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5)화 (11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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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전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령을 통해 그 소식을 전달한 이는 총사령관의 친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였다.

정작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전날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통해 건넨 사과를 거절당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았으나, 연합군 소속의 다른 장군들은 더 이상 총사령관의 등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말았다.

어제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보냈던 것과 같이, 이미 전장을 이탈한 지 이틀째인 아킬레우스에게 굳이 전령까지 보내 가며 전황을 알려 주는 것은 사실상의 도움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로 힘든 상황이니 다시 돌아와 달라고 인정에 대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 연합군의 행동에 대해, 아킬레우스는 전령을 우선 만나 주기는 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떠드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태도로 전령의 이야기를 들어 준 뒤, 정작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그게 아침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난 오후, 이번에는 혈연과 친분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는지 사촌인 아이아스가 또 전령을 보내왔다.

“아킬레우스, 이번에는 아이아스가 보낸 전령이 찾아왔는데…….”

막사 앞으로 찾아온 파트로클로스가 소식을 전했다. 아킬레우스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안 만날 생각이니 그대로 돌려보내. 앞으로도 누구든 마찬가지고.”

애초에 그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연합군 측에서 기대를 걸고 있는 아이아스도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파트로클로스보다 얼굴을 덜 보고 자란 사이다. 가까운 친척으로서 최소한의 친분은 있으나 그게 전부였다. 이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정한 전쟁이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더 이상은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음, 그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태도에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쓰게 웃으며 대답한 그는 별다른 사족 없이 곧바로 뒤돌았다.

아킬레우스는 그런 부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만큼, 대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선 안에 들어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만은 꽤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도 파트로클로스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흠.”

파트로클로스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데다 성격도 사교적이다. 전장에서 이탈하자는 아킬레우스의 결정을 따르기는 했어도, 지난 십 년 동안 함께 전장에서 싸워 온 전우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단호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태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속이 마냥 좋지는 않은 것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전쟁에는 정말 더 이상 한 치의 미련도 없고, 어떠한 관심도 두고 싶지 않다. 그러나 기껏 설득해 놓은 파트로클로스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에 대해서는 아킬레우스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저렇게 얌전히 있는 것 같지만,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막사 안일지라도 천을 걷어 놓았던 탓에, 그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전부 들을 수 있었던 해인은 어딘지 미묘한 기분이 되어 눈을 굴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파트로클로스가 복잡한 마음이라는 건 티가 났다. 어쩐지 그 표정조차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그렇겠지.’

이틀 전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제까지,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에 집중하느라 주변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해인은 자신의 입장에서야 그의 이탈이 잘된 일이지만, 정작 그를 따르던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결정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실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킬레우스에게 더 이상의 참전 의사가 없는 것은 이제 말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확실해진 사실이다. 게다가 파트로클로스는 모르겠지만, 연합군이 지금은 저렇듯 밀리는 것 같아도 완전히 패배할 리는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포세이돈이 괴롭히려는 건 아가멤논이라는 한 개인일 뿐이다. 테티스는 전쟁의 승패는 상관없이 그저 자식을 모욕하려 든 인간을 벌하려는 생각뿐이겠으나, 포세이돈은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를 제외하면 사실 누구보다도 트로이의 멸망을 바라는 신이었다.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걱정하는 부분은 전쟁의 승패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해인을 만났을 때도, 그는 처음 보는 여자일 뿐인 해인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굴던 사람이었다. 그 친절 안에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이제 와서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런 행동을 어색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인지는 증명이 됐다.

그런 사람이니만큼 십 년 동안 함께 싸워 온 사람들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정도는, 대화를 나눠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것이다.

“왜 그래?”

안으로 되돌아온 아킬레우스가 곧장 해인의 표정이 이상함을 알아채고 물어 왔다. 해인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해인?”

“……목소리가 들리길래. 그러고 보니 파트로클로스는 마음이 복잡하겠구나 싶어서요.”

그 답에 아킬레우스가 한숨처럼 웃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아마 그렇겠지. 신경 쓰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

대답과 함께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곁에 앉았다. 옆에 앉은 이의 어깨로 머리를 기대며 해인은 작게 침음했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괜찮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해인의 우선순위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정말 조만간 이 땅을 떠날 예정이었다.

