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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1)화 (111/149)

비록 색은 같더라도, 신들 특유의 오만한 신성은 엿보이지 않아 받아들이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덕분이었다. 게다가 해인은 ‘그 일’이 벌어진 지 한참 뒤에 태어난 아이였다. 높은 확률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을 터다.

그러니 테티스에게 있어서 해인은, 자신이 포세이돈에게 가진 악감정과는 별개로 두어야 할, 지은 죄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 사실을 테티스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확신시켰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포세이돈에 대한 꺼림칙함을 그 자식인 해인에게 그대로 연결시키는 것이 심정적으로 더 쉽기는 했다. 하지만 기껏 길러 놓은 아들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존재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심지어 해인은 자신이 못 했던 일, 아킬레우스를 전장에서 떼어 놓는 것을 성공시킨 은인이기도 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테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을…….”

“……네?”

“네 이름을 못 들었던 것 같아서. 달리 알 수야 있겠지만, 직접 듣고 싶어 남았단다.”

사소하다면 사소하게도 들리는 이유였다. 자신에게 고정된 테티스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해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반 박자 늦게 급히 답했다.

“해인, 해인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부드러운 어조로 답하며 테티스는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 전, 바다에서 막 고개를 들었던 테티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 해인이 보았던 그녀의 미소와 비슷했다. 그 얼굴을 본 해인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테티스는 해인의 눈 색 정도는 이미 정확히 알아차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리고 해인은 자신의 눈이 포세이돈과 아주 똑같은 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조차 해인의 눈을 보고 해인이 포세이돈과 피가 이어졌음을 납득했을 정도였으니, 모를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을 텐데.’

해인도 테티스와 포세이돈 사이의 악연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었다.

바다에 속한 여신의 결혼식인 만큼 현대에서부터 어렴풋이나마 알던 이야기였기도 하고, 팀블레에서 테베로 이동할 적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로부터 테티스와 펠레우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낱낱이 전해 들으며 그 ‘어렴풋이 알던 이야기’가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덕분이었다.

‘강제 결혼 중매 주동자랑 피해자니까…….’

현대인이자 필멸자로서,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에 어떤 짓을 했건 가급적 신경 쓰지 않으려던 해인조차도 그때 이야기를 듣고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결혼의 결실로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다 한들 그녀가 겪은 일이 아름답게 미화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날 안 좋게 보는 것 같진 않으시네.’

당장 눈앞에 있는 테티스의 유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안심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지 해인으로서는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그 의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먼저 이야기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될 주제였다.

조심스럽게 상대의 얼굴을 살피면서도 해인은 자신의 표정만큼은 제법 차분하게 유지했다. 덕분에 해인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테티스는 다만 여전히 온화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밤이 깊은 데다 할 일도 있어 어렵겠지만,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좀 더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어떠니?”

“……네, 좋아요.”

답을 들은 테티스가 재차 미소를 보였다.

“고맙구나.”

그 인사를 끝으로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도 인사를 남긴 뒤 바다로 되돌아갔다.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던 여신의 뒷모습이 마침내 완전히 물속으로 잠겨 들고, 한밤의 바닷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해인은 아까 전 포세이돈이 떠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테티스가 사라진 방향의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가 보여 준 태도에 대해 생각했고, 아킬레우스는 그런 해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둘 모두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기에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배경처럼 울렸다.

문득 육지 방향으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아킬레우스가 먼저 침묵을 깼다.

“놀랐어?”

“……네?”

“갑자기 움직이시기에 미처 말리지는 못했는데, 방금 하신 제안도 거절이 어려웠던 거라면 다음에는 만날 일 없게 막아 두지.”

“아.”

떠난 방향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 당황하거나 놀랐기 때문으로 비쳐질 수도 있음을 깨달은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본인 어머니일 텐데 말하는 투가 꽤 냉정했다. 대놓고 배척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명백히 경계하는 기색이 은연중 티가 났다. 아마 어릴 적 강제로 섬에 가둬졌던 일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아킬레우스와 테티스 사이의 일이니, 해인이 말을 보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방금 전 테티스가 자신에게 보였던 아량 넓은 태도를 다시금 떠올리며 한마디로나마 그녀를 비호해 보았다.

