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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9)화 (109/149)

바로 그때였다.

포세이돈의 뒤로 펼쳐진 새까만 바다로부터 무언가 길쭉한 형체가 물보라와 함께 치솟았다.

현대의 포세이돈보다 훨씬 혈기가 넘치는 탓인지, 당장이라도 아가멤논을 반으로 토막 내러 달려갈 것만 같은 포세이돈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던 해인은 뜬금없이 들려오는 거센 물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어?”

그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바다 한가운데에는 낯선 인형이 서 있었다.

찰나에 우연히도 눈이 마주쳤다. 인형의 정체는 어두운 밤의 엷은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큰 키의 여성이었다. 해인과 맞닿은 시선을 굳이 비껴 내지 않고 오히려 희미하게 웃어 준 그녀는 이내 천천히 뭍으로 걸음을 옮겨 왔다. 물속에서 솟아 나왔음에도 전혀 젖지 않은 긴 머리가 물결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더없이 우아했다.

잠깐 멍하니 눈을 깜빡인 해인은 무심코 포세이돈의 옷자락을 살짝 당기며 속삭였다.

“아버지, 저기 저분…….”

다른 곳도 아닌 바다로부터 솟아나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으니만큼 상대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해인은 그녀가 자신이 잘 아는 누군가와 몹시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선명히 보이는 얼굴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이름조차 듣기 전이지만 정체를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응?”

무려 예고 없이 옷자락이 잡아당겨진 데다, 내려다본 딸의 얼굴이 놀란 기색을 띠고 있는 것마저 확인하고 나서야 포세이돈은 분노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라앉혔다. 뒤이어 그는 해인의 시선이 닿은 방향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이는, 생김새로 그 정체를 짐작이나 해 볼 뿐인 해인과는 달리 포세이돈에게는 이미 낯익은 상대였다.

“……그대는.”

순간 멈칫한 포세이돈의 짧은 중얼거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어느덧 파도와 모래사장의 경계선상에 발을 디딘 상대가 포세이돈을 보며 가벼운 고갯짓과 함께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먼저 인사를 건네기는 했으나 고아한 얼굴 위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까 전 해인과 짧게 눈이 마주쳤을 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보였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어투도 적당히 예의만을 차릴 뿐 전혀 살갑지 않았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눈썹을 까딱하는가 싶더니,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잠자코 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그대의 결혼식 이후로는 처음이지, 테티스.”

그가 말끝에 붙인 이름을 통해, 해인은 자신이 상대의 정체를 맞게 짐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테티스는 언젠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로부터도 몇 번 들었던 이름이다. 그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많았지만, 현재로서 해인에게 가장 직관적인 것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였다. 맑은 물 같은 색의 눈동자와 섬세한 눈매가 특히 익숙하게 다가왔다.

결혼식이라는 단어에 테티스의 눈가가 얼핏 좁혀질 때였다.

“어머니.”

또 다른 목소리가 상황 속에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테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해인은 그 표정을 알았다. 현대의 포세이돈이 자신을 볼 때마다 하고 있던 낯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보는 부모들의 얼굴은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한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아킬레우스였다.

포세이돈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해인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본 해인과 익숙하게 시선을 맞춘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만 아무리 그라 해도 서로의 부모가, 특히 처음부터 유독 아킬레우스에게 날을 세우던 포세이돈이 멀쩡히 눈 뜨고 서 있는 곳에서 다른 때 흔히 그랬듯 해인을 끌어안거나 입을 맞출 수는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짧게 눈짓만 건넨 후 테티스의 앞으로 다가섰다.

고작 그 정도였어도 해인은 어쩐지 찔리는 기분이 되었다. 포세이돈은 해인이 아킬레우스와 어떤 관계가 되었는지까지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던 탓이다.

‘……그렇겠지? 아까 전 여기까지 온 이유를 말할 때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말씀이 없으셨으니까. 전장을 이탈한 것 같다는 부분도 일단은 짐작이고, 그 짐작이 맞다 하더라도 꼭 나 때문이라기보다는 총사령관이 아킬레우스의 명예에 있어 무례하게 행동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고.’

혼자 불안해져 빠르게 생각한 해인은 이내 한숨을 삼켰다.

물론 둘 사이의 모든 행위는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졌으며, 두 사람 모두 엄연한 성인이니만큼 그들의 관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관계와는 별개로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은 게 문제였다.

포세이돈 역시 그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경계했기에, 그의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잘 처신하라며 해인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그것을 떠올려 보면…….

‘아버지 기준으로 잘한 처신은 아니지.’

