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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의 진영은 아킬레우스의 진영으로부터 꽤 떨어져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차를 타고 가더라도 제법 오래 달려야 했다. 그 끝에 도착한 진영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아킬레우스의 진영과 별다르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풍경을 갖추고 있었다.
일행은 그대로 전차에서 내려 곧장 아가멤논의 막사 앞으로 향했다. 도착한 막사 앞에서 전령이 지시를 이행하고 돌아왔음을 고하는 동안 해인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커다란 막사를 응시했다.
이제까지 봐 왔던 어떤 막사들보다 컸지만, 이곳의 주인이 ‘총사령관’인 것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커다랗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할 것 없이 그저 평범한 막사였다.
다만 아직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서 있음에도 안쪽의 소란스러움이 선명하게 들려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조금만 집중해 보자 내용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해인은 곁에 있던 리노스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안쪽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총사령관의 목소리 같은데, 설마 부관과 싸우고 있는 건지…….”
소리 죽인 답이 돌아왔다.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전령의 말이 전해진 듯, 안쪽의 소란이 뚝 끊겼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내 들어오라는 허락의 말이 막사의 천을 넘어왔다. 전령은 뒤를 돌아보고는 해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들었겠지? 들어가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불안한 눈길로 리노스를 힐끗 응시하더니, 직전에 비해 한결 조심스러워진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까지 따라오는 걸 묵인했으니 안쪽까지는…….”
“뭐? 웃기지 마라!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전령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리노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화를 냈다. 전령은 순식간에 식겁하며 리노스의 입을 막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어딜 잡으려 들어!”
실질적으로 따져 리노스가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전령은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셈이었다. 따라서 리노스가 지금처럼 큰 소리를 내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드러내려는 듯 굴면 곤란해지는 것도 결국에는 전령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리노스는 소란을 피우는 것을 굳이 망설이지 않았다.
작정하고 과장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상황 탓에 반쯤 주눅 든 사람이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가멤논의 진영까지 오는 동안 은밀히 합의된 행동이었으므로 해인도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선 채 리노스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전령은 안쪽의 눈치를 보며 리노스를 제압하려다 실패했고, 결국 그들이 함께 총사령관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버려 두고 말았다.
평범했던 막사 바깥과는 달리 안쪽은 상당히 화려했다.
특이할 것 없는 풍경에 무심코 조금 긴장을 풀고 있던 해인은,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당황하며 사방을 짧게 살폈다. 단순히 전쟁터에서 잠시 지내는 장소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과한 가구들이 자리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정면에 위치한 거대한 의자였다.
그건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가구였다. 물론 그렇게 되기에는 위치의 이점도 있었지만, 솔직히 구석에 있었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금과 은, 여러 보석들로 장식되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위에 오만하게 앉은 사람을 보며 해인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화려한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그것을 강조하면, 보는 사람의 눈에도 그 사실이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아가멤논에 대해 좋지 않은 말만 조금씩 들어온 탓인지 사소한 것으로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사고에 해인은 슬쩍 눈을 굴렸다. 그러나 오만하게 앉은 중년의 남자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그리 잘못되고 편협한 것은 아니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한 겹 막으로 덮인 듯 탁하게 번들거리고 있다. 그 눈빛은 그가 가진 다른 좋은 외적인 요소들을 모두 덮어 버리고도 남을 만큼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왔군, 상당히 오래 걸렸어…….”
말끝을 늘이며 총사령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곁에 딸린 자는 뭐냐. 옷을 보아하니 아킬레우스의 병사인 것 같은데?”
아가멤논의 시선이 리노스에게 머무르더니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곁에 있는 이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눈길에 반사적으로 흠칫한 해인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총사령관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던 리노스가 다급하게 해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들 대신 상황에 대해 설명을 꺼낸 건 해인과 리노스를 들여보내고 뒤따라 막사로 들어왔던 전령이었다. 그는 아가멤논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진영의 하인에게 물어봤더니, 이번 전리품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여자가 아킬레우스 님의 막사에 드나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막사로 향해서 발견한 게 저 여자였고요. 그 때문인지 곁의 저 병사도 어떻게든 따라오려 들던데, 그쪽 진영에서 소란을 더 피우기도 어려운 탓에 미처 떨어트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놈의 막사에 드나든다고?”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졌던 전리품 가운데 가장 신분 높은 여자를 분풀이 삼아 대신 가져가려 했을 뿐, 그가 이미 취하기까지 한 여자를 뺏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아가멤논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아가멤논은 이번 일을 통해 어떻게든 아킬레우스를 한번쯤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조금만 이성적이었다면 여기서라도 멈췄어야 했으나, 지금 총사령관을 떠밀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쌓여 왔던 열등감이다. 그것들이 최근의 일을 통해 분노로 변질됐고, 보통 그런 감정들로부터 시작된 행동은 진정 끝을 보기 전에는 거두기 어려운 법이었다.
