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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0)화 (110/149)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전쟁은 그만두려 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꺼낸 첫마디는 이러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해인과 달리 그는 굳이 자신의 마음을 감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 잠시 멈칫한 테티스는 해인을 눈짓하며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저 아이니?”

“맞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을래?”

“예, 어려울 건 없죠.”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테티스는 아주 오래간만에 자신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을 돌려주는 아들을 마주했다. 마침 포세이돈은 해인과의 대화에 빠져 있느라, 자신의 뒤에서 아킬레우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못하여 대화를 나누는 데는 어떠한 방해조차 없었다.

해인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불과 오늘 오전 연합군 내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명예 따위는 이제 필요하지 않으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평화로운 때를 보내고 싶다는 아들의 속마음마저 전부 간략하게나마 전해 듣게 된 테티스는…….

‘일이 이렇게나 잘 풀리다니.’

……당연하지만 아주 기뻤다!

아킬레우스가 어릴 적, 예언을 전해 듣고 초조함에 못 이겨 아들을 스키로스에 가둬 놓았던 테티스는 몇 년 뒤 열다섯밖에 안 된 아들의 탈주라는 현실로 그 행동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섬을 나가자마자 전쟁터로 뛰어든 아킬레우스는 십 년째 그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테티스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전황을 살펴 왔다. 명예를 쌓아 가면 쌓아 갈수록 죽음과 가까워지던 자식을 보며 애태우고 슬퍼하길 몇 년째였다.

아들을 더없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테티스도 아킬레우스의 성격이 온건하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억누르려고 했던 게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도 꽤 됐다.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바꾸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요원해 보였고 정말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예언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았는데.’

테티스의 힘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었던 탓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반쯤 포기하고 있었건만, 설마 이렇게 예상 못 한 희소식이 올 줄은 몰랐다.

테티스는 얼떨떨하지만 기쁜 심정으로 아킬레우스에게서 눈을 돌려 포세이돈과 그의 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사실 바다에서 나올 때 잠깐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아까까지는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저 아이가…….’

할 수 없어 포기했던 일을 현실이 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덕택에 한동안 넋을 놓고 해인을 보던 테티스는, 불현듯 해인과 포세이돈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갑작스러운 기쁨에 의해 무언가를 잊고 있었음을 상기해 냈다.

바로 아가멤논이 아들에게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짓에 대해서였다.

‘아.’

테티스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물러나겠다는 건 물론 희소식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아들에게 행한 무례를 곱게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물론 자존심도 만만치 않은 아킬레우스는 테티스에게 대신 복수해 달라며 매달릴 성격이 아니었고, 아까 전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그쪽에 대해서는 그저 완전히 질려 버린 듯 더 이상 신경조차 쓰기 싫다며 인상이나 찌푸렸을 뿐이었지만, 테티스의 입장에서는 대체 아가멤논이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기에 저 정도로 학을 떼는가 싶어 기가 막혔다.

‘그건 저쪽도 비슷한 모양이니…….’

해인과 대화하던 포세이돈이 탄식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도 상황이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렇다면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기는 쉬웠다. 자식들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부모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포세이돈이 마침 그들 쪽을 돌아보았을 때, 테티스는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이다.

***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까요.”

회상을 끝내며 테티스가 주어 없는 문장을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포세이돈은 그 비어 있는 주어의 자리에 누가 와야 할지를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무려 두 신의 자식에게 한꺼번에 무례를 저지르는 대업을 달성한 자는 최근 들어 한 명뿐이다.

사실 테티스와 포세이돈은 그리 좋은 인연으로 엮인 사이는 아니었다. 근 삼십 년 전쯤부터 이어져,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악연이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악연의 발단은 당시 테티스에게 내려진 하나의 예언이었다.

「테티스의 아들은, 그 아버지보다 뛰어나게 될 것이다.」

아주 짧고, 예언이라 칭하기에는 사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때 테티스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수많은 남신들의 구애를 받고 있던 몸이었던 게 문제가 되었다.

예언이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것처럼 매달리던 남신들은 그 예언을 듣자마자 태도를 바꿨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뛰어난 것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자랑이 되지만, 영원히 사는 신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남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자식에 의해 위협받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테티스를 인간 남성과 반 강제적으로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정말 실행으로 옮겼다. 그에 있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던 이가 다름 아닌 포세이돈이었다.

