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11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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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 바랐던 대로, 그날 밤은 아무런 일도 없이 고요했다.
다만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발생했다.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이른 아침이었다. 약속조차 잡지 않고, 다른 누구도 아닌 파트로클로스가 불쑥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찾아왔다. 그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기운 하나 없이, 무엇인지 모를 결심을 단단히 굳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킬레우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바깥으로 나갔다가, 그 표정을 마주하고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 정도였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 이른 시간임에도 찾아왔습니다.”
“……말해 봐.”
거의 비장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존댓말이다. 부관으로서 상관에게 고하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전쟁터에서도 빠져나온 마당에 대체 이런 태도를 보일 만한 일이 뭐가 있나 싶었던 아킬레우스가 떨떠름하게 허락하자, 그는 지체 없이 폭탄을 터트렸다.
“저 혼자만이라도 출전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킬레우스는 대답 없이 미간을 좁혔다. 말 한마디 없었으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시 말해 보라는 듯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금세 주눅 들어 꼬리를 내렸을 만큼 서늘했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적어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므로, 동요하지 않고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저 혼자만이라도 출전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음을 분명히 확인하고는 그만 헛웃음 짓고 말았다.
“무슨…….”
상상 이상의 말이어서인지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 그는 문득 전날 멀어지는 부관의 뒷모습을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얌전히 있는 것 같지만,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사람이니만큼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어서 신경 쓰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곧바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전장을 이탈한 지 이틀 동안 얌전했기에 방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실수였던 것이다. 설마 개인 출전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튀어 나갈 결심을 할 거라고는 아킬레우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헛웃음을 그치고 표정 없이 자신의 부관을 내려다보았다.
“파트로클로스.”
“예.”
“안 돼.”
사족은 듣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요청을 거절한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 잠시만!”
오히려 작전을 바꾼 듯, 딱딱한 낯으로 쓰던 존댓말을 집어치우고는 당장 친우의 모습으로 돌아와 처절하게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부탁이야. 제발! 나 혼자만이라도 잠깐 다녀오게 해 줘!”
옷자락을 붙들린 아킬레우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정신인가?”
“아니니까 이러고 있지. 나 팔 꺾일 각오도 했어.”
퀭한 낯으로 답하는 파트로클로스는 애초에 아킬레우스가 첫 번째 요청을 들어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던 기색이었다. 아킬레우스를 잡아채는 데 성공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옷자락을 놓았다. 그러고는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호소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네가 왜 전장에서 이탈했는지는……. 이해해. 사실 이성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너는 네가 어떤 심정인지를 자세히 설명해 줬고 나는 그걸 납득했으니까. 하지만 너도 알잖아. 전장에 있을 전우들은 우리와 십 년 동안 함께 싸워 온 이들이야. 그들은 모두 인간이고, 인간은 쉽게 죽어. 너처럼 상처 입지 않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파트로클로스. 그 쉽게 죽는 사람에 너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나?”
“나도 그건 알아. 그래서 혼자 가겠다고 한 거야.”
파트로클로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아킬레우스를 마주 보았다.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황인 건 나도 잘 알아. 일을 내가 거의 다 했는데 당연하지. 시간을 끌 생각은 전혀 없어. 잠깐 가서 조금이라도 돕고, 안부라도 확인해 보고 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파트로클로스.”
“무엇보다 네가 말도 안 될 만큼 강한 것뿐이지, 다른 이들에 비하면 나도 그렇게까지 부족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친우를 내려다보며 침묵하던 아킬레우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릴 수 없다.
권위로 찍어 누르면 고민 끝에 항명이라며 뛰쳐나갈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여?”
“나는……. 그래, 신경이 쓰여.”
파트로클로스는 십 년 전 에게해를 건너 전쟁이 시작된 아나톨리아에 발을 내디딘 이후, 아킬레우스를 지휘관으로 모시게 된 순간부터 자진하여 깍듯하게 예의를 차릴 만큼 아킬레우스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진지하게 굴었다. 지금처럼 공적인 일에 친우로서의 자격을 끌어들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탓에 아킬레우스도 이 말도 안 되는 요청을 차마 아까처럼 잘라 낼 수 없었다. 거기에 방금 전 느꼈던 직감까지 더해진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잠시 기다려.”
파트로클로스를 세워 두고 아킬레우스는 막사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사이 깨어 있던 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시끄러워서 깼나?”