언제까지고 계속 감출 수는 없더라도, 우선 이 시점에서는 포세이돈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결론을 내린 해인은 슬쩍 눈을 굴려 포세이돈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다.

“왜 그러느냐?”

그리고 그렇게 눈을 굴리자마자 포세이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속으로 흠칫한 해인은 얼른 둘러댈 말을 찾았다.

“그, 조금 진정되신 건가 해서요.”

그렇지 않아도 마침 테티스와 아킬레우스가 상황에 끼어듦으로 인해 한풀 기세가 꺾인 듯했으니, 충분히 꺼낼 만한 이야기였다.

과연 포세이돈은 자신이 아까까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다시금 상기해 낸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또다시 길길이 날뛰기에는 애매해졌음을 인정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뒤이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굳이 나를 말리지?”

“네?”

“네가 아는 나는 네 일에 이렇듯 나서지 않느냐? 너는 내 자식이니, 내가 아까처럼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캐묻기 전에 먼저 와서 낱낱이 일러도 된다. 그런 다음 내가 널 모욕한 자들을 벌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면 되는 일인 것을…….”

해인은 쓰게 웃었다. 현대의 포세이돈은 해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즉시 발 벗고 나서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문제의 원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가 물리적인 제거를 고려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생긴 적도 없기는 했다.

지금처럼 해인이 겪은 일을 마치 포세이돈 자신이 겪은 일처럼 받아들이고 대신 화내 주는 것은 물론 든든하다. 해인도 아가멤논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을 잘못 내뱉은 걸로 아까와 같은 신의 분노를 감당하게 만드는 것은 과한 처사 같았다.

이 시대에서는 그 정도쯤이야 별것 아닌 일에 속할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해인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물론 얼마든지 나서 주시지만…….”

“그런데?”

“이번 일은 아버지께서 그 정도로 수고하실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허.”

포세이돈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탄식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쩌다? 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아니, 그게.”

“되었다. 이제 네가 어떤 아이인지는 알 것 같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반강제로 입을 다물게 된 해인이 드물게도 꽤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생각에 빠진 포세이돈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앞서서 한번 떠올렸던 것 같은, ‘미래의 자신이 대체 자식을 어떻게 키운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되새겼다.

모욕을 겪고도 그저 지나간 일이라고 저렇게 털어 내 버리고 잊어버린 듯 구는 태도를 보고 있자니 포세이돈은 되레 속이 터졌다.

‘당한 게 있으면 최소한 두 배 정도로는 갚아 줘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저런 식으로 구는 해인을 닦달해 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래, 그냥……. 너라도 마음이 편하다면 됐겠지. 어차피…….”

묘하게 허탈해진 포세이돈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려 테티스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테티스도 그놈을 가만 안 두려 할 테니, 거기에 함께한다.’

그는 해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자신의 딸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대로 아무런 말 없이 넘어가면 그건 자신의 권위 역시 추락하는 것과 같다. 허탈함이고 뭐고 할 일은 해야 했다.

때마침 포세이돈이 테티스를 바라보았을 때, 테티스도 이미 그를 보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쳤다. 테티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나누신 대화를 좀 들었습니다.”

“소리를 줄이지도 않았으니 들렸을 수도 있지. 어떤 생각이 들던가?”

테티스는 천천히 포세이돈의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할 일이 일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답과 함께 그녀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되짚었다.

***

몇 분 전까지의 테티스는 그저 지중해에 있어야 할 바다의 신이 어째서 에게해 앞까지 행차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의아했고, 난데없는 소음 공해를 참아 주다 못해 저러는 이유라도 알고자 슬쩍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야에 들어온 해변에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서 있었다.

‘……저 애가 어쩐 일이지?’

아킬레우스의 근처에는 테티스가 바다 바깥으로 나오게 만든 원인인 화를 내는 포세이돈과, 그런 그를 말리는 묘령의 여인이 함께 있었다. 포세이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여인을 별달리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그 여인은 최소한 포세이돈의 자식쯤은 되는 듯했다.

그리고 포세이돈과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둔 적이 없음에도 아킬레우스가 그들을 희미한 흥미로움이 깃든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아킬레우스는 테티스가 모르는 사이 포세이돈을 말리는 저 여인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것 같았다.

멀리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고, 일단 아들이 있는 장소에서 포세이돈이 화를 내고 있다면 이대로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여인에 대해서도 궁금했기에 테티스는 이유만 살피려던 처음의 생각을 철회하고 완전히 바다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들과 마주해, 정황을 듣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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