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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7)화 (117/149)

***

아침부터 파트로클로스가 크게 사건을 벌이고 간 탓인지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해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스스로를 점검했다.

‘……전장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가깝게 여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 발로 전쟁터에 걸어 들어갔으니 심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해인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킬레우스를 보았다. 그녀가 이럴 정도라면, 사실 아킬레우스야말로 훨씬 더 기분이 복잡할 것이다.

해인은 아까 전 막사 안에서 들었던 둘의 대화를 상기해 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고, 인간은 쉽게 죽어. 너처럼 상처 입지 않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파트로클로스. 그 쉽게 죽는 사람에 너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나?

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쉽게 죽고, 그 쉽게 죽는 인간에는 파트로클로스도 포함됐다.

해인은 문득 자신이 현대에서는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킬레우스에 대해서는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 개나마 아는 이야기가 있어서, 아는 것과 실제를 비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일 뿐이고, 찾아보면 최소한 이름쯤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의미 없는 일이다. 닥쳐온 건 실제 상황이었다.

정보를 찾는 게 쉬운 환경에 있을 때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지만, 사실 그 후회조차도 의미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약간 우울해진 해인이 테이블 위로 엎드리자, 맞은편에 있던 아킬레우스가 손을 뻗어 왔다. 커다란 손은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서 뒤로 넘겨주었다.

힐끗 눈을 올려 바라본 얼굴은 과연 해인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이유로 인해 복잡한 듯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동작에서만큼은 다정함이 묻어 나왔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불쑥 입을 열었다. 반쯤은 충동적인 기분에서였다.

“예전에…….”

“응.”

대답은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돌아왔다. 오히려 해인이 말을 잇기까지 잠깐 머뭇거렸다.

“……제가 말한 적이 있었잖아요. 저는 예언 능력은 없어서, 앞일을 알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고. 기억나세요?”

막 테베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다. 해인은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예언에 대해서도 지나가듯 언급했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 자신에게 앞일을 알려 달라는 이야기라도 할까 봐 미리 예방 차원에서 꺼낸 말이었다.

물론 이제는 누구든 해인에게 그런 말을 걸 만한 사람은 없음을 안다. 당장 가장 가까이 머무르는 아킬레우스는 애초에 예언을 전혀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려 드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그런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곳의 모든 게 낯설 때였다.

“물론 기억해. 그랬었지.”

아킬레우스는 턱을 괴며 답했다. 되짚어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어쩐지 아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반응을 확인한 해인은 천천히 상체를 세워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숨겨 왔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 우스운 건, 이 전쟁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보려 애썼던 적이 없어서 할 말도 없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냐면……. 당신의 이름은 알았었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은 사실 여기서 처음 들었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예언과 예언이 아닌 말 사이의 선을 타는 발언이었다. 아킬레우스가 작게 웃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알았다면 섭섭해하겠는데.”

“저도 유감스럽네요…….”

옅게나마 같이 웃은 해인은 현대에서의 자신을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되짚었다.

“제가 관심 있던 건 아버지에 대한 것, 그리고 그분과 같은 존재인 신들에 대해서였어요. 정작 저도 인간이면서 이런 인간들의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랬던 게 조금 후회가 되네요. 차라리 알았더라면 덜 불안했을 것 같아서.”

작은 목소리로 느리게 이어지던 말은 점점 그 소리를 줄여 갔다. 끝에 덧붙여진 건 거의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파트로클로스가 크게 다치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어떡하죠…….”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느라 내용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 한마디였다. 털어놓을 사람이 눈앞에 있다 보니 다소 두서없이 말이 나온 것이다.

길게 이어지는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듣던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질문을 듣고는 가볍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해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테이블을 짚고 몸을 숙인 그는 해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파트로클로스는 본인이 자신한 대로 그리 부족한 사람은 아니니까. 내뱉은 말 정도는 지키겠지.”

해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아킬레우스가 바라는 점이기도 했다.

