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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2)화 (112/149)

“……그러고 보니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지.”

해인은 그의 의도대로 다시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대로 프티아로 갈 거야. 어디인지 알아?”

프티아라면 분명 들어 본 지명이었다.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현대에서는 전혀 몰랐지만, 이곳에 와서는 몇 번인가 들었던 기억이 있는 탓일 것이다. 해인은 중얼거리듯 답했다.

“……당신의 고향.”

“맞아.”

대답과 함께 아킬레우스는 아까 전 시선을 피했을 때와는 달리, 해인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을 마주했다. 몇 초가량이 흐르고 나서 그는 어딘가 안심한 낯으로 웃었다.

“내게 실망하지는 않았군.”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해인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불과 몇 분 전 ‘연합군이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꺼낸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다. 해인도 자신이 급하게 말을 바꾸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연합군의 안위가 조금이나마 신경 쓰였던 것도, 그 안에 소속되어 있을 아킬레우스의 지인들 때문이었다.

“진지하게 걱정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운데요.”

“그 정도로?”

해인이 타박하는 것 같은 어조로 하는 말에도 아킬레우스는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더 말해 보라는 듯 굴었다. 그 얼굴을 보자 해인은 새삼스럽게 이 상황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정말로 전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확신하지 못했던 상태에서도 그의 이탈이 사실이기를 내심 바랐었는데, 그 바람이 실제가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솔직히.”

“응.”

“내게 중요한 건 당신이지 이 전쟁이 아니에요.”

해인이 말을 맺고 나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물결이 한 번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났을 때, 아킬레우스가 불쑥 팔을 뻗더니 예고 없이 해인을 덥석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해인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자신이 바다 앞에서 그런 일을 했다가 벌어질 일이 찰나에 머릿속을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 나머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어깨 위로 한쪽 팔을 둘러 균형을 잡고서야 눈빛으로나마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해명 대신, 해인을 고쳐 안으며 다른 말을 속삭여 왔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흐려지는 말끝에서는 기쁨과 더불어 옅은 후회가 엿보였다.

아킬레우스가 팔에 앉혀 놓은 덕분에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해인은, 그가 꺼낸 말에 직전의 놀람 정도는 금세 잊었다. 그녀는 늘어져 있던 자유로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전쟁을 그만두는 걸?”

얼굴에 닿는 약간 서늘한 체온에 아킬레우스는 슬쩍 손 위로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그래, 사실 생각한 지는 좀 됐었거든.”

뒤이어 일부러 장난이라도 치듯 반 바퀴 정도 가볍게 빙글 돈 그는 해인을 내려놓지 않은 채 바다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마도 이제는 완성되어 있을 막사로 향해 가며, 아킬레우스는 조용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이제는 시간을 더 낭비하지는 않을 테니까.”

***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해인은 문득 눈을 떴다.

지금처럼 이유 없이 새벽에 깨어났던 적이 이전에도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해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가까이에는 잠든 아킬레우스의 얼굴이 보였고, 그를 포함한 막사 안의 모든 것들은 고요한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지난밤 막사로 돌아오고 나서 곧바로 잠들지는 않았으니, 그리 길지 않은 수면이었다. 곧바로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자신을 끌어안은 아킬레우스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며 눈을 감았던 해인은, 문득 귓가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눈을 떴다.

‘파도 소리…….’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들을 수 없었을 소리가 들려오자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전쟁터가 아니구나.’

해인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이라는 생각은 어제와 변함이 없었지만, 동시에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고 지금처럼 확신이 생기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의문이 뒤따라왔다. 전날 포세이돈을 만나기 전처럼, 그저 짐작에 불과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고민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크로노스 님은 이것까지도 알고 계셨을까. 그럼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던 말은 뭐였지?’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본인이 더는 전쟁터에 있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제 다시 그쪽으로 자진해 돌아갈 일은 없을 텐데.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운명은…….’

