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런 파트로클로스의 생각대로, 아킬레우스는 화나서 조용해진 게 맞았다.
어떻게든 내려놓으려 노력해 보기는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은 뜨거워지기보다 오히려 점점 더 서늘하게 식어 내리는 듯했다. 그 가운데 그는 불현듯 생각했다.
‘그만두자.’
되짚어 보면 전쟁에 회의감을 느꼈던 것은 꽤 이전부터다.
처음에는 그저 전장에 나서는 것이 조금씩 내키지 않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점점 거대해지며 참전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으로 번졌다.
더 바라는 것을 두고도 굳이 지금처럼 삶을 불태우듯 피와 칼날 속으로 달려 들어가야만 할까,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뒤따라왔다.
그런 와중에 매번 거슬리는 사건마저 발생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회의감을 느끼며 전장에서 뛰어다니는 동안 벌어졌던 여러 일들을 떠올렸다. 암살자부터 시작해 아가멤논의 무례한 오해로부터 빚어진 이번 일까지, 지키겠다고 생각한 사람을 매번 이렇게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것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 느껴 왔던 순간의 충동, 고민, 여러 생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형태가 되어 명확해졌다. 그는 다시금 결론지었다.
‘그만둬야겠어.’
지난 십 년간 위해 왔던 목표, 그리고 그것을 위한 의무로부터 그는 완전히 손을 떼기로 했다. 둘러쓴 명예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앞으로 더 얻을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의미 있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조용하던 사람의 움직임에 파트로클로스와 해인이 멈칫하자, 아킬레우스가 천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뒤이어 해인에게 다가서더니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 해인. 파트로클로스와 대화 좀 하고 돌아올게.”
천천히 뻗은 손끝으로 해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듯 넘겨준 후, 그는 곧바로 파트로클로스에게 손짓하며 막사를 나가 버렸다. 그 말이나 표정으로부터 정말 ‘애써’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자 하는 티가 났다.
해인과 파트로클로스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괜찮겠어요?”
“어쩔 수 없지요.”
물론 아킬레우스가 본인의 불쾌함을 이유로 파트로클로스에게 화풀이를 할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저만큼 화가 나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걱정스럽게 묻는 해인을 보며 파트로클로스가 눈을 굴렸다.
“사실, 저 정도로 화난 건 정말 오랜만에 보기는 합니다만.”
“……얼마나?”
“십 년도 더 넘었군요. 아가씨께는 아킬레우스가 이야기해 주었을 것 같으니 알려 드리자면, 참전하기 이전, 막 스키로스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입니다.”
“아…….”
해인은 바로 이해했다. 그 반응에 해인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음을 확인받은 파트로클로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실 스키로스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에게도 일종의 역린 같은 것이지만, 해인에게는 말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맞아 들어갔음을 소소하게 자축하는 미소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예,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더 낫습니다. 어쨌든 참고 있으니까요.”
어릴 적의 아킬레우스는 화가 나면 그것을 굳이 지금처럼 억누르고 인내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지금은 해인의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어 인내하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정도니 충분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아킬레우스를 뒤따라 나가려다가, 잊은 게 떠올랐다는 듯 급히 멈춰 서며 해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가씨.”
“네?”
“그 브리세이스라는 여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잊었던 존재에 대한 물음에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돌아와서부터 몇 번인가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은 막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었다. 해인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파트로클로스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탓은 아니더라도 아가씨께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거나…….”
“아니요…….”
이어지는 말을 끊으며 해인은 한숨을 삼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대화가 통하던 상대가 사람을 물건처럼 바꾼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위화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브리세이스의 탓이 아니니까, 그냥 계속 브리세이스와 있고 싶어요.”
“너그러우시네요.”
파트로클로스는 알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해인은 이참에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브리세이스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잠시 돌려보내 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따 제가 아가씨께서 찾으셨다고 전해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고 나서 파트로클로스는 비로소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여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제법 뜨거워진 햇살이 눈을 찌르듯 비춰 왔다. 아킬레우스는 막사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잠잠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파트로클로스가 천천히 다가가며 조심히 이름을 불렀다.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파트로클로스는 마주하게 된 옅은 색 눈동자 속에서 얼핏 엿보이는, 알 수 없는 단단한 결심에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마치 억누르던 분노를 깎고 가다듬어 만든 것 같았다.
“시킬 일이라도 있어?”
파트로클로스가 먼저 물음을 꺼냈다.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침음하더니, 천천히 수긍했다.
“그래.”
“어떤?”
아킬레우스는 곧장 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인 만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아까 전 그의 눈을 마주했을 때부터 느꼈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에 조마조마하게 그의 상관을 응시했다. 그 끝에 마침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프티아로 돌아간다.”
불안한 느낌이 괜히 느껴졌던 게 아니라는 듯,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뭐?”
파트로클로스는 그만 아연하게 묻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문득 아까 전 자신이 해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정도’라고 말했건만, 사실 그리 이성적이지는 않았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이제까지 자주 그래 왔듯 상대의 당황을 깊이 고려해 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고 확신시키는 것처럼, 더 선명한 목소리로 반복해 주었다.
“지휘관으로서 내리는 최우선의 명령이야. 병사들에게 철수를 지시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정말 지나치게 뜻밖인 이야기였다.
이제 테베까지 함락시켰으니, 남은 것은 트로이로의 진격뿐인 상황이다. 사실상 전쟁의 끝에 다다른 셈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토록 열정을 쏟아부었던 일이 끝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철수를 지시하다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가?’
불현듯, 파트로클로스는 지난 시간들을 되짚었다.
대수롭지 않게, 혹은 설마 하며 넘어갔던 아킬레우스의 몇몇 행동들이 기억 속에서 새삼스럽게 부각됐다. 종종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넋을 놓거나, 혹은 지휘관으로서 판단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모습들이 하나둘씩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전조는 분명 있었다.
“진심입니까?”
그는 편하던 말투마저 바꿔 심각하게 확인했다.
그래,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지나쳤을 뿐 전조가 있었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정말 순순히 수긍하기에는 여전히 믿기 힘들고 완전한 납득도 어려운 지시였다.
“이제 트로이만 함락시키면 이 전쟁은 끝입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완전할 텐데, 정말 여기서 그만두겠다는 뜻입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파트로클로스를 내려다보면서도 아킬레우스는 그리 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반박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안 그래도 점점 내키지 않던 차였어. 그런 마당에 저런 자가 총사령관이라며 나서는 꼴을 더 봐주기도 어렵군.”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돌려 서늘한 시선으로 아가멤논의 진영이 있는 방향을 짧게 바라보았다. 뒤이어 다시 파트로클로스에게 눈을 돌린 그는, 아까까지의 명령조 대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명예는 필요 없어. 이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아킬레우스.”
“진심이야. 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날 이해해 줘.”
그건 가장 가까이 둔 부관이자 친우를 위한 존중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짧게나마 호소했다. 아킬레우스가 그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파트로클로스는 순간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반박할 말은 여전히 많았지만 그것들을 더 꺼낼 수가 없었다.
의도는 아니더라도 부관의 입을 효과적으로 막은 아킬레우스는, 마지막이라는 듯 분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 병사들은 이 전쟁에서 손을 뗀다. 떠날 준비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