함께 전장에 나갈 때와 달리, 파트로클로스를 혼자 전장으로 보내 놓은 지금은 아무래도 그 역시 느끼는 기분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말대로 파트로클로스를 믿었다.

그 믿음에 근거해서, 조금쯤 다쳐 올 수야 있겠지만, 그 외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성벽 근처로는 가지 말라던 조건을 기억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몇몇 전우를 돕고, 간혹 검을 휘둘러 가며 사방을 정리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어느 사이엔가 성벽 근처까지 와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돌아갈 틈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무엇에라도 홀렸던 것 같다. 홀로 날뛰느라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늦게 원인을 생각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트로이의 왕세자인 헥토르가 그를 발견하고 덤벼든 것과 거의 동시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전장에서 이탈했다고 들었는데……!”

“큭…….”

휘둘러지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내며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킬레우스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의 갑옷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적국이라면 누구든 알았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있는 탓인지 상대는 자신이 아킬레우스를 상대하고 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당장 덤벼들 때 ‘전장에서 이탈’ 따위의 말을 운운한 것만 봐도 뻔했다. 난전 속에서 스스로를 미처 소개할 틈을 잡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먼 곳에서 적병들을 겁주는 데 사용하려 했다면 효과적이었겠으나, 지금처럼 어느 사이 성벽 가까이 와 결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실 파트로클로스에게 있어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었다. 어디서도 부족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아킬레우스에 비하면 명백히 부족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처음 몇 합은 그럭저럭 맞받아 칠 수 있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이어질수록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트로이의 왕세자가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자 혼자 십 년 동안 전쟁의 선봉에 서다시피 했었지.’

그는 반신도 아닌 주제에 흡사 신과 같은 무위를 선보였다. 신의 피가 진하게 섞이지 않아도, 간혹 인간들 가운데 빛처럼 등장하는 영웅이 있다면 눈앞의 사람과 같을 것이다. 쉽사리 승산이 보이지 않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시간 끌지 않고 돌아가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 애썼다.

그러나 운명은 헥토르를 파트로클로스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기에는 아깝다고 판단한 듯했다.

강하게 검이 맞부딪친 순간 손목 근육이 경련하며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휘둘러진 상대의 검이 파트로클로스의 손아귀에서 검을 멀리 쳐 냈다.

파트로클로스. 그 쉽게 죽는 사람에 너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나?

서늘한 칼날이 목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그에 대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났다.

나도 그건 알아. 그래서 혼자 가겠다고 한 거야.

그렇게 당당하게 말한 것치고, 막상 칼날이 목을 깊게 베었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알고는 있었더라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죽기 전에 할 생각이라기에는 어지간히도 멋없고 현실적이었다…….

날이 깊게 베고 지나간 목에서부터 피가 쏟아지듯 흘러 옷을 붉게 물들였다. 불에 지진 듯 화끈한 격통이 밀려왔다. 숨이 막혔지만, 그럼에도 공기를 토해 낼 수 없는 탓에 절로 끓는 소리가 났다. 무릎이 꺾이고, 저절로 상체가 숙여지며 투구가 머리에서 굴러떨어졌다.

“……아킬레우스가 아니로군.”

승리감에 취해 성큼 다가온 헥토르가 투구 안의 갈색 머리카락을 확인하고는 금세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그에 대고 어떠한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힘겹게 숨을 내뱉었을 때 멀리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으로 미루어 연합군 같았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이어지던 고통이 한순간 끊겼다.

숨이 멈추는 것과 동시였다.

***

해가 졌을 때, 파트로클로스는 약속대로 제 지휘관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믿음을 지켜 주지는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전차에 싣고 온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짙은 피로에 물든 메넬라오스는 차마 아킬레우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시신만을 지키는 게 내 최선이었소. 유감이오.”

십 년 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았으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이라고 해도 좋을 이때, 트로이의 성벽 앞에서 적국 왕세자의 손에 전사.

십 년 동안 내내 걱정했던 자신의 지휘관보다도 이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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