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물음에 리노스는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찰나의 머뭇거림 끝에 그가 되물음을 꺼내 들었다.
“……예?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물음으로부터 해인은 큰 소리가 나기에 앞서 자신이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가 오갔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서야 무언가 일이 생긴 걸 알아차려서, 뒤늦게 바깥이 조용해졌기에 나와 본 거예요.”
“아아.”
그 말에 리노스와 텔라몬은 나란히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뒤이어 정확한 영문은 모르지만 둘 모두 나란히 안도하는 낯빛이 되었다. 리노스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면 어떤 일이었는지는 지금 모르시는 겁니까?”
“……네.”
눈앞에 두고 있는 이들이 함부로 남을 놀릴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슬슬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묘한 표정으로 꺼낸 해인의 확답에 텔라몬이 그제야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러셨군요. 굳이 들을 필요는 없는 헛소리들이었으니 아가씨께서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갑작스러운 시비였을…….”
그러나 그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든 탓이다.
“……없다더니 역시 거짓말이었군.”
해인은 멈칫하며 시선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온 이들은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으며, 두 명이었고, 명백하게 낯선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들었던 듯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어째서 그런 느낌을 들게 만드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반걸음 슬쩍 물러나며 해인은 확신했다.
‘아까 싸우던 사람들이네.’
달리 말하자면, 리노스와 텔라몬을 아까처럼 분노하게 만든 원흉들이었다.
리노스와 텔라몬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그들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대여섯 걸음의 거리는 상대에 의해 금세 좁혀졌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 해인은 그들의 낯선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둘 모두 해인과 엇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거리가 좁혀지고 목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대화를 나누기 어렵지 않을 정도가 되자, 그들 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저 여자가 아킬레우스 님의 막사에서 나오는 걸 분명히 봤습니다. 막사에는 아무도 없다더니 이야기가 틀리잖습니까.”
“이야기가 틀리고 말고가 무슨 상관인가?”
리노스가 해인의 앞을 막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상대를 노려보며 연이어 물었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묻고 싶은데, 정말 왕자님이 없는 틈을 타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나? 아무리 명령을 받았다 한들 지금처럼 진지하게 수행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그건 당신들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겉으로나마 당당하게 내뱉었으나 상대는 리노스의 말에 몹시 흔들리는 눈치였다. 해인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낯선 이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어째서인지 애써 당황을 숨기려는 듯 흔들리는 눈을 했다. 리노스의 말대로 무언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는 물러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말대로 우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왕께서 지시하셨으니 전령인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비겁한 변명이로군. 아가씨, 더 들을 필요도 없으니 그만 들어가셔서…….”
“드, 들으시오!”
목소리가 겹쳤다. 양측 모두 해인에게 동시에 건넨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까부터 이 문제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해인은 비로소 그 짐작이 사실이었음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대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해인은 의아한 기분에 곧바로 몸을 돌리는 대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해인이 곧바로 몸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회라고 생각한 듯, 상대는 다급하고 초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줄곧 막사에 있었던 것 같으니 들었겠지만, 우리들은 미케네의 왕이자 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 왕의 수하로 그분의 명령을 받아 여기까지 왔소. 그분께서 그대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라 명하셨고, 이 장소에서 가장 지체 높은 분의 명이니 더 늦어지기 전에 따라야 할 거요.”
“아까부터 말했지만 수치도 모르나? 그런 무례한 소리를 정당한 이유도 없이 강조하다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텔라몬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해인은 멍하니 침묵했다. 다름이 아니라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는 여전히 이 상황의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모르는 사이 무언가 자신과 관련해 문제가 생겼음은 인지했으나 원인마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저들의 생각과는 달리 앞선 대화를 듣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유를 모르기에 더욱 의아했다.
‘그 사람이 날 왜 불러?’
