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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7)화 (107/149)

chap.10 위태

***

결국 아킬레우스의 태도에 휘말린 파트로클로스는 제 상관의 명을 따라 진영을 정리시켰다.

갑작스러운 철수에 병사들은 웅성대면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아직 손대기 전인 자신의 막사로 되돌아갔다. 해인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아킬레우스임을 확인한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대화는 잘 끝났어요?”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꺼낸 질문이었다. 명백히 걱정하는 눈길을 마주한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한풀 꺾이며 직전까지 자신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한 그는 대답 대신 뜬금없이 사과부터 꺼냈다.

“미안.”

“아킬레우스.”

“괜히 그대까지 눈치 보게 해서 미안해. 아까 전 일도 파트로클로스의 말처럼 그대가 잘못한 건 없어. 내가 여유 없이 굴었던 것뿐이지.”

말을 이으며 그가 팔을 펼쳐 보였다. 잠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품 안으로 들어가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상대의 허리와 등을 완전히 감싸 안은 그는 드물게도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해인의 어깨 위로 고개를 기댔다.

반쯤은 안긴 듯, 반쯤은 안은 듯 애매한 자세였다. 하지만 별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아킬레우스의 등을 쓰다듬듯 토닥이다가 물었다.

“그럼 이제는 괜찮아요?”

그 말에 가느다란 어깨 위로 이마를 묻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 그대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다행이네요.”

해인은 그 말을 그저 단어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화가 가라앉고 심적 여유도 되찾은 것이겠거니 여겼던 것이다. 잠깐 후 아킬레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응?”

“그대는 괜찮은지 물었어. 명백히 불쾌한 일이었잖아.”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대단한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상황이 별일 없이 끝난 순간까지 마음에 담아 둘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므로, 해인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화나지 않아?”

“아까 총사령관의 막사에서는 조금 그랬지만, 잘 끝났는데 더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 답에 아킬레우스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게 안 돼.”

거의 속삭이는 수준의 크기였기에, 바짝 붙어 있었음에도 해인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아니, 아무것도.”

반사적으로 되물었으나 아킬레우스는 했던 말을 또 반복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한동안 해인을 끌어안은 채 미적거리다가, 할 일이 있다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막사 바깥에 다시 나갔다. 해인은 막사에 혼자 남겨졌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사이 파트로클로스가 말을 전달한 듯 브리세이스가 돌아온 덕분이었다.

엄밀히 말해 본인이 잘못한 것은 없음을 알면서도 브리세이스는 해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즉시 태도를 낮추며 사과부터 꺼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해인도 상대를 달래느라 한동안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에 겨우 평화를 되찾았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지 않아요?”

해인으로서는 언제부터였는지 미처 떠올릴 수 없었으나, 깨닫고 보니 마치 다수의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부산한 기척들이 막사의 천을 뚫고 전해지고 있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 같은 해인의 말에, 브리세이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예, 진영을 정리하고 있으니 소음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요.”

이제는 해인이 멈칫할 차례였다. 생각도 못 한 이유에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재차 물었다.

“……진영을 정리해요?”

트로이로 향하기까지는 아직 기한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연합군 전체를 정비한다는 명목이었으니 이제 와 그 기한이 갑자기 당겨질 리도 없었다. 해인의 당황한 기색에 브리세이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천천히 설명했다.

“예? 예……. 저도 미처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진영 지휘관의 군대는 모두 오늘 여기를 바로 떠나게 될 것이 확실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갑작스럽기는……. 하지요.”

그쯤에서 브리세이스를 더 귀찮게 해 봤자 명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 해인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는 아마 리노스와 텔라몬이 있을 테니 그들에게 물어보면 더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거의 동시에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막사의 천이 걷히며 아킬레우스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는 막 일어나 바깥으로 나오려던 해인을 발견하고는 여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해인.”

“아킬레우스, 지금 진영을 정리한다고…….”

“아, 맞아. 그걸 이야기하러 온 거야.”

해인은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뻗더니 해인의 어깨를 감싸며 막사 바깥으로 자연스레 이끌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동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걸음을 옮기면서 꺼낸 질문에 아킬레우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짧은 침묵 후 그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답을 돌려주었다.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네?”

“그러니 바로 출발해야 해.”

***

……몹시 갑작스러운 출발이었다.

