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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사제의 딸을 돌려보냈다.
감격적인 부녀 상봉 이후 역병은 기다렸다는 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질 수는 없었으므로, 연합군 내부는 여전히 다소 어수선했다.
특히 아킬레우스 측은 더욱 그러했다. 사제의 딸을 총사령관에게 넘겼던 것은 어쨌거나 아킬레우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 자체는 엄밀히 말해 별다르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총사령관이 사제에게 보인 무례한 태도 때문이었으니, 정상적인 경우라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아킬레우스를 싫어하던 아가멤논이다.
전 진영에 있어 체면이 상해 버린 지금, 그가 이 문제를 꼬투리 잡고 늘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파트로클로스였다. 사실상 아가멤논에게 여자를 보내자고 했던 건 아킬레우스가 아닌 그의 의견이나 다름없던 탓이었다. 걱정에 짓눌린 파트로클로스의 채근에 못 이겨 아킬레우스는 진영 내부 회의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해인은 어제 그랬듯 막사 안에 남겨졌다.
브리세이스가 함께 있었으니 혼자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만큼 편안한 사이인 것은 아니다. 어색한 사이에 먼저 말을 걸며 대화를 이끌어 나갈 만큼 외향적이지도 않은 해인은 조용히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홀로 생각에 잠겼다.
‘괜찮으려나.’
아까 전 아킬레우스를 배웅하며 해인은 파트로클로스를 잠시 마주했다. 그는 이번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틀 전 리노스와 텔라몬으로부터 이번 일의 전말을 비롯해 총사령관과 아킬레우스의 관계에 대해서 전해 들었던 바가 있으므로, 해인도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이상 해인 역시 걱정을 전혀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해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외부인인 그녀가 괜히 말을 보탤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인간들 사이의 일이니까.’
물론 인간들끼리의 일이라고 해서 마냥 간단하지는 않고, 때로는 몹시 복잡하며 질척일 수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날까지의 역병처럼 신이 손수 거둬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리는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 이 시대 신의 힘이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것을 분명히 실감하게 된 해인은 새삼스레 한숨을 삼켰다. 아르테미스에 이어 아폴론까지, 정작 현대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사촌 남매들이 연이어 색다른 충격을 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역병은 순순히 없애 줘서 다행이네. 하긴, 아폴론 님도 다른 신들의 눈치는 봐야겠지.’
전쟁 중 트로이의 편을 들어주는 신들이 많이 존재하기는 해도, 그 반대의 입장 역시 그만큼은 존재했다. 게다가 연합군의 편을 드는 신들 가운데에는 아폴론보다 지체 높은 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바로 포세이돈과 헤라였다.
포세이돈은 신들 가운데 두 번째로 강한 존재이며 그의 숙부였고, 헤라는 제우스의 정당한 부인이자 신들의 여왕이다. 그들이 연합군을 지지하는 이상 트로이와 전면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역병 같은 걸로 연합군을 죄다 죽여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이어지며 점점 몸이 기울던 해인이 테이블에 반쯤 엎드리다시피 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줄곧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브리세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 네?”
사실 해인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별다른 유감이 없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지간히 무료해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말이라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말을 걸 만한 주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브리세이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지루하시면 이제라도 뭔가 드시는 건 어떨까요? 아침에도 그렇고, 내내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아.”
해인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원래도 음식을 대단히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데다가, 이곳에 온 이후로는 무언가를 굳이 먹을 필요조차 사라졌다 보니 식사 시간을 그리 정직하게 지켰던 적이 별로 없었다. 칼리에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했던 칼리에도 해인에게 익숙해진 이후로는 이 부분에 있어 알아서 유연하게 대처하고는 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와는 만난 지도 고작해야 삼 일째다. 게다가 이틀 전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대화를 나눴던 이후 사실상 처음 나누는 대화나 다름없었으므로, 해인이 평상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브리세이스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게 당연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해인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브리세이스도 아무것도 안 먹었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네에.”
