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4)화 (104/149)

연합군에 소속된 모두를 공정하고 지혜롭게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어린애가 억지 쓰는 것마냥 이런 짓을 벌였다. 이미 충분히 늦었으나, 그렇다 한들 이제라도 그만두지 않으면 아가멤논은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든 신뢰받을 수 없었다.

“지금 이 행동은…….”

답답한 마음으로 말을 잇던 오디세우스는 불현듯 시야 한구석에 걸린 낯익은 얼굴에 멈칫하고 말았다.

들어온 직후에는 곁에 서 있던 병사의 몸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저 여자인 것만 확인한 나머지 ‘그 소문’이 사실이며 저 여자가 이 일의 희생양임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짧은 찰나에 똑바로 얼굴을 확인하게 되자, 오디세우스는 그만 아연해졌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쉽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생김새를 가진 데다, 만남의 상황마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저 아가씨가 왜 여기 있어.’

속으로 황망하게 중얼거린 그는 하던 말마저 멈추고 말았다. 그 침묵의 시간은 동시에 상황을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불과 몇 초, 짧은 순간 동안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오디세우스는 평소에도 이처럼 주변의 일들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이었기에 결론은 금세 나왔다.

‘……설마.’

그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를 떠올리며 탄식했다.

‘전리품을 빼앗으려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보낸 수하들은 그 마당에 사람을 착각하고 데려온 건가? 저 아가씨를 포로로 오해하고?’

단지 혼자만의 짐작일 뿐이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거의 사실에 가까우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저편에 서 있는 해인의 표정만 봐도 그랬다. 겉으로는 침착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상황에 대한 의문만은 분명하게 엿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도 못 들은 모양이었다.

‘……망해도 이렇게까지 망할 수가.’

오디세우스는 한탄처럼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광경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저 아가씨를 대하던 태도가 어떠했는지, 그 눈빛, 손짓, 표정, 모든 것이 선명했다.

아킬레우스는 그와 명백히 우호 관계인 오디세우스 자신의 호기심조차 용납하지 못해 날을 세웠다. 누구에게든 존재하는, 결코 손대서는 안 되는 부분. 적어도 지금의 아킬레우스에게는 그게 바로 저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생각할수록 가관이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디세우스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가멤논은 그를 의아한 기색으로 잠시 노려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와 그대들이 무어라 말한들 들어주지 않을 것이오. 나를 더 번거롭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총사령관!”

오디세우스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이가 당혹스러운 듯, 혹은 아가멤논의 무례한 말투에 분노한 듯 외쳤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말조차 듣지 않은 아가멤논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젊은 장군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리 없었다. 아가멤논은 그때까지도 멀찍이 선 채 상황을 관망하던 해인을 돌아보고,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오라 했건만 듣지도 않는군. 그런 식으로 굴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는 해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섰다. 시선의 높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그리 많이 차이 나지는 않았으나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지낸 사람답게 체격이 좋아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대놓고 검 위에 손을 올릴 수는 없던 리노스가 몸을 긴장시키고, 해인은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닐 때 보았더라면 위엄 있는 왕 같다고 생각했을 법한 얼굴이었으나, 멀리서부터 보았던 불쾌한 눈빛은 가까이서도 변함없었다. 무심코 꺼리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난 듯, 아가멤논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뻗었다. 턱을 잡아 올리려는 것처럼 손끝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손이 닿기 직전, 해인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 내고 말았다.

“……헉.”

결코 작지 않은 마찰음에 막사 안에 있던 여러 사람들 중 누군가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사실 놀란 것은 쳐 낸 당사자인 해인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 불쾌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당황은 잠깐이었다. 해인은 숨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힐끗 곁눈질했다가, 잠깐 흔들린 표정을 다시 가다듬었다.

‘아니, 그렇지만 먼저 무례한 건 저쪽이었잖아…….’

이 시대에서 여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굳이 나서서 알아보지 않아도 대략 짐작이 갔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시대에 맞춰 손수 먼저 무릎을 꿇어 주기는 싫었다. 해인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 다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무작정 명령한다고 들어야만 할 이유는 없죠.”

“……뭐?”

손이 쳐 내진 것에 당황한 듯 아가멤논이 짧게 반문했다. 해인은 리노스가 줄곧 경계를 풀지 않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신분의 차이가 있을 테니 만약의 경우가 벌어져도 완벽하게 막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곁에 지켜 주는 사람이 있으니 지금처럼 입은 여유로운 척하며 움직일 만했다.

