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4)화 (114/149)

“뭡니까?”

“웬 개가 여기에…….”

오디세우스는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허리를 숙여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도 제법 깨끗한 데다 그리 마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 근처에 와서 애교를 피우는 것을 보니 떠돌이 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근처에 주인이 있을까 싶어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멀리서부터 개를 쫓아 달려오는 듯한 사람이 보였다.

“……어?”

문제라면 그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낯이 익다는 사실이었다.

모래를 밟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는 탓에 얼핏 붉은 갈색처럼 보였지만, 새파란 눈동자만은 어떠한 색의 변화 없이 아주 선명했다.

불과 방금 전까지도 대화 중 몇 번 언급되었던 아킬레우스의 ‘그’ 연인, 해인이었다.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근처까지 거리를 좁힌 해인이 개와 함께 있는 그들을 보며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디세우스는 해인 역시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직감했다.

그사이 개는 자신을 쫓아온 해인을 보고는 다시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그녀에게 되돌아갔다.

오디세우스가 짐작한 대로 해인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를 알아보았다. 곁에 서 있는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묘하게 얼굴이 낯익은 걸로 미루어, 전날 총사령관의 막사에 있을 때 스치듯 본 사람이겠거니 하는 짐작도 어렵잖게 가능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아이아스겠지.’

해인도 진영에 온 방문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처럼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도 몰랐던 탓에, 해인은 오히려 미묘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오디세우스도 마찬가지였으며, 전리품으로 착각했었던 사촌의 연인을 불시에 가까이서 보게 된 아이아스도 다를 바 없었다.

오직 그들 사이의 개 한 마리만 홀로 평화롭고 즐거울 뿐이다.

모두가 말을 잃은 채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새삼스럽게 해인을 살폈다. 아킬레우스의 이탈에는 근본적으로 아가멤논의 과욕이 자리했지만, 동시에 해인이 문제에 엮여 들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이탈로 연합군이 입게 될 피해는 상당할 것으로 예측되는 마당이다 보니, 오디세우스로서는 다소 음습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가 잘못한 건 없는 걸 알지만…….’

그렇더라도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을 어린 여자 한 명이니, 어떻게든 죄책감을 자극해 아킬레우스를 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 표정이 좋지 않은 오디세우스를 보며 해인은 간략히 생각했다.

‘협상은 결렬인가 보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행스러웠다. 아킬레우스에게도 이야기했듯 해인에게 중요한 건 연합군의 승패가 아닌 아킬레우스의 생존 여부였다.

아킬레우스가 전쟁터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뒤따라오는 의문도 커지기는 했지만, 안도감 역시 비례하듯 커졌다.

그래서였다.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찰나에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해진 해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디세우스 님. 그리고 곁의 분도요.”

멈칫한 오디세우스는 금방 감정을 수습하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이런, 고맙게도 이름을 기억해 주고 있었군. 물론 나도 기억하고 있지, 해인. 개가 아주 사교적이고 귀여운데. 그대가 주인인가?”

“아, 아니요. 주인은 파트로클로스예요.”

생각했던 것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태도에 당황한 해인이 어색하게 답했다.

파트로클로스가 본인 막사에서 개 여러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는 건 아킬레우스가 눈앞의 이 방문자들을 만나는 사이 근처를 돌아다니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해인이 개를 싫어하지 않는 듯하자, 파트로클로스가 원한다면 같이 놀아도 된다며 데리고 있던 자신의 개들 중 가장 순한 녀석을 골라 준 것이었다.

“아, 그가 주인이었군. 이름은 뭐라던가?”

“스테파노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얌전히 해인의 곁에 앉아 있던 개가 또다시 꼬리를 쳤다. 그 모습에 해인은 무심코 웃었다. 어색했던 공기가 그제야 한결 가라앉았고, 오디세우스는 곁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아이아스를 해인에게 소개해 주었다.

“자, 이쪽은……. 내가 멋대로 소개했다고 아킬레우스가 화내지 않을까 걱정은 된다만, 이대로 둘 수 없으니 이름이라도 듣는 게 낫겠지. 아킬레우스의 사촌이기도 한다네.”

“……테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물론 해인은 그가 누구인지는 이미 추측으로 알고 있었지만, 소개는 처음이었던 만큼 티 내지 않고 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와는 달리 아이아스의 이름에는 얽힌 이야기가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기에 오히려 편했다.

“네, 안녕하세요. 해인이라고 합니다.”

“예…….”

그러나 태연한 해인에 비해 아이아스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삐걱거리는 태도였다. 본인의 착각으로 아킬레우스에게 당당히 다른 여자를 권했던 것이 자꾸 떠올라, 머쓱함과 더불어 죄책감이 치고 올라오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오디세우스는 이내 해인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진영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분명 해인을 보며 예민한 기색이 엿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비할 바 없이 표정이 괜찮아 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연인이 전장에 나가지 않으니.’

