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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98)화 (9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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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아킬레우스는 어김없이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 전후 처리가 전쟁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이제 남은 곳은 사실상 연합군이 처음부터 상정했던 진정한 목표, 트로이였다. 연합군 전체는 물론이고 개개인의 지휘관들 모두 준비가 완벽해야 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새기고 있었다.

……매 순간마다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는 중인 아킬레우스를 제외한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해인 역시 불안정한 상태를 채 벗어나지 못한 아킬레우스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환과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두려움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 불안감에 반쯤 익숙해지다 못해 체념하기까지 한 탓에 겉보기에는 오히려 이전에 비해 훨씬 여유를 찾은 것처럼도 보였다.

혼자 있을 때면 어차피 내도록 생각에 잠겨 불안하기만 할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 만큼 그녀는 의식적으로 아킬레우스가 없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다시 예전처럼 막사 바깥에 자주 나와 있고는 했다.

그래서였다.

해인은 테베와의 전투가 끝난 이후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진영의 분위기가 오늘따라 유독 어수선한 것을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다니는 병사들의 수도 눈에 띄게 적었고, 어쩌다 움직이는 이들을 발견해도 그들 모두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혹시 진영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해인은 저 먼 곳에서 그들끼리 소리 죽여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변함없이 근처에 서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들은 해인이 알아차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더니,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미 해인이 수상함을 느낀 이상, 괜히 사실을 숨기려 들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텔라몬이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 진영에서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총사령관 진영 쪽에서 문제가 조금 있었다더군요.”

“문제가 생긴 건 그쪽인데 이쪽 병사들까지 불안한 얼굴을 할 필요가 있어요?”

“예, 그게……. 실은 전혀 연관이 없는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뒤를 이어 리노스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전날 왕자님이 파트로클로스 님의 권유로 포로 한 명을 총사령관에게 선물하셨는데, 그게 문제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지라 그렇습니다. 넘겼던 포로가 아폴론 님을 모시는 신전 사제의 딸이었는데, 오늘 아침 사제가 몸값을 들고 딸을 되찾으러 왔다더군요. 그런데……. 총사령관이 이미 자신이 받은 것이니 돌려줄 수 없다며 사제를 무력으로 쫓아냈다지 뭡니까.”

가만히 설명을 경청하던 해인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사제를 무력으로요? 그런 짓을 해도 돼요?”

지금처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무도한 느낌을 주는 사태였다. 리노스는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규칙이란 게 존재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누가 듣더라도 위반입니다.”

일개 병사가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거대한 미케네 왕국의 왕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으므로 애써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 가기는 했으나, 해인은 그의 목소리 속 기저에 깔린 감정을 어쩐지 읽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총사령관을 몹시 졸렬하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조였다.

리노스의 말이 이어졌다.

“때문에 굳이 저희 진영뿐만이 아닌 모든 연합군 진영이 지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아폴론 님을 모시는 사제가 신께 기도하여, 혹시나 아폴론 님께서 정말로 연합군에 벌을 내리진 않을지 다들 걱정하는 것이지요.”

“아…….”

기원전에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면 사제의 기도를 통한 아폴론의 벌 같은 것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해인은 이 시대의 상식이 자신의 상식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이기는 하지만,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군요…….”

그러잖아도 아킬레우스와 총사령관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언젠가 들어 알고 있던 해인은, 이쯤 되자 본 적도 없는 아가멤논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 머릿속에서 점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나빠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해인의 표정을 본 리노스는 뒤늦게 멈칫하며 수습을 시도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일은 누구의 잘못인지가 이미 명백합니다. 왕자님께서 총사령관에게 넘긴 포로가 시발점이었다 한들 그 부분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제에게 거칠게 군 건 총사령관이니, 연합군의 모두가 총사령관을 성토하는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비록 이번엔 실수했어도 총사령관 역시 거대한 일국의 군주인 만큼, 곧 마음을 달리 먹을 겁니다.”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인에게 희망찬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리노스는 자신의 말에 그리 확신을 갖지 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물고 늘어져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괜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해인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상황을 정확히 아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마음이 편하네요.”

“아닙니다.”

