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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8)화 (118/149)

***

해가 지고 하늘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었을 때, 연합군 측으로부터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를 만나 보고 오겠다며 막사를 나섰던 아킬레우스는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임시 진영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지옥처럼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막사 바깥에 나와 점차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인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는 가라앉은 속삭임을 감지했다. 영문은 몰랐으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사정을 알아보기에는, 아킬레우스나 리노스, 텔라몬, 브리세이스처럼 해인이 마음 편히 말을 걸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분위기마저 좋지 않았던 탓에 차마 진영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행동을 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라도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고민하며 해인이 막사 앞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익숙한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리노스였다.

“아가씨.”

애초에 해인을 만나러 왔던 듯 그는 해인의 바로 앞에 멈춰 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해인은 그 목소리에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리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만은 잘 보였다. 한바탕 오열하기라도 한 듯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리노스 님.”

그 얼굴을 보자 문득 아침쯤 느꼈던 듯한 불길함이 뇌리를 스쳤다.

“전해 드릴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지금 정신이 없으셔서…….”

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때로 나쁜 소식은 직접 듣기 전에도 그 내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될 때가 있다. 리노스는 힘겹게 입을 열어 문장을 만들어 냈다.

“파트로클로스 님이……. 전사하셨습니다.”

전사(戰死).

짧은 발음이었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단어였다.

둘의 사이로 심해와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해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전사라는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아는 단어지만, 그것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 앞에 붙는 이름이 파트로클로스라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사라고요.”

리노스가 참담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가로 다시 눈물이 고이는 게 선명했다. 그 광경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해인은 입을 달싹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제가 볼 수는.”

“……보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 조금 수습이 되고 나서, 장례 때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지금은…….”

리노스가 말끝을 흐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해인은 리노스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사실로부터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마저 깨닫고 말았다.

“아…….”

다른 문제였더라면 그래도 확인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을 법도 했다. 당장 암살자 일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해인은 어떻게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어 했고, 주변에서 정보를 듣고자 애썼었다. 그러나 이 일에서는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것인지, 혹은 두려운 것인지, 해인 스스로도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아가씨, 막사에 계십시오. 저는 장례 준비를, 해야 해서…….”

“……네, 네.”

“그분은 좋은 분이셨으니 엘리시온에 가셨겠지요.”

재차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말한 리노스는 해인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등을 보다가, 해인은 무릎 위에 얹어 놓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엔가 체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천 너머로도 서늘한 체온이 다리에 닿았다.

해인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가지 말라고 말이라도 한 번 더 해 볼걸 그랬나.’

문득 떠오른 후회가 마음을 채웠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이후 해인이 내내 걱정했던 것은 아킬레우스의 죽음뿐이었으나, 되짚어 보면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죽음과 가까이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 한숨과 함께 회한이 새어 나왔다.

분명 슬펐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믿기지 않아서, 혹은 그 죽음이 도저히 실감 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아가씨.”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자, 아까 리노스가 있던 자리에 처음 보는 얼굴의 병사 한 명이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생김새 모두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 없이 평범했지만, 해인은 직감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실례지만 무엇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병사들은 애초에 해인에게 지금처럼 말을 잘 걸지 않았다. 지휘관을 비롯한 윗사람들이 하도 포세이돈의 이름을 언급해 가며 겁을 준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병사에게서는 그런 보통의 병사들이 보이던 태도와 어딘지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문득 뒷목이 서늘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느껴 본 것만 같은 긴장감이었다.

“……어떤 걸요?”

“다름이 아니라…….”

일부러 말을 끄는 듯 말꼬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뒤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온 또 다른 이의 손이 비명 지를 것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듯 입을 막았다.

“으……!”

“조용히. 우리도 굳이 약한 자를 나서서 괴롭히고 싶지는 않으니, 소리치지 않으면 험하게 대우하지 않겠네.”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 사람인 이상 겁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해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러나 등 뒤의 이는 그것을 수긍으로 여긴 듯, 정말로 손에서 조금 더 힘을 뺐다.

뒤이어 그때까지도 내내 앞에서 해인을 마주 보고 있던 병사의 얼굴이 마치 연기처럼 일렁이더니, 조금씩 얼굴의 선이 바뀌었다. 평범하던 키나 체격도 점점 커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기이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그것이 신의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시야를 덮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

브리세이스는 해인의 상태를 살피러 막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전사 소식이 임시 진영 전체에 전해졌고, 지휘관은 그의 장례를 준비해야 해서 바쁜 나머지, 해인은 혼자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 탓이다.

파트로클로스는 브리세이스도 몇 번인가 지나가며 만난 적이 있었다. 짧은 만남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기에 죽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웠으나, 그렇다고 깊이 슬픔에 잠겨 있을 만큼의 친분은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다를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자신의 편의를 봐주고자 하던 사람이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파트로클로스와 마찬가지로 해인 역시 근본적으로 선인이었으니, 그런 이가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위로 정도를 건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죽어 없어지는 슬픔은 그녀도 이미 몇 번인가 겪어 보았으므로, 불행한 운명과는 별개로 약간의 동질감도 조금쯤 느껴졌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막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막사 앞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해인이 보였다. 멀리서 보더라도 꽤 상심한 티가 나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찰나에, 브리세이스는 무언가 기이한 것을 목격했다.

해인의 앞뒤로 안개 같은 것이 벽처럼 섰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다가, 해인을 감싸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흩어졌다. 그뿐이라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가씨?”

해인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브리세이스는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춰 세우며 몸을 긴장시켰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해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스쳐 지나가는 가능성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녀는 허공에 뜬 채 멀어지는 전차 한 대를 발견하고 말았다.

“헉…….”

브리세이스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전차에 올라 있는 것은 거대한 체격의 남성 두 명이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전차는 빠르게 멀어졌기에 제대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브리세이스는 그 두 명 중 한 명이 해인처럼 보이는 이를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을 벼락같이 알아차렸다.

길게 흩날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덕분이었다.

‘……저쪽은 트로이 방향이야.’

짧은 순간 전차는 이미 점처럼 보일 만큼 멀리 가 있었다. 브리세이스는 망연히 길 한가운데 선 채로 전차가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숨이 가빠 왔다. 이 납치 사태의 유일한 목격자는 본인뿐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사방에는 그녀를 제외하면 사람이 몇 없었고, 그 몇 없는 사람들조차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느라 해인이 있는 방향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가씨를 어째서 저기로 데려가지? 신의 뜻인가? 하지만 아가씨께는 좋은 일이 아닐 텐데…….’

느리게 굴러가는 머릿속으로나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유일하게 상황을 본 사람으로서 이것은 아킬레우스에게 알려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판단을 내리고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걸 알리면 신의 분노를 살까?’

트로이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다.

해인을 트로이로 납치한 게 어느 신일지는 한낱 인간으로서 브리세이스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이 그 계획을 망가트린다면, 신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지도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많은 고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해인을 생각하면 당장 지휘관의 앞으로 달려가야 할 일이겠으나, 동시에 못 본 척하고 스스로의 안전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쯤은.”

브리세이스가 곁에서 모시는 이가 해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에 비해 처지가 얼마나 나빴을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편의를 봐주려 애쓰던 사람이었으니, 자신도 한 번쯤은 그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 게 옳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쳐든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브리세이스는 점점 더 빠르게 달려 아킬레우스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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