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02)화 (102/149)

부관이 제대로 말릴 틈조차 없이 말이 이어졌다.

“마침 그는 전리품으로 다른 여자 포로들도 제법 데려갔지. 그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여자를 오늘 돌려보낸 사제의 딸 대신 받아 와도 나쁘지 않겠군.”

“예? 하지만 총사령관님, 그건……!”

말이 ‘받아 온다’지, 사실상 강탈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발언이었다.

타인의 전리품을 뺏겠다는 것은 그의 명예를 뺏겠다는 뜻이다. 아무리 아가멤논이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강대국의 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무례였다. 경악한 부관이 다급히 만류하려 들었으나 아가멤논은 오히려 그런 부관을 노려보며 철회하지 않겠다는 듯 명령했다.

“전령 두 명을 불러와라.”

……그리하여 불려 온 운 나쁜 전령 둘은 그대로 최소한의 설명만 들은 채 아킬레우스의 진영으로 가야 했다.

한낱 전령이라도 이 명령이 몹시 부당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권력을 가졌고, 전령들은 그것을 감히 드러내 놓고 거부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킬레우스의 반응도 두려웠지만 전령들이 속해 있는 곳은 아가멤논의 진영이었다. 먼 권력자보다는 가까운 권력자가 더 무서웠다.

‘가장 신분이 높은 여자’라는 단서만 붙잡은 채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도착한 전령들은 눈앞에 지나가는 하인들을 다짜고짜 붙잡아 다그쳤다. 그 결과 그들은 이번에 잡혀 들어온 포로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의 여자’는 브리세이스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그녀가 최근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령들은 정말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오는 동안 내내 아킬레우스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슬쩍 데려갈 수는 없을까 고민했건만,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이미 드나들기 시작했다면 이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물론 원래도 심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의 다섯 배는 더 복잡한 문제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자신이 품은 여자를 빼내 간 우리를 그 반신이 내버려 둘까?”

“내도록 숨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절벽으로 떠밀리는 심정을 느끼며 그들은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으로 향했다.

심적으로 몰려 있었으니 그 앞을 지키는 두 명의 병사들에게 예의 바르게 굴 여유도 없었고, 때문에 상황을 다소 거칠고 자세하지 않게 설명하고 말았다. ‘막사 안에 있는 여자를 내놔라’ 정도로 요약이 가능했다.

당연하게도 시비가 붙었다.

그들과 대등하게 싸우기에는 명분이 몹시 부족했으므로 우선은 물러났으나, 막상 아가멤논의 앞으로 되돌아가려니 두려워졌고……. 머뭇거리며 다시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으로 걸음을 되돌렸을 때, 때마침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나오는 묘령의 여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그리고 다소 앳되기는 했으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보자마자 눈에 확 띄었으므로 그들은 급히 달려갔다.

전령들에게 그 여자의 이름이 브리세이스인지 아닌지 확인할 틈 따위는 없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들은 이미 하인들을 다그쳐 들은 여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 어쨌든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이번 포로들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여자’가 드나든다고 했고, 저 여자는 방금 그의 막사에서 나왔으니 찾는 여자가 맞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다행히 아킬레우스도 부재중이었으므로 전령들은 그가 없는 틈에 여자를 윽박질러서라도 아가멤논의 앞으로 데려가려 했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 두 명이 ‘아가씨’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아킬레우스와 이미 제법 깊은 관계인 듯싶었고, 때문에 더 아찔해지는 심정이기는 했으나, 그런 만큼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고 이 상황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다.

***

……그러나 일은 그들의 바람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고, 지금처럼 팽팽한 대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이 겁나지 않나? 신분이 높은 여자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초조하게 생각하면서도 전령은 자신이 떠올린 비겁한 의문에 낯이 뜨거워졌다.

말했지만 그도 지금 자신의 행동, 나아가 아가멤논의 명령이 근본적으로 몹시 잘못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억지도 그런 억지가 따로 없었다.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다른 장군의 전리품을 함부로 빼앗아 취하겠다며 우기다니, 새삼스럽게 떠올리자 말단 부하나 다름없는 그들조차 수치스러웠다.

초조함, 수치스러움, 그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갈 곳 없는 분노가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화를 낼 처지가 안 된다 하더라도 이기적인 심정으로는 어쩌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일 뿐, 그와 대치하고 있던 리노스나 텔라몬은 조금씩 기세가 거칠어지는 상대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날카롭게 선 날붙이가 기어코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이 완전히 날을 세우자 다른 쪽도 사정이야 어쨌든 대응해야 했다. 양측 모두 원인은 달랐지만 나란히 분노한 상태였으므로 분위기는 점점 더 과열되어 갔다.

