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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3)화 (113/149)

해인과도 만나 본 적이 있던 오디세우스는 물론이고, 함께 따라온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사촌이기도 한 만큼 그들은 연합군 내에서 아킬레우스와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로 들어온 오디세우스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킬레우스! 잘 있었나?”

“어제 봤을 텐데.”

냉랭한 답에도 오디세우스는 굴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하루면 더 많은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고작해야 하루였다.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오디세우스를 빤히 쳐다보던 아킬레우스가 이내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하루 만에 옷자락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여기까지 뛰어올 정도면, 일이 맘대로 안 되는 모양이군요.”

“말 좀 그렇게 하지 마.”

아이아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못했다. 사실이 그랬던 탓이다.

아킬레우스의 태도를 보고 그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오디세우스는 직전까지의 가벼운 행동을 그만두고 금세 낯을 진지하게 바꿨다. 아킬레우스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신변잡기 식의 인사를 관두고 자신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날 오후, 그러니까……. 자네가 떠난 이후 빠르게 소문이 퍼졌지. 자네가 연합군에서 이탈했고, 다음 전장에서부터는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모두가 믿을 수 없어 했으나 현실은 현실이었고, 한차례의 당황스러움이 남겨진 연합군을 휩쓸었다. 그런 뒤에 남은 것은 눈에 띄게 저하된 병사들의 사기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아킬레우스는 연합군 내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였으며, 테베의 일곱 왕자와 왕의 목을 혼자 베어 버릴 실력이 있는 신의 아들이었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병사들은 내심으로 아킬레우스가 연합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남겨진 장군들이 원망할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먼저 무례했던 것은 아가멤논이기도 했으니, 각자의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모두 총사령관을 규탄하며 당장 아킬레우스를 쫓아가 사과하고 그를 다시 데려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가멤논은 응하지 않았다.

일이 벌어진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다. 싸운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굽히고 들어가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작 한 사람이 없어졌다며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이야기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리 좋지 않은 수를 두었다.

“그날 저녁, 연합군 전체는 총사령관의 명으로 곧장 트로이로 이동했네.”

말이 이어지는 내내 어떠한 표정 변화 없이 듣던 아킬레우스조차 이 소식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확인했다.

“……진담입니까?”

아이아스가 한숨과 함께 대신 답했다.

“차라리 농담이면 좋았겠지.”

“그걸 따라?”

“모두가 너처럼 명령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사촌들의 대화를 가르며 오디세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늦은 시간에 겨우 트로이에 도착했고, 오늘 아침 총사령관이 직접 병사들의 사기를 수습한 후 전투가 벌어졌지. 총사령관이 초조해하다 보니 좀 급하게 진행된 면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그래서인지 전황이 그리 좋지 않고, 승리하기도 힘들어 보였고, 무엇보다.”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를 정면으로 보며 쓰게 웃었다.

“오늘 유독 그의 운이 안 좋더군? 뱀이 갑자기 발목을 물려고 들더니, 실패하자 발목에 감겨 몸을 타고 올라오려 들고……. 금방 털어 내기는 했지만, 하필 그 순간 그를 상대하던 자가 검을 휘둘러 머리카락 반이 잘렸어. 피하지 못했으면 잘린 건 목이었겠지.”

말로는 운이 안 좋다고 표현했지만, 오디세우스는 그것이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테티스가 아들 대신 복수를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아킬레우스도 그의 생각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절반의 확률이지만 정답이기는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확률이 절반인 이유는, 총사령관에게 유감이 있는 신은 테티스 혼자만이 아닌 탓이다…….

“그쯤 되니 총사령관도 자존심을 세울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야. 자네에게 사과해야겠다며 우릴 불러 의견을 물어보던데, 사실 우리라고 해 줄 말이 있는 건 아니잖나? 그래도 설득이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아 여기까지 왔다네.”

뒤이어 오디세우스는 품속에서 양피지를 꺼내더니, 아가멤논이 사과의 의미로 아킬레우스에게 양도하겠다며 늘어놓았던 각종 재산들의 목록을 읽어 내렸다.

황금부터 시작해 다양한 보석들, 아가멤논이 다스리던 도시 일곱 개, 노예로 쓸 수 있는 사람 여럿, 그리고 자신의 오해로 고생한 해인을 의식했는지 여자에게 줄 만한 장신구들까지 아주 길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목록을 다 읽을 때까지도 아킬레우스는 내내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런 사촌의 표정을 확인한 아이아스가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딸도 네게 주겠다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아킬레우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필요 없어.”

순식간에 막사 안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냉랭한 어투였다. 아이아스는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무리 마음이 상했다 하더라도 아가멤논의 딸이면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인 미케네의 공주다. 최소한 기꺼워는 할 줄 알았다.