진영의 정리조차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기다릴 틈은 없다는 듯, 아킬레우스는 군을 나눠 먼저 테베의 성벽 앞을 떠났다.

아킬레우스와 해인, 그리고 파트로클로스와 포이닉스를 제외한 나머지 부관들과 전체 병사들의 절반이 약간 안 되는 인원 구성이었다. 남겨진 파트로클로스와 포이닉스는 정리가 끝나는 대로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따라오기로 예정됐다.

떠날 때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대였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가 거의 다 져 가고 있었다. 하늘은 아주 약간의 붉은빛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온통 짙은 남색으로 뒤덮여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들여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뜻밖에도 제법 정비된 항구가 있고, 수십 척의 함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함선 위에서, 해인은 배 가장자리의 난간을 붙잡은 채 시야 가득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일하는 사람들로 인해 몹시 번잡하다며, 막사가 세워질 때까지 함선에 잠시만 머무르라는 권유를 받은 탓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그와 함께 코끝에 닿는 소금기 어린 냄새와 귓가로 들려오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더없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해인이 자신도 모르게 난간에 몸을 기대자, 뒤에 서 있던 브리세이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그렇게 난간에 기대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쪽은 바로 밑이 바다니까.”

중얼거리듯 답한 해인은 어두운 색으로 꿈틀거리는 물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음이 편한 장소이기는 했다.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다. 이성이 아닌, 피의 절반이 내리는 본능의 판단이었기에 자연히 긴장도 풀어졌다. 하지만 어이없는 기분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지금의 상황을 뒤늦게나마 살펴보았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일이 몹시 급하게 진행되었던 나머지 이제야 겨우 여유로워졌다.

물론 여유를 갖게 된 건 그저 일행에 소속돼 딸려 오기만 한 해인뿐이고, 아킬레우스를 비롯해 그의 부관들이나 병사들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바빠 보였다.

영문 모를 바쁨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신없어 보이는 이들을 붙들고 질문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해인은 우선 혼자 생각했다.

‘……일단 여기가 트로이는 확실히 아니지.’

갑작스레 움직인다기에 반사적으로 목적지는 트로이를 떠올렸으나, 정작 도착한 곳은 바닷가다. 멀찍이 성벽이 어렴풋이 보이기는 하지만 저곳이 트로이인지 아닌지는 어차피 모르는 일이었다.

해인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이 뜬금없는 이동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싶어 멀찍이 보이는 병사들과 하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거리는 꽤 있지만 표정 정도는 식별이 가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닷가 근처에서 막사를 세우고 있는 그들도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다. 대다수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일부만 우선 출발하고 나머지는 남아서 진영을 마저 정리한 뒤 따라올 정도면……. 이번 일 자체가 갑작스럽게 정해진 것은 분명하겠지.’

평소였다면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데 해인이 위험할 리 없었으므로, 그들은 진작 노동력으로 차출당해 당장 곁에 없었다. 곁에 남은 브리세이스도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를 알고 싶으면, 이 일을 벌였을 장본인인 아킬레우스를 찾아 물어봐야만 했다.

‘……그래, 장본인에게. 아무래도 연합군의 의견이 아니라 아킬레우스가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 같아.’

해인은 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부관들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유롭게 구경이나 하고 있는 자신에 비해 상당히 바빠 보이는 탓에, 의문을 해결하겠다며 질문으로 방해하기는 조금 미안했다.

한동안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해인은 문득 미묘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라고 말하던 아킬레우스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던 탓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단어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였지만, 어쩌면…….

“……화나서 전장을 이탈한 건가?”

“예?”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브리세이스가 되물었으나 해인은 드물게도 그녀에게까지 신경 쓰는 대신, 본인이 중얼거린 말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주력했다. 사실 떠오른 찰나에는 설마 싶었으나, 그 생각이 도통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고 넘어간 게 아니었을지도…….”

그녀는 아킬레우스가 화를 내기는 했지만, 이번 일에 있어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더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렇게 상황을 넘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게 합리적이었다. 이대로 총사령관이 사과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태연하게 그럴 수 있을 만큼 머릿속이 냉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파트로클로스가 운운했던 ‘이성’이라는 단어가 그 짐작을 단단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급작스러운 이동 자체가 그가 보인 행동이었다면, 말이 달라진다.

“이탈.”

해인은 천천히 그 단어를 되새겼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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