이름이야 몇 번 들었다지만 해인은 총사령관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게다가 총사령관은 아킬레우스와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의 귀에까지 해인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 짐작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만 날 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부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명은 끝났으니, 어서…….”
해인이 상황을 파악하며 가만히 서 있자, 전령 중 한 명이 불쑥 앞으로 나오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뒤이어 해인의 팔이라도 붙잡아 끌고 가려는 기색으로 난데없이 손을 뻗었다. 그 동작에 곧바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온 리노스와 텔라몬이 기어코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상황은 일촉즉발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손 치워.”
“……총사령관의 명을 한낱 병사가 거부하겠다는 겁니까?”
“명령이 정당하지 않으면 누구든 거절할 수 있음을 모르나?”
리노스와 텔라몬이 먼저 무기에 손을 올리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듯 전령 두 명도 나란히 무기를 잡았다.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결국 해인은 입을 열고 말았다.
“잠시만요, 총사령관의 전령이라고요?”
“아가씨.”
리노스가 만류하듯 입을 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전령의 대답도 함께 들려왔다.
“……그렇소.”
“총사령관이 저를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죠.”
전령은 초조한 듯 울컥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들었지 않나? 왜 자꾸 똑같은 것을…….”
“못 들었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자른 해인은 상대의 표정을 확인했다. 원래는 잘 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이지만, 앞서 리노스와 텔라몬이 그토록 화를 냈던 만큼 무작정 예의를 차릴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날카로운 어투에 전령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해인이 쏘아붙였다.
“줄곧 무례하게 굴고 있는데 어째서 요구하는 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지, 제대로 된 이유부터 똑바로 설명해 보세요.”
그 말에 전령은 입을 달싹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만만하게 봤던 상대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인 탓에 당황스러웠고, 무엇보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미치겠네.’
상황이 이쯤 되자, 솔직히 지금 그는 가능하다면 이대로 전부 모르는 척해 버린 뒤 도망치고 싶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려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원망과 함께 자신이 모시는 미케네의 왕을 떠올렸다.
아까부터 내내 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권력자의 명령이라며 무작정 들이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도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상황의 시작은 오늘 아침이었다.
***
아폴론을 모시는 사제에게 그의 딸을 돌려주자마자, 전날까지 연합군 온 진영에 유행하던 역병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자신의 무례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사제에게 숙여야 했던 총사령관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두워진 낯으로 자신의 진영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갑작스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들더니,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자신의 부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보게. 그러고 보니 그 사제의 딸을 내게 준 게 아킬레우스였지 않나?”
“……예, 그랬기는 합니다.”
부관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문장 자체의 내용은 한 치 틀린 것이 없었지만, 그는 아가멤논이 평소 아킬레우스를 늘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시비 걸면 우스워지는 건 이쪽인데.’
부관은 내심 한숨을 삼켰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연합군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는 젊은 영웅을 조금 더 귀하게 여기라 조언하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아가멤논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때에 그런 말을 해 봤자 얻을 것은 없었다.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사제에게 무례하게 군 건 아가멤논 님이시고…….’
자신의 왕이 또 무슨 소리를 할지 긴장하며 부관은 아가멤논을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나도 안다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내게 그 여자를 건넨 것은 아닐 테지.”
“예,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게, 의도가 어쨌든 결국 나는 기껏 예뻐해 보려던 여자도 잃었고 체면만 구겼지 않나? 애초에 그 사제처럼 뒷배가 있는 여자가 아닌, 조금 더 다루기 편한 포로를 건네는 성의를 보였어야지. 늘 말하지만, 그는 존중하는 방법을 몰라.”
“그…….”
누가 듣더라도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아가멤논은 대체적으로는 왕답게 행동하는 편이었으나, 유독 아킬레우스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지금처럼 비이성적으로 굴었다. 부관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불길한 기분에 침을 삼켰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아가멤논이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참에 혈기 넘치는 젊은이에게 누가 윗사람인지 알려 주는 것도 좋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