 등불이었다. 해인의 손을 끌어와 등불의 손잡이를 쥐여 주고서야 헬레네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걸 왜…….”

“사방이 어두우니 걷다가 발이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정 어둠에 숨어서 다니고 싶으시거든, 저와 헤어지고 나서 어디든 버리시던가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리고……. 오히려 들고 다니는 게 나을 수도 있지요. 누군가를 마주치거든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나왔다고 둘러대면 되니까요. 제가 자주 그러니 의심받지도 않을 거예요.”

손에 쥔 등불의 손잡이가 따뜻했다. 타오르는 불씨를 힐끗 내려다본 해인은 의아한 눈으로 헬레네를 응시했다.

‘내가 싫은 거 아니었나.’

나긋한 말투와 예쁜 단어를 쓴다고 해서 기저에 깔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헬레네는 해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게 명백했다. 그러니 자리를 뜨기 직전 갑작스레 건네진 도움에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헬레네와 해인은 키가 거의 비슷했기에 서로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볼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표정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까지와 달리 미소 한 점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렸다.

“내 말 잘 기억해요. 남 일 같지 않아 하는 이야기예요.”

그것을 끝으로 헬레네는 살며시 해인의 어깨를 밀고는, 정작 자신이 먼저 등을 돌려서 복도를 걸어갔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는 점차 멀어지다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꼿꼿한 등을 바라보던 해인은 손에 들린 등불에 다시금 시선을 주었다.

‘……잠이 오지 않아 나왔다며 둘러대라고.’

듣고 보니 확실히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되지도 않게 몰래 돌아다니며 왕궁을 나가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야, 짐짓 당당하게 나서 길을 제대로 파악하고, 켕기는 건 아무것도 없는 척하며 상황을 살펴 나가는 게 더 확실한 길일 것 같기는 했다.

‘이것도……. 비상시에는 어떤 방향으로든 쓸모가 있겠지. 불이니까 위험하긴 하겠지만. 필요 없어지면 그때 버리자.’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해인은 주변을 새삼스레 살폈다.

잠이 오지 않아 나왔다던 헬레네는 등불을 해인에게 줘 버렸으니 아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헬레네의 사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머무르는 곳이 왕궁의 바깥과 가까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해인은 헬레네가 갔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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