당연한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타카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아내가 생각난 오디세우스는 씁쓸해지고 말았다. 연합군의 이득과 젊은 연인들의 행복 사이에서 음습한 생각을 했었던 스스로가 수치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고, 잠깐의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해인.”

“네?”

“그……. 다른 게 아니라, 어제 총사령관이 보였던 무례를 대신이나마 사과하고 싶다네.”

자식뻘쯤 되는 여자를 상대로 오디세우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사과라는 단어에 해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건 듣고 있던 아이아스도 다를 바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총사령관의 무례를 대신 사과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그럴 만한 입장도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에게 눈짓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저 순수한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런 식으로라도 호감을 사서 아킬레우스에게 말이나 좀 잘 전해 주기를 바라 보는 거지.’

당연하지만 그도 이런 걸로 아킬레우스가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충동질도 아니고, 단순히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 외에는 사실상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도 없는 말 한마디에 불과했다. 그러니 딱 그만큼의 효과만이라도 있기를 바라며 되는 대로 던져 보는 것이다.

‘테티스 여신의 복수만이라도 거둬지면 좋겠군.’

연합군에 유감을 가진 신은 테티스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할 법한 생각이었으나, 동시에 사과할 대상을 해인으로 골랐다는 점에서 본의 아니게 제대로 된 선택지였기도 했다.

“듣지 않아도 될 모욕을 듣게 된 점은 특히 유감이라고 생각하네. 총사령관이 직접 말하지 않아 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렸으면 해서.”

거기까지 들은 해인은 피식 웃었다.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사과를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오디세우스의 표정을 보니 아주 순수한 의도는 아닌 것이 티가 났다.

하지만 나이 든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사과를 하는 건 현대에서조차 어렵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일이다 보니, 마냥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사실 신경 안 쓰고 있었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 답에 오디세우스는 쓰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상대의 표정만 보더라도 신경 안 쓰고 있었다던 해인의 대답이 진실인 게 명백해서였다.

어린 아가씨가 나쁜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렸다면 그 자체로는 좋은 일이지만, 기껏 머리를 굴려 사과까지 한 오디세우스로서는 아무래도 기대한 반응이 아니라 허탈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해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또 어색해지기 직전, 내내 얌전히 해인의 곁에 있던 개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더니 짧게 두어 번 짖으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까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벌이는 개의 뒤를 쫓은 끝에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만나게 되었던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 셋의 시선이 자연히 개가 달려가는 방향을 향했다.

그 끝에서는 세 사람 모두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남들보다 큰 체격도 체격이었지만, 지는 노을빛에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금발만 보더라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였다.

“……악당이라도 된 것 같군.”

아이아스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이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이없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오디세우스는 내심으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없잖아 있어서 입을 여는 대신 눈만 굴렸다. 반기는 사람은 오직 해인뿐이었다.

“아킬레우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노려보던 표정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뒤이어 해인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는 꼴을 목격한 아이아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 자주 만나며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사촌인데, 아킬레우스의 저런 얼굴은 정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금세 그들의 근처에 온 아킬레우스는 아주 당연한 듯 해인의 곁에 선 채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마주했다. 아까처럼 대놓고 노려보지는 않지만, 눈빛은 그리 곱지 않았다.

“……둘 모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군요.”

“잠깐 쉬어 갈 생각이었을 뿐이야. 아가씨와 우연히 마주친 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 않나.”

“저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식한 듯 눈빛과 달리 제법 예의를 차린 어투였다. 그러나 완전히 마음을 숨길 수는 없는 듯, 그는 더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내킬 때까지 쉬고, 부디 조심히 돌아가길 바랍니다. 돌아가서도 보중하시길.”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는 아까 전 막사에서 들었던 축객령을 단어만 바꿔 또 들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돌아보며 누그러진 투로 물었다.

“해인, 혹시 저 두 사람과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해인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원한다면 이 자리에 더 머무를 것처럼 묻고 있고, 실제로도 해인이 둘과 더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어주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빨리 여기를 뜨고 싶어 하는 기색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협상은 결렬됐으며 아킬레우스는 전쟁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걸 다시금 확인한 해인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요. 괜찮으면 이만 돌아가요.”

아킬레우스가 바라던 답이었다. 그는 빙긋 웃고는 잡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해인은 익숙하게 그 위로 손을 얹었고,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그 손을 단단히 잡아 쥔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를 일별하며 짧게 말했다.

“그럼.”

돌아보는 일 없이 멀어지는 둘의 뒤를 개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뒤쫓았다.

연인과 개 한 마리가 노을 속에 멀어지는 광경은 아주 평화롭고 보기 좋아서,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는 새삼스럽게도 자신들이 불청객이기는 했음을 다시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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