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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킬레우스로부터 해인의 요구 사항을 들은 파트로클로스는 바로 포로 한 명을 데려왔다. 사실 그는 해인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만큼, 수락의 답을 듣기 전부터 미리 누구를 데려갈지 반쯤은 골라 두고 있던 차였다.
사정이야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잘되었다고 말해도 괜찮았다. 그러잖아도 전날처럼 매번 막사 앞에 머물면서 서면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기에, 오늘은 아킬레우스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일 처리가 빨랐던 덕분에 해인은 혼자 남지 않을 수 있었다.
‘혼자 있어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불과 몇 분 전 새로 만나게 된 사람과 단둘이 막사 안에 남겨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어색하기는 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므로, 해인은 가만히 눈을 굴리며 상대를 살펴보았다.
어딘가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나이는 해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듯했고, 짐작일 뿐이지만, 원래는 높은 신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나을지 고민하며 망설이던 해인은 찰나에 상대와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에 상대 역시 조금 놀라는 듯했으나, 그녀는 이내 엷게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면서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아서 결국 해인은 앞서 고민했던 대로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 안녕하세요…….”
그제야 상대가 나긋한 어투로 답해 왔다.
“말씀 낮춰 주세요, 아가씨. 저는 브리세이스입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브리세이스.”
조금 길다 싶은 발음에 해인은 이름을 외우고자 입 속으로 한번 중얼거렸다. 말을 낮추라는 말은 은근슬쩍 못 들은 척하며 넘어가려 생각하는 채였다. 칼리에는 워낙 어렸기에 반말을 써도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다짜고짜 편하게 말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한편 해인이 상대를 살피는 것처럼, 상대 역시 해인을 살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브리세이스의 입장에서는 더 간절했다. 이미 포로로 잡혀 버린 마당에 이 이상 상황을 더 망치지 않으려면 최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정도는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나 해인이 했던 짐작대로, 브리세이스는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다름 아닌 본인부터가 권력을 가진 존재였었다. 자라 오며 수없이 겪었던 권력 관계에 의한 경험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녀는 그와 같은 사실을 오히려 더 뼈저리고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어차피 잡혀 버린 몸이다.
나고 자란 땅을 짓밟은 자들에게 적대감이 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을 내키는 대로 드러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자신에게 안배된 운명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 이상의 모욕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신분이 높은 만큼 뻣뻣하게 굴었다가는 본보기로 꺾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 같은 걸 세울 때가 아니야.’
브리세이스는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 자신했고, 때문에 해인과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이 일종의 기회인 것도 확신했다. 그렇잖아도 여기까지 오는 길에 지휘관의 부관이라는 남자가 했던 말이 여전히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 진영 지휘관의 연인……. 시중만 잘 들면 모든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했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분명 찰나간은 약간의 굴욕감을 느낀 게 사실이다. 언제나 대우받고 지내던 자신이 남의 시중이나 드는 위치가 되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그러나 곧 머릿속이 진정되자, 자신에게 온 행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막사까지 걸어오며 약간의 호기심도 그 위로 깃들었다.
아킬레우스의 이름은 아나톨리아에서도 이미 유명해진 지 오래였다. 아나톨리아의 수많은 도시를 짓밟은 반신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와 동경, 경멸과 관심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그런 사람의 연인이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자, 드는 생각은…….
분명 꽤 예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대단한 요부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성격 면에서는 별것 없다 싶을 정도였다. 어색한 듯 건네 오는 인사의 어조가 상상 이상으로 차분하다 못해 순했다. 아킬레우스 같은 이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실만으로 오만해질 법도 한데,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조용하고 침착했다. 소심해 보일 정도였다.
‘어렵지는 않겠다.’
저런 성정이면 적어도 호의를 사는 게 힘들지 않을 것만은 명확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무엇이든 이야기해 주시길.”
예의 바른 말투를 쓰며 브리세이스는 다시금 눈을 내리뜨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덕분에, 정작 그 태도에 해인이 흠칫 당황하는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상대가 보이는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에 오히려 불편해진 해인은 아주 오랜만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되새겼다. 무엇보다 너무 과해서 오히려 진심이 아닌 것이 티가 났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그걸 거북해할 자격은 없네.’
해인은 언젠가 자신이 떠날 것임을 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에 박혀 있는 사실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때가 되면 언제 이 땅에 존재했었냐는 듯 사라질 사람인 주제에, 타인이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싫은 티를 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해인은 그만 쓰게 웃었다.
***
이른 저녁쯤에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마치 이틀 전처럼 무언가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칼리에를 일찍 보내 주던 것이 습관이 되어 브리세이스도 먼저 일찍이 보냈던 해인은 그가 가져온 물건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리라처럼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저 화려한 상자 하나였다.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는 해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아킬레우스는 아예 직접 열어 보라는 듯 손짓을 해 왔다.
별생각 없이 상자에 손을 댄 해인은 열자마자 보이는 금과 은, 그 외의 각종 반짝이는 돌들의 향연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봐도 못 알아볼 수 없는 광경이다. 전부 여성용 장신구들이었다.
“이건…….”
“그대에게 크기가 어느 정도 맞을 것 같아서.”
