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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0)화 (120/149)

예의를 차려 길게 말했지만, 결국 자신은 트로이의 공주라는 뜻이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해인에게 있어 별달리 놀라운 일까지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해인을 멈칫하게 만든 건 다른 것이다.

바로 방금 전, 카산드라가 ‘이곳’이라는 단어를 마치 일부러 강조하듯 사용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강조로부터 한 가지 추측되는 것이 있었다. 해인은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여기는.”

“예, 트로이의 왕궁입니다.”

“트로이…….”

반갑지 않은 확신을 얻은 해인의 낯이 금세 창백해졌다. 뒤이어 표정으로 드러나는 경계심에 카산드라는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저를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을 해할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당신에게 감사한 마음이라면 있겠군요.”

“감사라고요?”

“제가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뜬금없다 싶은 감사함의 토로에 이어, 그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기에 해인은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그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더하지 않고서 주제를 슬쩍 바꿨다.

“그렇게만 알아 두셔도 됩니다. 당신에겐 의외겠지만, 저는 물론이고 이 성안의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할 뿐 해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으니까요.”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이상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해인은 지금 눈앞의 카산드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느꼈다. 무언가 다른 수작을 부리려면 진작 시도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저 침대 곁에 차분히 앉아 해인에게 상황이나 설명해 주고 있는 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해인은 카산드라를 통해 제대로 된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그럼 저는 왜 여기서 눈을 떴나요?”

카산드라는 해인이 정보를 얻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바로 답해 왔다.

“아레스 님의 두 아드님이신 포보스 님과 데이모스 님께서……. 이번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며, 당신을 납치해 오셨습니다.”

“……아레스 님의?”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 탓에 해인은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 혹시 기억나시나요?”

카산드라가 질문해 왔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순순히 기억을 되짚었고, 그러자마자 어렵지 않게 금색 눈동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신의 눈이기는 했지.’

해인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쪽은 신이고 해인은 한낱 반신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사촌의 자식들에게 전쟁의 승리라는 가당찮은 이유로 납치당해 트로이 왕궁에서 눈을 뜬 상황이 황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해인이 납치 때의 정황을 떠올린 것 같자, 카산드라가 조용히 설명을 이었다.

“그분들께서 말하길 당신은 연합군의 가장 뛰어난 장수인 아킬레우스의 연인이니, 당신을 빼앗으면 그를 무너트리기가 쉬워질 것이라 여겨 납치해 왔다 하셨습니다. 다만 포세이돈 님께서 당신께 신경을 많이 쓰시다 보니, 아킬레우스가 쉽게 찾을 수 없고 포세이돈 님께서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장소는 트로이 왕궁뿐이라 생각하셨다더군요.”

“무슨…….”

“당신을 두려워할 뿐 해칠 생각이라고는 없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포세이돈 님을 주의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절대 빼앗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가신 탓에, 당신이 포세이돈 님의 딸인 것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설명을 모두 들은 해인은 한참의 침묵 끝에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해인으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부고부터 시작해 본인은 납치나 당하고, 눈을 떠 보니 트로이 왕궁에 버려져 있다.

‘……이걸 알아채면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겠지.’

도움은 되지 못할지언정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영락없이 방해물이었다.

‘얼마 전에 했던 생각은 정말 낙관이었구나.’

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크로노스 님이 말했던 바뀌지 않는 운명……. 이런 거였어.’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는 결국 전장으로 돌아와, 전장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바뀌지 않는 것은 그쪽이었다. 아득하게 차오르는 두려움과 함께 연달아 닥쳐오는 믿기 싫은 사건들은 해인을 묘하게 현실과 유리시켰다.

그러나 오랫동안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던 카산드라가, 불쑥 말을 꺼낸 탓이다.

“……아킬레우스의 부관이었으니 당신과도 친분이 있었겠지요. 파트로클로스 장군의 일은 유감입니다.”

파트로클로스. 그 이름에 해인은 찬물이라도 맞은 기분으로 카산드라를 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멍하니 말을 내뱉고 나서야 해인은 그것이 어리석은 의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말마따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부관이었으니, 트로이 측이라고 해서 그의 죽음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카산드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요. 파트로클로스 장군은 트로이의 왕세자인 헥토르의 손에 죽었습니다.”

“헥토르라고요.”