진심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말만은 괜찮다는 답이 돌아올 것쯤은 예상했다.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같이 먹어요.”
같이 먹자는 말에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말을 보태 봤자 대화만 길어지고 해인은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브리세이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막사를 나가는 등을 배웅한 해인은 완전히 혼자 남겨지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에와 있을 때처럼 분위기마저 가볍게 바뀌는 것은 아니더라도, 같은 공간 안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불안하던 기분은 훨씬 덜했다.
‘사이야 어색하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네.’
상대가 아무리 조용히 있다 한들 인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고, 그 인기척이 느껴지는 만큼 신경이 분산되는 덕분이었다. 아킬레우스에게 굳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오히려 득을 보고 있는 건 자신 같아 해인은 괜스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브리세이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해인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테이블 끝을 가만히 응시했다.
언젠가부터 막사 바깥에서는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리노스와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그 내용을 들으려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해인은 굳이 그쪽에 집중하지 않고 흘렸다. 간혹 아킬레우스에게 용건이 있는 이들이 찾아와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말을 전하고는 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경우이겠거니 짐작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그 무슨 무례한!”
불시에 터져 나온 노기 어린 외침에 해인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목소리의 주인이 리노스였기에 당황스러움은 더 컸다. 그는 평상시 늘 온건한 낯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급할 때가 아니면 목소리를 잘 높이지 않던 사람이다. 저렇듯 명백하게 화내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 종류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텔라몬마저 합세해 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 미치기라도 한 건가? 지금 무슨 말을 전한 건지 모르겠나?!”
“미, 미쳤다니, 그쪽이야말로 말을 삼가십시오!”
심지어 이제는 낯선 목소리의 상대조차 같이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해인은 당황하며 미간을 좁혔다.
“……왜 싸우는 거지?”
아까 전 어렴풋이 대화가 들리기는 했지만, 굳이 내용에 집중하지 않고 배경 음악처럼 넘겨 버렸기에 어쩌다 상황이 저렇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인은 짧은 후회와 함께 뒤늦게나마 바깥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이미 늦은 듯, 바깥의 사람들은 서로를 무례하다고 평가하며 목소리를 높이기만 할 뿐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세이스가 나가고 지금 막사 안에 해인이 혼자 있다는 것을 리노스와 텔라몬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해인이 듣는 것을 감수하고서 저렇듯 싸울 정도라면 보통 큰일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나가 볼 수는 없겠고, 나가 봤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고.’
해인은 자리에 선 채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바깥의 소란이 곧 흩어진 탓이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다툼이었는데, 뜻밖에도 낯선 목소리의 주인들이 오래지 않아 물러났던 것이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며 막사 한가운데 서서 조금 더 기다리던 해인은 바깥이 완전히 조용해졌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막사의 문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바깥에서 저 정도로 큰 소리를 냈으면, 리노스와 텔라몬도 해인이 소란을 들었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 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마자 예상대로 리노스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소란스럽게 해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는 아직 분기가 남은 듯 낯빛이 붉었지만, 동시에 해인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리노스뿐만 아니라 곁에 서 있던 텔라몬도 마찬가지였다. 해인이 신중한 낯으로 그들의 표정을 살피자, 리노스는 애써 진정하려는 듯 깊이 숨을 내뱉었다.
“웬……. 무뢰배가…….”
그러나 그리 소용은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분노가 올라오는 듯 색이 달라지는 얼굴에 해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괜찮으세요?”
“후우, 예, 죄송합니다.”
“저에게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무슨 일이었는지 묻기도 애매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르는 척하며 넘어가기에는 무언가 신경을 건드리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큰 소리에 놀랐을까 봐 살피는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반응이 조금 더 격렬한 것 같았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어쩌면 자신이 연관되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해인은 눈가를 좁히며 이어서 물었다.
“큰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