‘……총사령관이라.’

해인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짝 살폈다.

불과 얼마 전, 아킬레우스가 리노스와 텔라몬을 제외하면 다른 병사들은 아킬레우스의 막사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조치했던지라 지금처럼 소란이 벌어졌음에도 이쪽으로 와 보는 이들은 없었다. 들리지 않으니 관심도 가질 일이 없는 탓일 것이다. 혹은 먼발치에서 보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기는 아킬레우스의 진영이니까, 계속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언젠가는 누구든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올 테고 그러면 저 사람들은 물러나야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분위기가 점점 더 빠르게 무거워지며 날이 서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여전히 듣지 못했지만, 총사령관의 전령들은 그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였으며 해인을 데려가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그리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자연히 리노스와 텔라몬도 더 경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이 더 커져서 좋을 건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제법 이전부터 들어 왔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누구든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곧 유혈 사태라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고, 가정일 뿐이지만 정말로 어느 한쪽이 피를 본다면 이미 역병 사건으로 뒤숭숭한 연합군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다.

물론 해인은 어차피 지금처럼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연합군에 대해 별다른 호감도 없었으니 연합군의 상황이 악화된다 한들 대단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막아야겠다고 결론지었다.

일이 벌어졌을 때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머무는 이상, 나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그건 아킬레우스 책임이 된다.’

더군다나 지금은 이유도 모른 채 다짜고짜 누군가 불렀다며 끌려갈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왜 불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원인으로 지목되면 억울할 것 같았다. 해인은 이 이상 일을 키워 핏빛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방법을 갈등하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불렀다니 가 보죠.”

과열되어 가던 분위기가 찰나에 깨졌다.

“아가씨!”

급히 뒤를 돌아본 리노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리듯 해인을 불렀다. 해인은 재차 한숨을 내쉬고는,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설명하는 대신 전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확한 사정이야 여전히 모르겠지만, 설명 듣고 있을 때도 아닌 것 같고……. 반응을 보니 굉장히 무례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뒷감당도 당연히 할 생각이겠죠.”

누가 듣더라도 그리 고분고분하지는 않은 어투였다. 직전까지도 예민하게 날 서 있던 전령은 찰나에 울컥해 화를 낼 뻔했으나, 새파란 눈과 정확히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해인의 말투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 내용은 쉽게 넘어갈 수 없었던 텔라몬이 만류하듯 입을 열었다.

“아가씨, 누가 보더라도 이건 저쪽이 무례했습니다. 굳이 맞춰 주실 필요도…….”

“하지만 여기서 일이 더 커져 봤자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요…….”

해인은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그런 이유라면 리노스와 텔라몬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이성을 되찾은 그들은 먼저 검에 손을 올렸던 게 본인들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잠깐 동안 입술을 꽉 깨물었던 리노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루어 저자들이 이제 와 새삼스레 예의를 차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해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하죠. 저도 혼자 간다고는 안 했어요.”

“……예?”

그녀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으나, 그녀를 제외한 주변의 네 명은 모두 한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잠깐의 침묵 후 전령들은 다급히 여자 한 명만 데려가겠다고 주장했으나, 온기 없이 돌아보는 새파란 눈길에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리노스와 텔라몬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랬다.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은 저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와 사람을 내놓으라며 패악을 부린 셈이었다. 바라는 대로 해인만 보내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어쨌든 해인이 아가멤논의 앞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인원의 수와 구성은 더 늘어나더라도 무관한 게 정상이었다.

해인이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말 나온 김에 그럼 리노스 님이 저랑 같이 가 주세요. 그리고 텔라몬 님은…….”

해인은 목소리를 낮추더라도 전령들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거의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저들도 이 일을 끝까지 불문에 부칠 수는 없음을 알겠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모르게 아킬레우스에게 상황을 알려 주세요. 그편이 일을 더 키우지 않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다른 진영의 가장 높은 사람이 억지를 부릴 때, 일을 빠르고 간단하게 해결하려면 이쪽의 가장 높은 사람을 불러오는 게 우선인 법이다. 상대가 총사령관이니 지위의 차이는 있지만, 먼저 무례했던 쪽도 총사령관이니 그 요소가 대단한 걸림돌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갈까요.”

비로소 다시 전령들을 돌아본 해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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