테티스는 포세이돈을 몹시 꺼렸고 포세이돈은 테티스를 보는 것을 머쓱해했다.

이처럼 상당한 수준의 악연이었으나, 그럼에도 현재의 그들에게는 명백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바로 자식의 명예가 훼손되는 꼴을 눈 뜨고 못 본다는 부분이었다. 이 순간 중요한 건 바로 그 공통점이다.

“내 생각도 그러네.”

포세이돈은 엄숙하게 수긍했다.

물론 전쟁의 승패에는 하등 관심이 없는 테티스와는 달리, 포세이돈은 아가멤논을 처벌하더라도 이기는 것은 연합군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 그들의 지향점은 다소 달랐다.

그러나 결국 아가멤논을 벌하겠다는 최우선의 목적만큼은 분명히 같았다. 잠시 연합군과 아가멤논을 저울질해 보던 포세이돈이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경우 없는 놈 하나쯤 없어진다고 해서 이제 와 패배할 리는 없겠지…….”

아킬레우스마저 전장에서 빠지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연합군에는 아직 괜찮은 장군들이 꽤 남아 있다. 그에 비해 트로이에는 오직 헥토르 한 명뿐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는 그제야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그래, 해인.”

한편 눈앞에서 두 신이 나누는 대화를 낱낱이 들을 수 있었던 해인은 다소 떨떠름한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연합군 총사령관은 조만간 큰일을 겪게 될 것 같다. 두 명의 신이 나서서 그들끼리 대화하고 내려 버린 결정인 만큼 말릴 수도 없었다. 물론 아가멤논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에서 이런 대화를 듣게 되니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느릿하게 부름에 답했다.

“……네, 아버지.”

“크로노스로부터 별다른 말을 들은 게 없다면 너는 아무래도 계속 아킬레우스의 곁에 있어야겠지. 그래도 여기는 바다 근처인 데다 전쟁터도 아니니 잘되었구나.”

포세이돈은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으며 아킬레우스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 태도로부터 해인은 그가 아직 자신의 처신 능력을 어느 정도는 믿어 주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내 놓고도 영 안심이 안 되었는데 잘된 일이지…….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게 낫겠다. 너도 피곤했을 텐데, 그렇지 않으냐?”

“예에…….”

해인은 말끝을 흐리며 포세이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투 자체는 별다를 것 없었지만, 해인은 그 속에서 묘하게 자신을 어서 보내 버리려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보내 놓고 총사령관을 어떻게 할지 의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

자식의 시선 속에 담긴 복잡한 심정을 눈치챈 포세이돈이 빙그레 웃었다.

“너는 염려할 것 없으니 아무런 걱정 말거라.”

“……그, 하지만 아버지.”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구나.”

머뭇거리며 나온 해인의 반사적인 만류를 못 들은 척하며, 포세이돈은 테티스와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뒤이어 그는 아킬레우스에게도 가볍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 주었다. 아마도 근처에 그의 어머니인 테티스가 있어서일 것이다.

“가까이 있으니 금방 또 보겠지.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냥 바다로 뛰어들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해인을 돌아보고, 당부와 함께 뺨을 한번 쓰다듬은 그는 유유히 바다 속으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포세이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해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저러고도 지는 게 연합군이 아니라 트로이일까?’

언젠가 해인은 자신이 생각 없이 내뱉었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트로이다’는 이야기에 즐거워하던 포세이돈을 떠올렸다. 그래 놓고 지금은 당장이라도 연합군 총사령관을 처리해 버리려 드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은 의문이 절로 떠올랐다. 포세이돈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원인에 자신의 몫이 분명 있음을 부정할 수 없어 더욱 그랬다.

“조금 적극적으로 말려 봤어야 했나.”

“뭘?”

포세이돈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던 해인은 어느 사이엔가 곁에 다가와 있던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지는 못했다.

그의 곁에 아직 떠나지 않은 테티스가 함께 있던 탓이었다.

“아…….”

말이 채 되지 못한 희미한 탄성과 함께 해인은 테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건 테티스도 마찬가지였다. 티탄 신족인 덕분에 키가 상당히 큰 편인 테티스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인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엷은 달빛 아래서도 눈동자의 색만큼은 선명하다.

테티스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지중해를 지배하는 신의 눈동자와 더없이 똑같은 색채였다.

……그러나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그리 불쾌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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