“좋은 분이시던데요.”

“……그래.”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안도한 기색으로 천천히 해인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다 바로 앞인 만큼 포세이돈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애초에 거리를 좁히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포세이돈은 모종의 이유로 바쁠 테니 굳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으므로, 해인은 별말 없이 그를 용인했다.

그와 동시에 테티스에 대한 생각도 그만 접어 두었다. 그녀가 포세이돈과의 불편한 사이를 해인에게까지 연결해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감사할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분에 대한 것보다는 아킬레우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더 많기도 하고.’

해인과 포세이돈이 대화를 나누던 이 자리에는 언제 왔는지,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났는지, 모든 군을 이끌고 바다까지는 정말 왜 온 것인지, 그리고 방금 이 자리를 뜬 두 명의 바다 신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데, 연합군이 괜찮을지…….

여러 개의 질문들 가운데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화제로 꺼내기 편안한 건 마지막이었다.

질문과 관련된 일들 모두가 전부 오늘 일어난 일들이기는 하지만, 신들이 떠난 건 말 그대로 직전이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최근이라 볼 수 있었다.

‘총사령관이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인 건 맞지만, 연합군에 그만 있는 건 아니니까.’

절대적인 숫자로 따지면 연합군에는 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 훨씬 많았다.

물론 트로이에도 죄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으나, 해인으로서는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연합군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킬레우스와 우호적인 관계라던 오디세우스도 연합군 소속이고, 그 외 아킬레우스와 어느 정도 친분을 나눴을 다른 장군들도 최소한 몇 명은 더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주어를 말하지 않고 뜬금없이 꺼낸 물음에도 성실하게 답이 돌아왔다. 해인은 아까 전 포세이돈이 막 떠났을 때 자신이 했던 혼잣말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문득 상기해 냈다.

“방금 두 분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떠나신 것 같아서요. 연합군……. 정말 큰일이 나면 어쩌나 하고.”

“……글쎄, 그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해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건조한 답이었다. 해인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아킬레우스가 쓰게 웃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까 전 그대가 포세이돈 님과 나누던 대화를 좀 엿들었어.”

갑작스러운 솔직함에 해인이 멈칫하며 물었다.

“어디부터?”

“그대가 개인적인 짐작을 이야기했을 때부터.”

‘개인적인 짐작’을 말했던 때라면 포세이돈이 화를 내기 직전이었다. 온 지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해인이 약간 당황한 채 눈을 깜빡였다. 아킬레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약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가 맞았어.”

“……그럼.”

“맞아, 참전은 그만둘 거야.”

해인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며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설명을 미룬 이유를 떠올렸다. 물론 그는 오늘 전쟁터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린 이후부터 몹시 바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틈을 낸다면, 해인에게 간략하게나마 설명할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다소 유치하고, 혹은 비겁하다고도 볼 수 있을 이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해인이 아무런 설명 없이도 상황을 짐작해 버린 이후였으니 이제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그는 감추기를 포기하고 솔직하게 토로하기를 택했다.

“결심은 내렸었지만……. 그러고 나니 그대가 지금처럼 멋대로 의무를 내던지는 내게 실망할까 문득 걱정이 돼서.”

그 말을 듣자마자 해인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것은 정말 필요 없는 걱정을 했다는 감탄 아닌 감탄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았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가는데, 영민한 그대가 내 머릿속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다는 걸 미처 생각 못 했군.”

어이없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아킬레우스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난 이미 그쪽에서는 손을 뗐어. 조금만 더 하면 전쟁도 완전한 끝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그대와 내게 해를 끼친 자들을 더 걱정해 줄 여유는 없으니까.”

말을 맺은 그는 특정 방향으로 짧게 시선을 힐끗 던졌다. 무의식적인 듯 아주 짧은 눈짓이었지만, 해인은 그가 바라본 방향을 향해 쭉 간다면 트로이가 나오리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해인은 그 방향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함선에 있을 때 얼핏 보았던 성벽이 있는 방향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 곳을 보는 해인의 옆얼굴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가, 주의를 끌어오듯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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