그가 직접 본인의 입으로 털어놓았던 그에게 내려진 예언의 내용과, 정말로 유일하게 타인이 상처 입힐 수 있는 발뒤꿈치까지, 현대에서부터 알고 있던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명백히 존재했다. 그런 만큼 해인은 그의 운명의 끝이 죽음이라고 줄곧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터를 벗어났다면 죽음과도 멀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무작정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크로노스가 했던 또 다른 말 때문이었다.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도 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잠이 완전히 깨 버렸다.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해인은 어떻게 하면 아킬레우스를 깨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젠가 본인 입으로 ‘깊이 잠들지 않는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 사람인 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때도 조용히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 끝을 건드리자마자 반짝 눈을 떠 놀랐던 기억이 선명했다.

‘……안 되겠네.’

경험이 있기에 포기도 빨랐다. 억지로 눈을 감은 해인이 한숨을 삼키며 조금 뒤척인 찰나였다. 문득 몸에 둘러진 팔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팔의 주인에게 몸이 바짝 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흠칫 굳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머리 위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새벽 같은데, 왜 벌써 일어나 있어.”

해인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정말 안 깨우려 했는데…….”

“뭐 하려고?”

질문과 함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답답해진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금세 조금 느슨해지긴 했지만, 완전히 거둬지지는 않았다. 질문과는 별개로 놓아줄 생각은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하려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봐도 보이는 건 목과 턱 선의 일부뿐이었기에, 해인은 헛웃음과 함께 그냥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뭘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깼으니까 일어나려 한 거죠.”

이전 해인이 본의 아니게 그를 깨웠을 때는 잠들지도 않았던 사람마냥 목소리가 선명했었다. 그에 비해 이번에는 그때보다는 깊이 잠들었던지, 말끝이 약간 늘어지고 목소리 역시 평소에 비해 가라앉아 있었다. 잠든 모습은 이제 두 번 정도 봤지만, 지금처럼 잠에 취한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은 해인은 새로움을 느꼈다.

심지어 깨어났다 해도 잠기운은 덜 가신 듯, 그는 해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묵묵히 숨만 쉬었다. 팔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기는 해도 숨소리는 고르게 들렸기에 해인은 그가 다시 잠들었나 싶어졌다.

‘전쟁터가 아니니까 긴장을 좀 푼 걸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다행스럽기도 했다. 마침 팔을 약간만 굽히면 손끝에 뒷머리가 닿았으므로, 해인은 별생각 없이 아킬레우스의 머리와 목덜미 뒤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멍하니 맞은편 벽을 응시했다.

아까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되짚고, 생각하던 문제가 아킬레우스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되새기고, 그렇게 천천히 그 고민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순간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킬레우스가 불시에 몸을 반쯤 굴리더니 해인의 위로 엎어졌다. 안겨 있던 탓에 같이 반 바퀴 굴려져 눌린 해인이 당황하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 잠깐…….”

“……아닌 것 같은데.”

무게가 지나치게 실리지 않도록 상체는 들고 있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전부 맞닿은 탓에 해인은 자신이 무심코 한 일이 특정한 문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킬레우스는 말을 맺으며 해인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선 위로 고개를 내렸다.

“아…….”

닿아 오는 숨결에 흠칫 몸이 튀었다. 고민거리는 없어지지 않았는데, 생각에 잠기기에는 분위기가 이미 이상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은 밀어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는, 밀어내기 싫었다.

지금과 같은 푸르스름한 새벽에 깨어났던 지난날, 한번쯤은 안일하게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왜인지 신경 어딘가를 건드는 듯한 찝찝함, 그리고 이 순간이 어쩌면 살얼음판 위에서 누리는 평화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불안감이 안개처럼 주변을 둘렀다. 그러나 해인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다행히 점점 애쓰지 않아도 외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잊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었다.

***

되는 대로 여유를 부린 새벽과 아침이 지나고, 늦은 오후에 이르렀을 때였다.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연합군 진영으로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바닷가 근처의 임시 막사가 세워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아킬레우스를 만나고 싶다며 정중히 요청해 왔다.

물론 그들이 예의를 차리거나 말거나, 아킬레우스는 연합군과 좋지 않은 일로 갈라진 만큼 그 요청을 받아들여 줄 이유가 달리 없었다. 하지만 방문자들의 면면을 확인한 이후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어려운 이들이었던 탓이다.

누군가 의도하고 보냈다면 일부러 그랬을 것이 명백할 만큼 노골적인 인선.

방문자는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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