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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8)화 (10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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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해졌을 때는 무작정 걷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때마침 안전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장소였으므로, 해인은 브리세이스조차 떼어 놓고 함선에서 내려 혼자 바닷가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서 아킬레우스는 물론이고 다른 부관들이나 병사 몇몇이 해인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바다를 손짓하자 이내 납득하거나 이해한 얼굴을 했다. 아무도 해인을 말리지 않았고, 그게 당연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져 버린 이후였기에 하늘은 물론이고 그와 맞닿은 바다 역시 아득하게 검었다. 끝없이 까만 파도가 발끝에 닿을 듯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 나갔다.

파도 소리를 가까이 두고 모래를 밟아 나가며 해인은 아까부터 줄곧 생각해 오던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이탈이라…….’

물론 ‘전장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제는 어디까지나 해인의 순간적인 짐작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으니, 진위 여부는 아킬레우스에게 대놓고 물어봐야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인은 어째서인지 이 명제가 진실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게 아킬레우스를 알아 온 시간으로부터 비롯된 내 직감인지, 아니면 그냥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근거 없는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바람대로 진실이라면, 해인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은 일이 맞았다.

트로이로 가 봤자 남은 것은 비극적인 죽음뿐일 텐데, 이탈이라는 단어는 그 죽음의 칼끝으로부터 아킬레우스가 조금이나마 벗어났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물론 정말 그렇게 될까 싶은 의문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고, 고민해야 할 문제도 수없이 산재해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느낌만으로도 좋았다.

꽤 오랫동안 근거 없는 불안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해인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꿈에서 크로노스가 나온 이후부터 내내 의미도 없을 불안을 느껴 왔다. 트로이라는 이름이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느껴지고, 그곳으로 향할 날이 오는 것이 더없이 싫을 정도로 커다란 불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들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난 데다, 위험을 느낄 작은 여지조차 없는 장소에 서 있다.

아주 오래간만의 평화로운 감각이었다. 좋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어서, 멍한 얼굴로 걸음만 옮기던 해인은 불현듯 느껴지는 어떠한 예감에 자리에 멈춰 섰다.

해인은 수많은 일들에 있어 보통은 논리적인 근거나 마땅한 이유를 찾고는 하지만, 간혹 지금처럼 그런 것들이 필요도 없는 때가 있었다.

해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다 정면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짙은 색으로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부터, 거대한 인영이 솟아오르듯 나타났다.

“해인!”

곧이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인영으로부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해인은 직전까지 이어지던 생각을 그만두고 반사적으로 웃고 말았다.

지중해의 지배자,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인 포세이돈이었다.

“아버지.”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성큼성큼 다가선 바다의 신은 팔을 펼쳐 어린 자식을 먼저 끌어안았다. 거리낌 없이 안겨 드는 몸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약했다. 만나자마자 애잔해지는 기분으로 그는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묻고 말았다.

“좀 마른 것 아니냐?”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 없죠.”

고정된 시간의 이점을 누구보다 잘 써 왔던 해인은 태연하게 반박했다. 그 사소한 요소만으로도 포세이돈은 오랜만에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에서부터 알 수 있듯 아무런 무력도 없는 주제에, 신의 말에 대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고, 안겨 들 때도 당황하거나 기뻐하는 기색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 행동한다. 이 시대의 자식들은 감히 보이지 않는 태도지만, 이렇게 키운 것 역시 결국 미래의 자신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떠올릴 때마다 새롭군…….”

“네?”

“아니다. 별일은 없었느냐? 다치지는 않았고? 아킬레우스가 네게 나쁘게 굴지는 않던?”

별일도 있었고, 다친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해인은 태연하게 웃음부터 걸치고 봤다.

이 시대의 땅을 떠나기 전 포세이돈을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이런 질문을 한번쯤은 들으리라고 예상했었다. 여기서 솔직해졌다가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진영에만 머물렀는데 일이 생길 여지가 있었겠어요? 다칠 일도 없었고, 그도 잘 대해 줬어요.”

어차피 포세이돈은 현대에서도 늘 걱정 많은 아버지였다. 해인은 그를 안심시키는 데 이미 숙달되어 있었다. 그 태연하고 정직하게 들리는 대답에 포세이돈은 잠시 멈칫했다.

별일이 없었고 다칠 일도 없었음은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아킬레우스에 대한 문제는 미묘했던 탓이다. 잘 대해 주지 않았으면 어떻게든 부숴 버렸겠지만, 잘 대해 줬다는 소리를 들어도 마냥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래, 다행이지.”

