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동이 터 올 무렵, 새벽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른 아침.
병에 걸릴 만한 원인은 없음에도 다수의 병사들과 하인들이 갑작스레 쓰러져 앓기 시작했다. 누가 가장 먼저 쓰러졌는지는 불분명했고, 병이 퍼지는 속도는 작위적일 만큼 빨랐다.
어슴푸레한 새벽하늘 아래 진영을 순찰하던 병사들은 불과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곁의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러잖아도 전날 진영 내에서 돌던 불길한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기어코 올 게 왔다는 심정이기도 했다.
멀쩡히 두 다리로 설 수 있는 이들은 자신마저 역병의 화살에 쏘이기 전 재빠르게 움직였다. 몇몇은 쓰러진 동료를 옮겨 격리시키고, 다른 몇몇은 상관들을 깨우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 도착한 병사는 목소리를 키워 외쳤다.
“왕자님! 큰일 났습니다, 왕자님!”
평상시라면 대단한 무례였겠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정상참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거침없었다. 그 덕분에 아킬레우스는 물론이고, 해인마저 나란히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평소 같지 않은 기상에 정황은 몰라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은 직감한 아킬레우스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 곁에서 눈은 떴으나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는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진 그는, 뒤이어 옷을 뒤집어쓰듯 걸치고 막사 바깥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지?”
나오는 것과 동시에 건네진 물음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급하고 망설임 없는 답이 돌아왔다.
“역병입니다! 여럿이 갑작스레 쓰러져 앓기 시작했습니다.”
단어를 들은 순간 아킬레우스는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역병.”
그도 전날 진영의 병사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았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괜히 입을 막아 봤자 심중의 불안만 가중시킬 듯해 내버려 두었는데, 정말 이렇게 날이 바뀌자마자 일이 벌어지는 꼴을 보니 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한숨을 내뱉고 물었다.
“내 부관들에게는 이미 알렸겠지?”
“예, 동료들이 각각 흩어져 향했습니다.”
“그래. 자네는 아직 멀쩡한 듯하니, 돌아가서 아직 상황을 모르는 이들에게 막사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고 알려 주도록.”
“알겠습니다!”
병사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급히 뒤돌아 달려 나갔다. 아킬레우스는 다시금 한숨을 내뱉고는 힐끗 하늘을 곁눈질하듯 올려다본 뒤, 자신도 등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해인.”
천을 걷으며 한 걸음 내딛자마자 그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던 해인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새 완전히 잠이 깬 듯 또렷한 눈동자였다. 아킬레우스는 심각한 낯으로 해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선 그가 쓴웃음과 함께 물었다.
“들었어?”
“……들었어요.”
병사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데다가, 그들이 막사의 문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눴기에 해인에게도 내용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짐작했기에 아킬레우스는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당부부터 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막사에 되돌아왔던 것이다.
“오늘은 막사 바깥에 나오지 마, 알았지?”
해인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답과 함께 되물었다.
“그럴게요. 당신은 바로 나가 봐야 하나요?”
“……그래야지.”
해인은 표정을 흐렸다. 그녀 역시 전날 병사들 사이에서 어떤 말이 돌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기에, 역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전체적인 상황은 금세 파악한 이후였다.
‘아폴론 님이 기어코…….’
아폴론은 관장하는 영역이 아주 넓은 신이다.
태양빛, 예언, 음악, 이성, 그리고 심지어는 의술 역시 그의 영역이다. 의술을 관장하는 만큼 질병 역시 그의 아래에 속해 있었다. 간혹 인간에게 분노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아폴론은 지금처럼 역병을 퍼트리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고는 한다는 것을, 해인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설마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시대와 자신의 상식은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 같았으면 다수의 인간들에게 다짜고짜 역병을 퍼트려 버리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기에 이런 상황을 미처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더라도 막지는 못했을 테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장 바깥에 나가야 할 아킬레우스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채웠다.
“꼭 조심…….”
해인이 차마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자, 아킬레우스는 눈을 내리뜨며 손을 뻗어 입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눌러 잇새에서 빼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미안해.”
“왜 사과해요?”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에 그대를 있게 해서.”
사실 그 말은 사과인 동시에 아킬레우스 본인의 불만이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못마땅했던 장소였다. 이런 일까지 벌어지자 정말 이대로 트로이고 뭐고 연합군에서 군을 빼 버리고 싶었다.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걱정하게 만든 것도.”
