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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5)화 (105/149)

“……아킬레우스.”

마침 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기에 들어온 이의 얼굴을 가장 먼저 확인한 오디세우스가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수습이니 뭐니 생각했었지만, 지금 막사로 들어온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본 순간 오디세우스는 이번 일을 온건하게 끝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좋게 넘어가자는 설득이라도 했다간 나도 죽여 버리려 들겠군.’

오디세우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사이 다른 이들도 아킬레우스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저마다 다른 반응들을 내보였다.

이를 악물고 아킬레우스를 노려보는 총사령관과, 그 곁에서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는 다른 장군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순식간에 밝아진 낯을 하는 리노스를 아주 짧은 순간 확인하며 해인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의 아킬레우스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온 그는 가장 먼저 해인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눈길에 해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별일 없었어요. 다친 곳도 없고 멀쩡해요.”

정말 별일이 없었느냐면 그건 아니겠지만, 일단 다친 곳이 없으며 멀쩡한 건 사실이었으니 완전한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본인의 주장대로 아킬레우스가 보기에도 해인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므로, 그는 겨우 화를 누르며 답했다.

“……그래.”

어쨌든 그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숨을 내뱉으며 해인을 자신의 뒤로 보내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구도를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가멤논을 비롯한 다른 장군들은 여태 다른 움직임 없이 굳어 있었다. 덕분에 아킬레우스는 불과 방금 전까지 아가멤논과 해인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아가멤논을 말리려 들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

그는 헛웃음 같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제야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여전히 아가멤논의 팔을 붙들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급히 손을 떼어 냈다. 넋을 놓고 반대쪽을 붙잡은 채 있던 아이아스 역시 챙겨서 아가멤논으로부터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말거나 아킬레우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아가멤논을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오디세우스는 혹여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당장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길질이라도 할까 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리 아킬레우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명백하게 멸시하는 눈길로 아가멤논을 응시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오디세우스가 알아 왔던 아킬레우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분노였다.

본인에게 향하는 시선이 아님에도 괜스레 수치스러운 기분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그 눈길에 다시 마음속 깊은 곳의 열등감을 찔린 아가멤논이 되레 목소리를 키웠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현이기도 했다.

“이, 이 내게 존중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그딴 눈으로 나를 보다니!”

“존중…….”

아킬레우스는 치닫는 역겨움을 누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해인이 등 뒤에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 몸이 먼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해인에게 이 이상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충동을 막아 세웠다. 아슬아슬했으나,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뒤에 선 해인이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아 오는 감각을 자각했다.

직감적으로 싸움을 말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 상황에 겁을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불쾌한 공간을 빨리 벗어나는 것, 하나뿐이다.

“이런 역겨운 짓을 사주하고도 그런 말을 당당히 내뱉는 걸 보면 아트레우스 핏줄의 수준도 알 만하군. 존중받고 싶거든 그럴 만한 사람부터 되는 게 먼저겠지.”

짓씹듯 말을 내뱉은 그는 아가멤논을 가만히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돌아가자.”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 오디세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아가멤논의 아버지 이름까지 들먹이며 그 가족의 일원을 싸잡아 욕하기는 했지만, 오디세우스는 최소한 드잡이질 정도는 오갈 줄 알았다. 생각 외로 너그러운 종결이었다.

다만 아가멤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직전보다도 더 분개하며 달려들려 했다. 이미 터진 문제가 이 이상 커지면 연합군 전체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을 직감한 오디세우스가 다급히 그를 막아 세웠다.

그사이 해인은 어깨를 감싸 오는 손에 이끌려 막사를 벗어났다. 걸음을 옮기며 해인은 힐끗 눈을 들어 아킬레우스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일이 커지는 것은 어떻게든 막은 듯했지만, 바로 곁에 붙은 아킬레우스의 가라앉은 기분이 더없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게 최선인 것 같았는데.’

해인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았던가 싶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

아가멤논의 진영 바깥에는 파트로클로스가 전차를 세워 둔 채 안절부절못하며 빙글빙글 한자리를 돌고 있었다. 도통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해인과 아킬레우스, 그리고 리노스 일행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달려와 해인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떤 불쾌한 일이 있으셨거나…….”

“괜찮아요. 다친 곳 없고, 별다른 일도 없었어요.”

아까 전 아킬레우스에게도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고서야 파트로클로스는 한결 안심한 낯을 했다. 뒤이어 그는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으나, 몹시 기분이 가라앉은 티가 나는 낯을 확인하고는 차마 질문하기 어려워 말을 삼키는 듯했다. 그 기색을 본 리노스가 슬쩍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언질을 해 주었다.

“……왕자님께서 참고 넘어가셨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눈을 크게 뜨며 확인했다.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확답을 듣자 파트로클로스는 정말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아킬레우스를 돌아봤다가, 뒤이어 감사함을 담은 시선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으로서는 영문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전차에 올라탔고, 다시 아킬레우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진영에 도착하여 막사에 들어서고 나서야 해인은 이번 일의 발생 경위와 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가 기꺼이 설명을 자처했다.

일의 발단은, 아가멤논이 사제의 딸을 돌려보내고 그 대신 아킬레우스에게 배정되었던 전리품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을 사제의 딸 대신 가지겠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그런데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브리세이스였으며, 그녀는 최근 며칠간 해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오갔다.

아가멤논의 명령을 받고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도착해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전령들은 곧장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향했고,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다짜고짜 막사에 있는 여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브리세이스는 막사 밖으로 잠시 나가 있었던지라, 막사에 남아 있던 이는 해인 혼자뿐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모두 들은 해인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래서 마침 저를 브리세이스라고 착각했다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쓰게 웃으며 비슷한 투로 답했다.

그러한 전개를 거쳐 방금 전 아가멤논의 막사에서 고성이 오가는 위기와 절정이 있었고, 그 끝에 지금과 같은 결말이 온 것이다. 해인은 아까 전 막사 안에서 만났던 오디세우스의 말과, 그로부터 자신이 떠올렸던 의혹을 상기해 냈다.

‘정말 오해가 맞았네. 심지어 나마저도…….’

전령들이 브리세이스를 찾는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도 못 하고, 해인은 아가멤논이 어째서 자신을 아는지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뭐라 할 것 없이 그녀도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황을 제대로 알았다 하더라도 곧이곧대로 브리세이스를 내다 바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파트로클로스는 재빠르게 곁눈질을 통해 막사 한편에 선 채로 가구처럼 침묵하고 있던 아킬레우스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줄여 속삭임을 덧붙였다.

“일이 커지는 걸 막으려고 우선은 저쪽의 요구대로 따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잘하셨어요.”

해인은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가요?”

“예, 저는 정말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말하면서도 파트로클로스는 재차 눈을 굴려 또다시 아킬레우스의 눈치를 봤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아킬레우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만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아마 해인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며 여러 번 말해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그녀는 그 순간 할 수 있는 대처들 가운데서는 최선이라 말해도 괜찮을 법한 선택지를 골랐다.

게다가 해인의 그런 노력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어쨌거나 아킬레우스도 웬일로 아가멤논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의 명백한 무례에도 참을성을 발휘하며 너그럽게 넘어간 모양새가 된다.

이제는 총사령관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상황은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파트로클로스는 잘 해결되었다며 이대로 안도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내내 침묵을 지키는 아킬레우스가 몹시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저 조용하게 있는 것뿐이라 여기기에는 등골마저 오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화난 나머지 입을 닫아 버린 것 같았다.

물론 아가멤논이 저지른 건 보통 무례가 아니었으니 얼마든지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분노로 인해 무언가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것이다. 느껴지는 불길함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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