“괜찮아요.”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라면 깨어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으나, 바깥에서 절절하게 호소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목소리는 충분히 잠을 깨울 만한 크기였다. 심지어 막사 바로 앞에서 대화가 이어졌으므로, 해인은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둘의 대화를 들으며 세수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였다. 해인은 테이블에 앉은 채로 물었다.
“부탁을 들어주려고요?”
“그러지 않으면 말없이 도망칠 기세라……. 어쩔 수 없을 것 같군.”
“어제도 걱정이 많은 목소리기는 했었죠.”
“그래, 그대가 그렇게 말했었지.”
가까이 다가와 해인의 뺨을 괜히 한번 감싸듯 쓰다듬고 지나간 그는 막사의 구석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입고 있던 갑옷이다. 그의 동선을 가만히 지켜보던 해인은 이내 아킬레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상자를 열었는지 깨닫고는 먼저 물었다.
“그걸 파트로클로스가 입게 할 생각이면……. 그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까요?”
“음, 내가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대가 괜찮다면.”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난 해인은 곧장 막사의 문으로 향해 천을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해인을 보고는 멈칫했다가, 어색하게 여상한 표정을 꾸며 내어 아는 척을 해 왔다.
“아가씨.”
아킬레우스가 허락 대신 기다리라는 말만 남겨 놓고 들어가 버려서인지, 감추려고 애는 쓰고 있어도 초조한 기색이 어렴풋이 엿보였다. 해인은 파트로클로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요.”
“그, 예. 그런데…….”
“받아 가셔야 할 게 있는 것 같아요. 들어와 달라고 하네요.”
“예?”
당황한 듯 되묻던 그는 이내 해인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해인은 천을 잡은 채로 파트로클로스가 들어올 수 있게 몸을 살짝 틀었다. 그는 급히 목례하며 막사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새 갑옷을 전부 꺼내 놓은 아킬레우스가 팔짱을 낀 채 비딱한 시선으로 파트로클로스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
“뭔데?”
“이걸 입고 가. 그럼 적병들은 널 나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걸 이용해서 겁만 주고 돌아와.”
“……그.”
“더 있어. 성벽 근처로는 절대 갈 생각도 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아군의 안위를 확인하면 그걸로 끝내는 거야. 기간은 오늘까지. 해가 지면 돌아오도록 해.”
“엄격하군.”
파트로클로스가 쓰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허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 아킬레우스가 언급한 모든 조건들에 대해 빠르게 수긍했다.
“시간 끌지 않겠다고 한 건 나였으니 지켜야지.”
아킬레우스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입고 있던 옷 바로 위로 갑옷을 걸쳤다. 아킬레우스는 갑옷까지 내어 주면서도 못마땅한 기분은 여전한 듯 입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서도 능숙하게 끈을 조였다. 마음이 급한지 몇 번인가 헛손질을 하면서도 속도가 빨랐다.
해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투구를 파트로클로스의 손이 닿는 곳에 가볍게 밀어 놓았다. 파트로클로스는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네…….”
전장에 나가겠다며 무장을 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해인은 어쩔 수 없이 파트로클로스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가 가장 소중한 건 사실이지만, 해인은 파트로클로스에게도 충분히 많은 정이 들었다. 항상 많은 신경을 기울여 주던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걱정스러운 마음 탓인지, 근거 없는 불길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제 와서 꼭 가야겠냐고 묻는 건 의미 없겠지. 무엇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킬레우스의 이탈은 나 때문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을 테고…….’
해인은 복잡한 기분으로 파트로클로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때마침 막 무장을 끝낸 파트로클로스가 고개를 들다가 그런 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도 눈치는 좋은 편이었기에, 그는 짧은 찰나에도 어렵지 않게 상대의 표정에서부터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은 반사적으로 아킬레우스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왜.”
“아무것도.”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상관이자 친우를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어색하게 웃고는 그에게서 눈을 뗐다. 그리고 잠깐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해인을 돌아보았다.
“그, 아가씨. 저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직전까지 하던 생각이 있던 만큼, 해인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킬레우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파트로클로스는 새삼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덧붙여 말했다.
“아킬레우스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어디서 부족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까 같은 조건들도 달려 있는 마당이니,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요.”
마치 온화한 손위 형제 같은 말투였다. 신뢰를 주기 어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어,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걱정이 과한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해인은 마지못해 천천히 답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