“……괜찮으니까 조심해요. 저도 바깥으로는 안 나갈 테니까.”
“그럴게.”
대답과 함께 뺨에 입 맞추고 나서야, 아킬레우스는 다시 막사를 나섰다.
***
숨겨서 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진영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전령을 내보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킬레우스가 반쯤은 예상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전령이 출발한 것은 그의 진영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전령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에 위치한 다수의 진영으로부터 온 전령들의 방문을 받은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진영에서만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연합군 소속의 다른 모든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모두는 지금 그들 전원에게 같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렸다. 사태의 원인도 명백했다.
아킬레우스는 나서서 아가멤논에게 따지려다 파트로클로스에게 붙들려 진영에 발이 묶였다. 그를 포함해 모두가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을 뿐, 실은 이미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결국 해가 완전히 떠오른 늦은 오전이 되었을 때, 줄어들지 않는 병자들의 수에 연합군 소속의 예언자인 칼카스가 나섰다. 아폴론에게 대놓고 어떻게 해야 그만둬 줄 거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결과 나온 해결책은 하나였다. 칼카스가 확언했다.
“전날 총사령관이 아폴론 님을 모시는 사제에게 저지른 무례 때문입니다. 그 사제가 아폴론 님에게 기도를 올렸고, 아폴론 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사제의 딸을 돌려보내는 겁니다.”
당연하지만 전날 사제에게 그토록 무도하게 굴었던 사람이니 만큼 총사령관은 쉽사리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고작 몇 시간, 늦은 오전에서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될 때까지 앓아눕는 병사들의 수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자 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전날 무례하게 쫓아냈던 사제에게 정중한 태도로 사람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딸을 돌려주겠노라 약속하자 진작 그랬어야 했다는 듯 앓아눕는 이들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미 앓고 있던 과반수의 사람들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수가 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숨을 돌린 셈이기는 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해인은 리노스와 텔라몬을 통해 막사를 막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바깥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리노스와 텔라몬도 오늘만큼은 쉴 줄 알았던 해인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이 되었을 때 당연하다는 듯 문가로부터 들려왔던 인기척에 그러잖아도 그들을 걱정하던 중이었다. 덕분에 더 이상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특히 더 안도할 수 있었다.
가만히 한숨을 내뱉은 해인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아프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해인은 아침부터 계속해서 그들에게 ‘오늘은 조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은연중 돌아가기를 권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는 진영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실제로 브리세이스도 오늘은 오지 않았다. 올 수 없다는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해인도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있어 아킬레우스의 명령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역병이 창궐하는 이때, 그 역병을 돌리고 있는 신의 눈에 띌지도 모르는 바깥에 사람을 둘씩이나 세워 두려니 도저히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듭된 권유에도 두 사람은 못 들은 척하며 꿋꿋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더 이상 전염된 사람들이 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해인에게 상황을 알려 준 것이다.
그들은 문 바깥에서 멋쩍은 듯 웃으며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지요. 다행히 화살이 저희는 비껴간 모양입니다.”
“네, 정말로 운이 좋았어요…….”
중얼거리듯 답하며 해인은 막사의 천 틈새로 한 줄기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가만히 노려보듯 응시했다.
딸을 잃고, 되찾으러 왔음에도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쫓겨난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한다. 어떤 심정인지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어도, 결코 마음이 잔잔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대우한 것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으니, 그 사제가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연합군을 고통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해도 충분히 납득이 됐다.
다만 그런 기도를 들었다고 해서 정말 곧이곧대로 연합군 전체에 역병을 돌려 버린 아폴론은 이해의 범위가 아니었다.
‘잘못한 사람한테만 뭐라 하든가. 아무 죄도 없는 불특정 다수한테 왜…….’
총사령관의 잘못으로 아무 상관 없는 병사 여럿이 앓아눕고, 그로 인해 아킬레우스마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뛰쳐나간 것을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니, 하지만 총사령관이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지금 같은 상황이 더 치명적일지도…….’
해인도 할 수 있는 생각을 신이라고 못 할 리 없다. 심지어 그는 ‘이 시대’의 신이었다. 앞서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한 일이라면 무어라 더 보탤 말도 없는 것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촌에 대한 유감을 속으로 삼키며, 해인은 조금씩 위치를 바꿔 기울어지고 있는 듯한 한 줄기 햇빛을 피해 괜스레 몸을 뒤로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