답을 들은 그녀는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슬쩍 막사 안으로 되돌아갔다.

“아가씨, 대화는 끝나셨나요?”

“아, 네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히 스툴에 앉아 있던 브리세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며 해인을 반겼다. 순간 멈칫한 그녀는 어색하게 말끝을 늘이며 답했다.

사실 막사 안에도 어제부로 이처럼 사람이 있기 시작했으니, 이제 어디서든 해인이 혼자 있을 만한 순간은 다시금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어차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거라면 브리세이스보다는 리노스와 텔라몬이 편했기에 바깥에 나섰던 것이었는데, 바깥 분위기가 저렇게 어수선한 이상 막사 안보다 좋을 것도 달리 없어 보였다.

해인이 한숨을 삼키며 테이블 앞 의자에 걸터앉자 곧장 근처로 다가온 브리세이스가 말을 걸어 왔다.

“어딘가 안 좋으신가요? 뭔가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기…….”

목소리가 겹쳤다. 그러나 브리세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다물었으므로 해인은 어쨌거나 먼저 말을 이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말을 골라냈다.

“브리세이스.”

“예, 아가씨.”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요.”

“예?”

해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굳이 제 기분을 맞춰 주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요.”

“……그, 아가씨, 저는 기분을 맞추려고 한 게 아니라…….”

순식간에 당황한 브리세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더듬더듬 문장이 되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해인은 상대가 더 혼란스러워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진정하고 들어 보세요. 사실 저는 곁에서 제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혼자서라도 뭐든 못 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일부러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어요. 시중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어서…….”

말끝을 흐리며 해인이 브리세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연인의 마음이 상할까 봐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고, 솔직하게 말 못 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인이 눈앞에 있는 사람의 고향을 짓밟은 존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인은 개인적인 사정이라며 적당히 얼버무려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인이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크게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던 브리세이스는 점점 모호한 표정이 되어 갔다. 직전까지 보이던, 작위적일 만큼 예의 바르고 순종적인 표정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아마도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잊은 탓일 것이다.

“그 말은…….”

“네, 뭐.”

해인은 눈을 잠깐 굴렸다.

“그러니까 제 기분을 맞춰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는 그냥……. 이대로 있을 거예요. 지금도 마음이 좋지는 않을 텐데, 저한테까지 진심에도 없는 태도를 보이려면 더 고생스럽잖아요.”

해인은 말을 맺었다.

“그뿐이에요.”

그 대화 이후 해인의 바람대로 브리세이스는 이전과 같이 해인의 비위를 맞춰 주려는, 노골적으로 예의 바른 태도를 더 이상 내보이지 않았다. 순간순간 미묘한 표정으로 해인을 볼 때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그저 성실하게 본인의 할 일만 했을 뿐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솔직히 느껴지는 정도는 훨씬 편안했기에, 해인은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을 다행히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저 잔잔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시간들이었다.

비록 막사 바깥 진영의 분위기는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뒤숭숭한 편이었지만, 해인은 잠깐의 생각 끝에 그 부분까지 자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리노스와 텔라몬의 말대로 이 일은 잘못한 사람이 명백하게 정해져 있는 사건이다.

‘포로를 선물로 넘겼다는 부분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안 했으니까…….’

물론 사람을 선물의 개념으로 주고받는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어쩔 수 없는 불쾌감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었으니 차치해야 할 부분이었다.

거기다 해인은 ‘사제의 기도를 들은 아폴론이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이 시대 사람들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 채였다. 이 시대의 상식과 자신의 상식이 다르다는 것을 충분이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신의 저주’ 같은 비과학적인 것은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무엇보다 날이 저물고 돌아온 아킬레우스의 표정 위로도 막사 바깥의 상황에 대한 걱정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해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미소 짓는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아침부터 떨어져 있던 연인을 향한 반가움과 애정, 그리고 애틋함뿐이다. 해인은 자신을 끌어안아 오는 팔으로부터 전해지는 그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마주 웃었다.

길었던 하루는 비로소 안정을 찾고, 겨우 여상하게 마무리되었다.

***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아침의 일이다. 전날의 여상함이 무색하게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들불처럼 번지는 전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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