“……모르셨군요. 그는 제 오라비이니, 그로부터 전해 들은 것도 조금 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성벽 앞까지 다가와 있기에 그인 줄로만 알았다더군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고도 했었습니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해인은 전혀 모르고만 있던 것들이다. 정작 파트로클로스와 가깝게 지내던 해인이 모르던 것을 적국의 공주인 카산드라는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성벽 근처로는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전장에 몰입하게 되면 이성적일 때 했던 약속은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더군요.”

“하지만……. 조심하겠다고, 분명.”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해인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 지난 약속을 떠들어 봤자 소용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 주변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경험이 전무했던 탓에,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야말로 해인이 처음 겪은 지인의 영원한 상실이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산드라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인의 손등을 덮어 왔다. 해인이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그것을 손을 빼려는 행동으로 해석한 듯 손등을 덮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당신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충격을 받을까 봐 그리했겠지요. 섣불리 말을 꺼내 당신 연인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 허사로 만들었군요. 하지만 제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고만 있는 게 좋았던 적은 드물었으니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아예 양손을 써서 해인의 손을 잡아끌고는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기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위로하는 게 오히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음은 압니다. 하지만 전장에 나서는 자들 뒤에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다들 비슷하지요.”

해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려 카산드라의 얼굴을 다시 마주 보았다. 입꼬리를 올리고는 있지만,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슬퍼 보이는 기묘한 얼굴이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도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여럿 죽었습니다. 제 오라비도 이번엔 살아 돌아왔으나 앞으로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지요. 전쟁은 결국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인데, 그 가운데 같은 고통을 가져 본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위로가 분명 있지 않겠어요?”

“위로라고요…….”

해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실 카산드라의 말과는 달리, 해인은 그녀의 위로에 기분이 상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때까지도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탓이다. 심지어는 반쯤 외면하고 있던 수준이었다.

그 탓에 카산드라의 말은 기분의 문제를 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했다. 실감되지 않았던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카산드라의 말을 통해 점점 그 실체를 갖춰 간 것이다.

“……정말로 죽었구나.”

속삭이듯 혼잣말을 꺼낸 순간 확실해졌다.

시야가 일렁이는 듯싶더니, 의식하지도 못한 새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멈칫하며 해인은 제 뺨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물기가 묻어 나왔다. 그것을 확인하는 와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러자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 카산드라가 어딘가에서 깨끗한 천을 가져와 아무런 말 없이 그것을 해인의 뺨에 대어 주었다.

“조심하겠다면서요…….”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도 대답을 돌려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천이 거의 다 젖을 때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그동안 내내 침묵을 지키며 해인의 곁에 있다가, 한참 후 지쳐서 가물거리는 해인을 반쯤 억지로 눕히고는 눈을 감겨 주었다.

심력을 크게 소모한 이상 본인이 바라지 않더라도 눈을 감겨 버리면 결국에는 잠들게 된다. 해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새로 천을 가져와 젖은 눈가를 마지막으로 가볍게 눌러 준 카산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하늘은 어느 사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 카산드라는 오늘따라 유독 그 하늘이 검은 늪처럼 느껴져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가까운 미래가 문득 눈앞을 스쳤다.

“날이 밝으면…….”

한숨처럼 읊조린 말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슬픔은 고통이 되어 더 선명하게 가슴을 찔러 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아픔이었다.

카산드라는 천을 내려 창가를 덮었다.

***

해인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잠들기 전까지의 상황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으므로 당황스러운 기분은 찰나에 흩어졌다. 둘러본 사방은 어둠에 깊이 잠겨 있었지만, 멀찍이 창문으로 보이는 곳에 내려진 천 틈 사이로 한 줄기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 대략적인 윤곽은 알아볼 만했다.

반나절은 진작에 지난 듯, 그렇게 울어 댔음에도 눈가는 평소와 같이 멀쩡했다.

“……음.”

괜히 손등으로 눈을 몇 번 문지른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천을 걷어 내자 밤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깊은 밤이되 새벽이 되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대인 모양이었다. 해인이 있는 방은 이 층쯤 되는 듯했고, 아래로 보이는 것은 트로이 왕궁의 정원 같았다.

창틀에 손을 얹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정원을 내려다보던 해인은 이내 깊이 한숨을 내뱉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이제는 받아들일 만했다. 슬픈 것은 여전했으나 한참 울고 난 이후여서인지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지.”

해인은 짧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떨쳐 내듯 창가로부터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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