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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9)화 (119/149)

다행히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식이 알려진 임시 진영은 전부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슬픔이 고여 있는 곳은 공기부터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바닷가 근처, 막사가 세워져 있지 않은 넓은 공터에서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그의 다른 부관들과 병사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애초에 저 사이로 자연스럽게 파고들 수도 없는 위치이기는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끼어들기 죄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져온 것 역시 급한 사안인 것은 분명했으므로, 브리세이스는 심호흡한 뒤 달려가 무릎부터 꿇었다.

“큰일 났습니다! 부디 말을 들어 주세요!”

다급함이 통한 것인지, 아니면 브리세이스의 얼굴을 기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경을 끌어오는 것은 성공한 게 분명했다. 형용할 수 없는 낯을 하고는 생명을 잃은 친우의 껍데기를 바라보던 지휘관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너는…….”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급히 고개를 숙인 브리세이스는 틈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납치당하셨습니다!”

그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자리의 모두가 새 소식을 받아들이는 데 평소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탓이다. 정적의 끝에 아킬레우스가 짧게 물었다.

“……뭐?”

“어, 어느 신이신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분이셨는데, 제가 먼발치에 있어서인지 신들께서 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신 듯하여 어디로 향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트로이입니다. 아가씨를 트로이로 데려가는 것을 분명 보았습니다.”

악재 위로 또 겹친 악재였다. 저도 모르게 주변의 몇몇이 침음하거나 탄식을 내뱉었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섰다.

그리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작 그 잠깐의 틈에, 심지어 바다 근처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친우를 잃은 슬픔 위로 온갖 혼잡한 감정이 얹혔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 혹은 사건을 벌인 주범을 향한 분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갈무리하기 어려워 그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갑작스레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에 놀랄 틈도 없이, 등 뒤의 바다로부터 파도를 가르며 익숙한 얼굴의 신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기척에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기척의 주인이 포세이돈임을 확인하자, 깊이 숨을 내쉬며 우선은 그가 완전히 육지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금세 모래사장에 발을 내디딘 포세이돈은 뜻밖에도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속내를 완전히 짐작하기 어려운 눈길로 아킬레우스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나눴던 거래는 그대로다. 그 미친놈들이 아주 돌아 버리지만 않았다면 감히 내 자식을 함부로 대할 리는 없으니, 아직 별일은 없을 터.”

포세이돈은 일을 벌인 자가 누구인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신들은 인간들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이번 일에 있어 선을 넘은 건 그놈들이지만, 그렇다 해도 나마저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겠지.”

신들이 손을 대는 순간 인간들의 운명이 크게 바뀔지도 모른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무엇보다 이 전쟁에 자식이 엮여 있는 건 포세이돈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상대가 먼저 선을 넘었다 한들, 신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지위가 높은 포세이돈이 자식을 구하겠다며 끼어드는 건 다른 신들에게도 전쟁에 개입할 여지를 주는 것과 같았다.

다른 신들이라고 전쟁에 엮인 자식이 없는 게 아니다.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깨지는 순간, 신들은 저마다 자식의 뒤를 봐주거나, 혹은 봐주는 척하며 제 입맛대로 이 전쟁을 끌고 가려 수를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운명의 실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엉키게 된다.

포세이돈과 테티스가 아가멤논을 단숨에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기준에 있어 사소한 괴롭힘이나 행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새삼스럽게도 번거로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포세이돈은 말을 이었다.

“기회를 줄 테니……. 네가 대신 가 구해 오거라.”

그리 이성적이지 않은 머릿속이었지만 상대의 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딱 한 가지만을 물었다.

“그래서 어디입니까?”

“트로이의 왕궁.”

대답과 함께 포세이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몇 달 전 처음 아킬레우스와 거래를 했을 때, 그는 분명 아킬레우스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 며칠간 부족한 것 없는 놈이 제 딸에게 목매는 꼴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포세이돈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도 모르게 아킬레우스를 조금 인정하고 말았다.

그랬다. 해인은 들키지 않으려 했었지만, 바닷가 근처에서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첫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난 이후 다소 안일해진 해인이 부주의하게 굴기도 한 탓에, 포세이돈이 해인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특정한 기류를 눈치채는 것은 별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 처신하겠다더니 이게 잘한 거냐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달려가 떼어 놓기에는 보기에 나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돌아다니던 놈이 멀쩡하다 못해 수려한 낯으로 웃고 지내는 모습을 보자 자연히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며칠만 저대로 내버려 두고 생각해 보려 했는데, 그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건 포세이돈으로서도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그의 영역인 바닷가 근처에서 자식이 납치당하는데, 그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건 분명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 구경을 하고 있었다지만, 그렇더라도 누굴 타박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눈앞에 있는 반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소를 들은 반신의 물빛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슬픔과 분노는 주변의 모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 본인마저 태울 듯 뜨거웠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두며, 그는 한발 늦게 바다에서 뛰어나오는 테티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킬레우스!”

“……어머니.”

포세이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앞에 선 테티스는 곧바로 자식의 팔을 붙잡았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던 그녀는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마주하자 멈칫했다.

“너…….”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는 원래 하려던 것과 다른 말을 꺼내고 말았다.

“……헤파이토스에게 새 갑옷을 부탁해 두마. 완성되는 동안 병사들을 준비시켜 두어라.”

사실 테티스는 기껏 전장에서 이탈한 자식을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마주하자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설득될 리 없었다.

이제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테티스가 어떻게 말려도 아킬레우스는 사지로 뛰쳐나갈 것이다.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며 그녀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하나만 부탁하마, 아들아. 그 아이를 구하면 곧바로 다시 돌아오렴. 그러고 나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귀환해서 돌아가는 거야.”

아킬레우스는 테티스의 팔이 떨어져 나간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내리듯 문질렀다. 손 틈으로 얼핏 보이는 눈이 여전히 형형했다. 불안하게 그 눈빛과 시선을 마주하는 테티스에게, 아킬레우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써 답을 돌려주었다.

“……그러겠습니다.”

대장간의 신이 테티스의 부탁을 받고 새 갑옷을 만들어 내는 데는 정확히 하루가 걸렸다.

하루 뒤,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왔다.

***

해인은 눈을 떴다.

흐렸다가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로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이런 생각을 또 하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임에도 기분이 가라앉아서인지, 빈정거리는 듯한 감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몸 상태는 멀쩡했기에 해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의가 아닌 상태로 몸이 낯선 장소에 이동되어 있는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천장도 없는 흙바닥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괜스레 눈가를 문지르며 주변을 돌아보려던 찰나였다.

“깨어나셨군요.”

해인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온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해인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는 상대는 해인이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의 여성이었다.

또렷하게 빚어진 이목구비가 우아했고, 그 가운데 선명하고 올곧은 눈빛이 특히 눈에 띄었다. 감출 수 없는 지성이 눈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날 때부터 귀하게 난 것 같은 태도가 더해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직전까지의 상황이 상황이었던 탓에 별수 없이 예민하게 반응하려던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풀 꺾여 숨을 가다듬었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자 상대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양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까지 했다.

안심할 수 있는 태도이기는 했다. 그러나 해인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누구세요?”

“아.”

상대는 미안하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실례했군요. 제 이름은 카산드라입니다.”

해인은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들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분명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름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카산드라는 높은 확률로 현대까지도 나름대로 유명한 이름 중 하나일 것이다. 해인은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에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소용없어졌다.

미소를 지워 낸 카산드라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용히 자신의 신분을 밝힌 탓이다.

“……이곳,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께서 제 아버지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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