해인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선수 치듯 입을 연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새삼스럽게 크기를 가늠하듯 손목을 잡아 쥐어 본 그가 덧붙였다.
“사실 저것들도 대부분 조금 커 보이기는 했는데, 빠져나갈 정도는 아닐 거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해인이 무언가 받겠다고 먼저 이야기한 틈을 타서, 그 김에 이것까지도 어떻게 안 되려나 싶은 마음이었다. 매 순간 뭐든 주고 싶었던 차에 상황이 얻어걸린 셈이다.
아킬레우스도 본인이 좀 들떴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해인은 예전 포이닉스가 주었다던 활도 아직까지 별문제 없이 가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으나, 어차피 물건은 어차피 주인이 없어져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새로운 깨달음을 오늘 낮에 얻은 그는, 해인도 어쩌면 사람이나 동물에 비해 이런 종류에 대해서는 그리 부담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가요.”
해인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아킬레우스와 상자 안의 물건들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 처음부터 반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던 만큼, 아킬레우스는 그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모르는 체하고는 해인을 안아 들어 침대에 앉히며 물었다.
“해 볼 생각 없어?”
장신구 같은 것들에 대단히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조만간 떠나게 될 마당에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었지만, 해인은 그런 사실을 대놓고 말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기분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는 유연하게 받아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해인이 망설이는 듯하자 아킬레우스가 속삭이듯 설득했다.
“한번쯤은 괜찮잖아. 내가 걸어 주게 해 줘.”
저런 식으로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해인은 한숨처럼 대답하고 말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해인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만 절실히 깨달았다.
허락을 얻자마자 상자를 근처로 끌어온 아킬레우스는 느긋한 손길로 해인의 팔에 팔찌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해 보고 싶었던 건 사실인 듯 나름대로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고리를 채우고 손을 뗀 순간, 해인은 예상외의 문제점 하나를 깨달았다. 아킬레우스의 손이 떨어지고 무심코 팔을 들어 올리려다 멈칫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목에 걸린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팔찌는 그 자체적으로 제법 굵은 데다, 이것저것 매달려 있는 것도 많았다. 기원전 십이 세기라기에는 믿기 힘들 만큼 섬세한 세공이 우아하고, 동시에 아주 아름답기는 했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무거워요.”
“그래?”
“생각보다 훨씬……. 이 정도면 움직일 때도 좀 불편할 것 같은데.”
팔을 못 들 정도까지는 당연히 아니었으나, 현대에서 종종 하고 다니던 메탈 재질의 시계보다는 확실히 더 무거웠다. 팔을 가볍게 들었다 내렸다 두어 번 반복해 본 해인은 문득 옆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아킬레우스?”
그는 어째서인지 무언가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는 말없이 손을 뻗어 반대편 손목을 잡아 와 엇비슷한 크기의 다른 팔찌 하나를 그쪽에 걸었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여 앉고는 발목도 새삼스레 크기를 가늠하듯 잡아 보는가 싶더니, 그 위에조차 제법 무게가 나가는 발찌를 채우는 것이다. 이쯤 되자 해인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족쇄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느낌이 기묘했다. 해인은 반대쪽 발목마저 아킬레우스가 잡기 전에 먼저 안쪽으로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쪽까지 채우면 걷기도 불편하잖아요.”
그제야 슬쩍 눈을 들어 해인을 올려다본 아킬레우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건 싫지?”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는 해인의 어깨를 밀어 눕히며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얼떨결에 뒤로 넘어간 해인은 반사적으로 침대를 짚었으나 아킬레우스의 동작이 더 빨랐다.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좁히며 그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대는 뭐든 혼자 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움직이기 불편해지면 당연히 싫겠지만…….”
당장 입술이 맞닿을 듯 거리가 가까워졌다. 말할 때마다 상대의 입술이 움직이는 느낌이 어렴풋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잠깐…….”
해인이 반사적으로 기다리라는 듯 입을 열었으나 아킬레우스는 듣지 않았다.
“나는 사실 매번 뭐든 내가 다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무게를 싣지는 않았어도, 온몸으로 짓누르다시피 위를 덮어 오는 탓에 해인은 상대의 품 안에 거의 갇혀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방금까지 했던 말에서부터 엿보였던 질척한 감정들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듯 선명하게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금세 뺨으로 열이 오르고 숨이 막혔다. 해인은 더듬거리며 아킬레우스의 등 뒤로 팔을 걸치듯 올렸다.
얼마쯤 후 천천히 고개를 들고 거리를 벌린 아킬레우스는 한숨처럼, 입 맞추기 직전 꺼냈던 말을 조용히 부정했다.
“……하지만 안 될 일이겠지.”
그 사실이 못내 서운하다는 듯 그는 해인의 어깨쯤에 이마를 묻었다. 방금까지 숨결 하나마저 전부 놓치지 않을 듯 집요하게 굴던 사람이 내보이는 약한 모습에 해인은 대답해 줄 말을 고르지 못해 침묵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어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만 쓰다듬듯 만지작거렸다.
상자를 열었을 때까지는 그리 무겁지 않은 분위기였음에도, 누구의 의도도 없이 어느 사이엔가 몹시 고요해진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