작게 중얼거린 그는 다시 미소를 띠며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괜히 뺨을 한번 손끝으로 쓸어 본 포세이돈은 자신이 바다 바깥으로 걸음 하게 만든 물음을 꺼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와 있느냐?”

해인이 반갑기는 했으나, 반가움과는 별개로 의아한 것도 사실이었다.

“테베와의 일전이 끝난 지 며칠 안 되었으니, 아직 트로이로 갈 때도 아닐뿐더러 여기는 트로이로 가는 길목도 아닐 텐데. 갑자기 여기서 나타나니 뜻밖이로구나.”

“아…….”

그 질문에 해인은 짧은 탄식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아까까지 이탈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었기에 더욱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사실 이탈 같은 건 내 짐작일 뿐이고,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니까.’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짐작이라도 말하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그러려면 오늘 오전부터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설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포세이돈이 ‘아가멤논이 보낸 수하의 오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전부 듣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빤하게 예상되는 탓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갈등 탓에 해인의 침묵이 길어지자, 가만히 기다려 주던 포세이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딸아, 아버지에게 숨기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고는 내가 가르치지 않았더냐?”

안 가르쳤다.

해인은 생각하다 말고 어이없는 기분이 되어 포세이돈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지만 현대까지 살았던 포세이돈은 어떻게든 아이를 잘 키워 보고자 육아 서적도 정독해 본 신으로서, 지금처럼 권위적인 재촉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올려다본 포세이돈의 얼굴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해인은 이내 무어라 반박할 의지도 잃어버렸다.

이런 부분 역시 살아가는 시대가 다른 것에서부터 오는 차이일 것이다.

“응? 말하지 않을 테냐?”

“……그, 잠시만요.”

차이를 이해하기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황스럽기는 했다.

본의 아니게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포세이돈은 또 그것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오인해 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괴물의 모습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수없이 죽어 가며 생긴 고질병으로, 지금처럼 자신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있으면 그 끝에는 최악을 무심코 상정해 버리는 버릇이 나와 버린 탓이었다.

“말 못 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

해인은 멈칫하며 포세이돈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였으나, 유리알 같은 파란색 눈은 어느새 기묘한 번뜩임을 품고 있었다.

‘이런.’

분명 그는 ‘말 못 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고 물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것이 ‘내가 누구를 족치면 되겠느냐’로 들려올 지경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에는 늦었겠지.’

되짚어 보니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떠올리는 게 늦었다. 해인은 속으로 후회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잠시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그랬어요.”

“그러면 말해 보렴.”

“……그러니까.”

해인은 결국 ‘아가멤논이 보낸 수하의 오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에 대해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말하면서도 간혹 포세이돈의 표정을 확인해 가며 해인은 적당히 사건의 수위를 조절했다. 아가멤논이 자신에게 어떤 언행을 보였는지까지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고, 자잘한 가지들은 모두 쳐낸 채 큰 줄기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해인이 무심코 잊고 있던 것은, 그녀의 앞에 있는 이가 이미 충분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이라는 사실이었다.

포세이돈은 해인이 이야기 속에서 꽤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음을 오래지 않아 눈치챘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생략된 것들은 모두 해인이 겪은 무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눈치를 보는 것 같더라니, 이리저리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국 미케네의 왕이라는 놈이 자신의 자식을 감히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노예로 취급한 것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사실 저도 바빠 보이는 사람을 붙잡기는 미안해서 자세한 설명은 못 들었지만, 개인적인 짐작으로는 전장에서 이탈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해인이 말을 모두 끝낼 때까지는 참아 준 포세이돈은,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설명을 끝내자 빙그레 웃었다.

“잘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네 개인적인 짐작이 그럴듯하구나.”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해인이 멈칫하며 입을 열려 했지만, 이미 소용없어진 후였다.

“……그.”

“그리고 내 마음 여린 딸이 뭘 걱정했는지도 이 아버지는 모두 눈치채고 말았지…….”

“잠시만요, 아버지, 저는.”

어떻게든 피해 가려 했던 사태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 맹세코 이런 걸 바란 적은 없던 해인은 당황하며 포세이돈을 만류하려 들었다. 하지만 포세이돈은 이미 본인의 자식이 모욕을 당했다는 상황에 몰입해 분기탱천한 이후였다.

“그 뭣 같은 인간 왕 놈이 감히 내 딸을 모욕해?! 내가! 절대로! 그놈을 가만두지 않으마!”

“아니, 진정하세요……!”

아닌 밤중에 분노한 외침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다급히 포세이돈을 말리면서도 해인은 속으로 머리를 짚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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