“왜? 그의 딸과 결혼하면 네가 미케네의 다음 왕이 될 수도……. 윽.”

말을 잇는 아이아스의 옆구리를 찔러 입을 다물게 한 오디세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아스도 전날 아가멤논의 막사에서 해인을 얼핏 보기는 했을 테지만, 그 시간이 워낙 짧기는 했으니 아킬레우스가 해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진심인지는 모를 법도 했다.

‘나도 그때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랐겠지.’

오디세우스는 힐끗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하며, 그는 재빨리 아이아스의 실수를 수습했다.

“아, 물론 자네에게 달리 연인이 있는 건 잘 알지! 강요는 아니라네. 자네가 싫으면 거절하면 되는 일이잖나. 단지 총사령관이 그 정도로 자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아이아스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었으나 한가하게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상대의 혼신의 힘을 다한 수습에 아킬레우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고 오디세우스는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그의 사과를 받아 줄 생각은 없나?”

“유감이군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짧은 답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도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설득의 말을 붙여 왔다. 아이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생각해 주게.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있지 않나?”

“그래, 아킬레우스! 이제 마지막이야, 트로이만 점령하면 정말 끝이라고. 그런데도 여기서 이렇게 그만두고 떠나겠다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만한 소리들이었다. 아킬레우스도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바꾸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싸워 오며 얻은 전리품만 해도 배 수십 척을 이용해 옮겨야 하는 탓에, 아가멤논이 무엇을 주겠다고 한들 어차피 아킬레우스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목표는 빨리 프티아로 돌아가 남은 시간이나마 평화롭게 보내는 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그러다 해인이 떠나면 짧게나마 평화롭게 보냈던 때의 기억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겠지만, 그 부분이야 이 순간 당장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지만, 문득 초조해진 아킬레우스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지금까지 해 온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 여기서 그만두고 떠날 거야.”

아킬레우스는 둘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쓴웃음이나마 지어 보였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여기까지 온 둘의 수고를 생각해서일 뿐입니다. 내 의사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아킬레우스!”

“이제 더는 들어 볼 생각도 없어졌으니,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십시오.”

오디세우스를 의식한 것인지 그 와중에도 말을 높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들릴 만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

몇 번쯤 더 아킬레우스를 설득해 봤지만,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는 결국 실패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생각이 없는 아킬레우스를 상대로 힘을 빼고 나자 그들은 어쩔 도리 없이 허탈해졌다. 곧장 돌아가는 대신 잠깐 쉬어 갈 생각으로 바로 앞에 위치한 해변을 향해 가며, 아이아스는 어이없어 하는 기색을 숨길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저게 진심이라는 게 안 믿기는군요. 게다가 미케네의 공주 이야기에는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오디세우스가 한숨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자네가 실수한 게 맞네.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사촌인 저도 모르는 연인이 있다고요? 그것도 저 정도로 각별한?”

오디세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지난번 아킬레우스가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말을 옮기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아이아스는 그의 말대로 아킬레우스의 사촌이었다.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리고 다닐 성격도 아니었으니 최소한의 언질은 해 두는 게 더 이상의 실수를 막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자네도 봤을걸. 어제 총사령관의 막사에서 말이야.”

그 말에 기억을 더듬던 아이아스는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오디세우스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전날 사건이 일어났을 때, 총사령관의 막사에 있던 여자는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 검은 머리칼의? 그러고 보니 아킬레우스가 챙겨서 데려가기는 했었죠……. 그렇다 해도 단순히 전리품으로 얻은 여자 아니었습니까?”

“그래. 총사령관이 보낸 전령 선에서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안 그래도 이전에 한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포로 신분은 분명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니 아킬레우스가 또 우리를 만나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허.”

“만날 일 없겠지만, 그 아가씨 앞에서도 하지 말고.”

아이아스는 입을 다물고 복잡한 얼굴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까운 친척인데도 자신은 언질조차 못 들었다는 점이 좀 섭섭한 기색이었다.

“그, 일찍이 말을 했으면 좀 조심했을 텐데.”

“지나고 후회해 봤자 뭐 하겠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바닷가의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한바탕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휩쓸며 스쳐 지나갔다. 아킬레우스에게 다시 전쟁에 참여해 달라며 부탁하러 온 입장이지만, 동시에 그들이라고 이 전쟁에 아주 대단한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아스는 물론이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과 아름답고 젊은 아내를 두고 온 오디세우스는 더욱 고향이 그리웠다.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말을 잃은 그들이 먼 바다를 바라볼 때였다.

“……음?”

문득 다리를 툭 건드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오디세우스는 시선을 내렸다.

거기에는 언제 온 것인지도 모르게 다가온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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