내일, 어쩌면 그다음 날이면, 저 멀리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트로이의 성벽마저 볼 일이 없어질 것이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에게해를 넘어 프티아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쯤 되니 아무리 사서 고민하는 일이 잦은 해인이라도 슬슬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확신이었을지도 모르는 거지.’

주어는 아킬레우스의 죽음이었다.

해인은 자신이 현대에서부터 알고 있던 그에 대한 이야기들과, 이곳에 와 직접 그를 보며 확인하게 된 여러 사실들이 겹치는 바람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마저 사실일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전쟁에 참여한 것, 그가 받았다던 예언, 유일한 약점, 모든 것이 그의 운명을 하나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해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몇천 년씩이나 되는 세월을 거쳐 오며 전해진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다른 것은 직접 확인했더라도,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해인이 확인하지 않은 미지의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그것 하나 정도는 어쩌면 실제와 다르게 전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직은 언어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대부분의 일들이 전해지는 시대였다.

아킬레우스처럼 어딜 봐도 영웅적인 면모가 많은 인물이, 그 죽음만큼은 이 시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영웅에 걸맞지 않다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인 만큼 듣는 이의 흥미를 위해 과장하고 살을 덧붙여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와는 별개로 실제의 아킬레우스는, 그의 유일한 약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일 없이, 정말로 본인의 삶 속 운명을 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게 운명대로인 것일 수도 있지.’

지금까지 내내 전장에서 활약했다 하더라도, 트로이와의 마지막 결전은 극으로 치면 절정 부분과 같았다. 가장 중요한 전장에서 지금처럼 빠져 있으니, 그가 받은 예언인 「전쟁에 나가 영광을 얻으면 단명할 것이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아무런 명예 없이 장수할 것이다.」 가운데 영광을 얻었다는 말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크로노스 님이 말한 운명이 다가온다던 말에 어긋나는 건 아니잖아.’

해인은 손을 뻗어 곁에 앉은 아킬레우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오랜 시간 무기를 잡은 커다란 손은 흉터 하나 없어도 단단하고 무거웠다.

‘크로노스 님이 말했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분은 나랑 관계가 있는 신이지, 아킬레우스의 운명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으시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결국 나는 돌아가게 될 거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어.’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크로노스는 트로이에서 보자고 말했었지만, 해인은 내일모레 프티아로 향하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신은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해인이 있는 장소가 트로이에서 프티아로 바뀐다 해도, 귀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을 워낙 의미심장하게 하시니까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걸지도…….’

그동안 내내 마음이 심란했던 것은, 괜히 아킬레우스가 죽을 것이라고 미리 확신을 하고 있던 바람에 헛고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 확신도 나름 논리적으로 내렸던 거긴 하지만……. 난 신도 아닌데, 혼자 생각한 거 틀릴 수도 있지. 아니, 틀려야지.’

사서 고민하느라 쓸데없이 마음이 심란했던 것이라 해도 이번만큼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해인은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생각에 순간 멈칫했다.

‘……근데 이러다 오늘 밤이나 되어서 갑자기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찾아오시면 어쩌지.’

아킬레우스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해인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손을 내어준 채로 뭘 하나 가만히 지켜보던 아킬레우스가 물었다.

“이번엔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러지?”

“어, 아니요……. 그냥.”

어지간한 것은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주고자 했지만, 이것까지 낱낱이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해인은 오랜만에 대답을 얼버무리며 눈을 내리떴다. 아킬레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으나 시선을 피하고 있던 탓에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별로 중요한 생각은 아니었고…….”

“그럼?”

“음.”

다시 시선을 들자 기다렸단 듯 눈이 마주쳤다. 대답을 듣지 않으면 물러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시선이다. 그것만으로 끝이었다면 모르겠으나, 해인은 그 눈동자 아래로 얼핏 엿보이는 불안감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인 건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해인이 선택한 건 고개를 꺾어 들어 먼저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

상황을 모면하려 드는 것이 분명했으나, 그걸 알면서도 아킬레우스는 밀어내지 않았다. 붙어 오는 몸짓에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뺨을 가만히 감쌌다.

이제는 정말 언제 귀환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해인은 이제 상대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깨달은 이상 그 준비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오늘 밤까지만은 아니길, 이왕이면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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