아가멤논은 지난 세월을 곱씹었다. 분명 이 연합군 가운데 가장 지체 높은 자는 자신이건만, 모든 전장에서의 가장 큰 영광과 더불어 수많은 병사들의 존경을 쓸어 가는 것은 아킬레우스였다.
‘한때는 그것을 기특하게 여겼건만…….’
처음 이 땅, 아나톨리아에 도착했을 당시 아킬레우스는 고작 열다섯의 소년이었다.
아름다운 낯의 소년이 보여 주는 무위는 기대하지 않았을 만큼 눈부셨다. 젊은이의 유려한 검 끝에 따라오는 승리의 영광, 그것을 좋게 보았기에 간혹 아킬레우스가 오만하고 무례하게 굴더라도 좋게 넘어갔던 것이 여러 번이다. 이미 그만한 자식을 두었던 그는 아킬레우스의 행동들을 덜 자란 이의 치기라고 여기고 넘어갈 여유가 있었다.
더불어 기대한 바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훌륭해질 것이 분명한 저 소년이, 철이 들면 자신의 너그러움에 감사하며 숙이고 들어오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동맹을 맺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마침 자신에게는 나이가 찬 딸도 있었으니 혼인으로 엮어 두면 결코 손해는 아니리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는 자신의 생각과 기대가 틀렸던 것임을 어렵게 인정해야 했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지 못했다. 그가 했던 생각들 중 유일하게 맞았던 것은 그가 갈수록 더 훌륭해지리라는 것뿐이었다. 매 순간마다 영광을 더해 가며, 아킬레우스는 ‘감히’ 자신을 휘두르려 드느냐는 듯 갈수록 거침없이 행동했다.
그의 빛나는 업적에 모두가 묻혔다. 이곳에서 모든 이들의 위에 있어야 마땅한 자신마저!
“그래,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법…….”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가멤논은 고개를 돌려 다시금 해인을 응시했다. 제법 간이 큰 듯 겁먹은 기색 없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 온다. 저렇듯 기죽지 않고 당당한 여자는 그리 취향이 아니지만, 애초에 취향을 따져 가며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취향을 차치하고 보면 제법 괜찮게 생기기도 했다. 앳된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아름다움이 바래지지는 않았다. 당장 동침할 생각까지야 없다지만, 잠깐의 유흥거리로 부족하지 않을 성싶었다.
동시에 이쪽 지역 출신은 아닌 듯한 외모인지라 찰나에 의문이 스쳐 지나가긴 했으나, 반대로 전리품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이라 했으니 아비 되는 자가 어디 머나먼 타국의 여인을 취해 낳은 자식이겠거니 생각하면 납득이 됐다.
생각을 정리하며, 그가 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거기 뻣뻣하게 서 있을 테냐? 이리 가까이…….”
그 순간이었다.
막사의 문으로 드리워져 있던 천이 거세게 펄럭이더니, 누가 보더라도 초대받지 않은 것 같은 손님 몇몇이 막사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총사령관!”
해인은 막 안으로 발을 내디딘 이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불과 며칠 전 봤던 사람이었으니 잊어버리지 않았다. 오디세우스였다. 해인조차 알아본 것을 아가멤논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해인이 모르는 다른 두 사람의 이름까지 아는 사람이었다.
“……오디세우스, 그리고 아이아스와 디오메데스로군.”
아가멤논이 방해받아 느끼는 불쾌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그들을 불렀다. 그러나 선두에 서 있던 오디세우스는 그런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웠음은 우선 사과하겠소.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은 나머지, 이처럼 급히 방문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야겠군.”
“무엇이 문제인가?”
당당한 물음이었다. 기가 막힌 오디세우스가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나는 그대가 가진 권위를 존중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에 한해서일 것이오. 지금 그대는 이상하군. 대체 왜 난데없이 아킬레우스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굴기를 작정하시오?”
그 말 그대로였다.
본래 나쁜 소식들이 전해지는 속도는 빠르기 마련인 법이다. 아가멤논이 사제의 딸을 선물해 준 이가 아킬레우스임을 트집 잡으며, 그에게 넘어갔던 전리품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탈취해 오려 한다는 소식은 날개라도 단 듯 전 진영으로 빠르게 퍼졌다.
이 소식은 들은 순간 누구라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전리품은 한 개인이 이룩한 영광의 대가로, 그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의 영광을 빼앗겠다는 것과 같았다. 전장에서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무례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아가멤논은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