“소란을 피우기 싫어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왜 여기까지 불렀는지, 제대로 된 이유 정도는 이제 들어 보고 싶은데요.”

말을 맺은 순간 막사 안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날을 세우던 리노스도 무심코 해인을 힐끗 돌아볼 정도였다.

살아오며 지금처럼 자신에게 드러내 놓고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다며 뻣뻣하게 구는 사람을 본 적 없던 아가멤논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가, 천천히 상황을 파악한 후 금세 새빨간 얼굴을 했다. 명백한 분노의 색이었다.

“이……!”

“총사령관!”

손을 휘두르려는 듯 아가멤논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잖아도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켜 보려고 했던 오디세우스가 다급히 뛰어들어 그의 팔을 붙잡고, 리노스가 빠르게 해인을 뒤로 보냈다. 오디세우스에게 붙잡히고도 아가멤논은 그를 떨쳐 내려는 듯 기를 썼다. 오디세우스의 다급한 눈짓에 그와 함께 들어온 다른 장군이 뒤늦게 달려와 오디세우스가 잡고 있는 곳의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그때 봤을 때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과 힘 싸움을 하는 마당에도 힐끗 해인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서 마주쳤을 때는 다소 예민한 낯을 하고 있는 데다 목소리도 조용했다.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얌전하고 차분한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말투만은 차분하더라도 말의 내용은 결코 얌전한 사람이 내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맞기 전에 그가 뛰어들어 붙잡았다지만 체격 좋은 남성이 손을 치켜들면 겁먹을 법도 한데, 해인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을 뿐 기가 죽은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새 아가멤논을 아주 쓰레기로 보는 눈빛이로군.’

화난 아가멤논을 제압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망정이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헛웃음이라도 터트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생각대로, 해인은 비로소 아가멤논에 대해 스스로의 감상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손을 써?’

이제까지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 온 탓에 무의식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으나, 그런 생각은 의미 없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뭐, 저 사람은 이 시대의 왕이니까 내가 그런 걸 물어볼 자격도 안 되면서 나서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손을 올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 사람에게 양쪽에서 붙잡혀 반 강제로 아까보다 조금 진정된 것 같은 아가멤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입을 더 열려는 기색을 보이자 오디세우스가 다급히 끼어들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잠시만! 아가씨,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총사령관, 우선 물러나서…….”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가 입을 열어도 소용없는 법이었다. 아가멤논이 다시 욱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해는 무슨, 그대는 나서지 마! 그리고 네년, 네년은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소릴 하나? 부르면 부르는 대로 와야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명령을 무시하고 이유를 묻고 있어!”

그러나 해인은 그의 말보다는 오디세우스가 꺼낸 말에 조금 더 신경이 쏠려 있었다.

‘오해?’

그러잖아도 상황이 이상하다고는 아까부터 줄곧 생각해 오고 있었다. 물론 오디세우스도 그저 말을 꺼내기만 했을 뿐이니, 어떤 종류의 오해인지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조금 생각을 거듭해 본 해인은 떠오르는 것들 가운데 가장 큰 의혹을 무심코 입 밖으로 꺼내 들고 말았다.

“그럼 제가 누군지는 아세요?”

……본의 아니게 말꼬리를 잡고 시비 거는 것 같은 어조가 되었지만, 정말 본의는 아니었다.

어차피 해인은 이곳에서나 현대에서나 귀족도 왕족도 아닌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아가멤논처럼 당당하게 남들의 복종을 바랄 수 있는 계급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앞 뒤 안 가리며 시비를 걸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정말, 순간적으로 궁금했을 뿐이다.

말을 내뱉고 스스로도 아차 한 해인은, 지금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오디세우스조차 며칠 전 처음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랐음을 애써 상기했다. 아킬레우스와 우호적인 관계의 사람조차 해인의 존재를 몰랐는데, 파트로클로스마저 종종 투덜거릴 만큼 아킬레우스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가멤논이 해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렀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오디세우스가 말한 ‘오해’가 사람을 착각한 것이었다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된다.

서늘한 분위기의 막사 안에서, 해인은 의도치 않게 진실에 근접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아가멤논이 이처럼 화를 내고 있음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해인을 보며 저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당혹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화를 낸 당사자인 아가멤논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이쯤 돌아가자 무언가 정말 잘못된 것은 아닌지, 어쩌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진 탓이다.

그 순간이었다.

막사 바깥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천이 크게 펄럭이며 누군가가 막사 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