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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무너트렸다고 해서 곧장 다음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합군은 테베 앞에 그대로 며칠 머무르며 재정비를 끝낸 후 트로이로 이동하기로 했다.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의 늦은 오전이 되었을 때, 잠시 소속 진영을 벗어나 근처를 돌아보며 아는 사람 몇몇을 만나고 온 파트로클로스는 한 가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아킬레우스를 찾아 그의 막사로 향했다.
그래도 오늘은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본인 막사 바로 앞에서 점토판이나 양피지 따위를 곁에 거의 쌓아 놓고 하나씩 확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리품 목록, 죽은 병사들과 다친 병사들의 수, 병사들이 세운 전공 등, 지휘관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아킬레우스도 앞으로 며칠간은 마냥 쉬고만 있을 수 없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천천히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듯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킬레우스.”
“왜.”
시선을 마주하며 파트로클로스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어차피 싫은 이야기이니 질질 끌 것 없이 빠르게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가멤논에게 뭐라도 하나 줘야겠어.”
“왜?”
들고 있던 점토판을 내려놓으며 아킬레우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파트로클로스는 근처의 스툴을 끌어와 앉으며 설명했다.
“방금 소문을 좀 듣고 왔는데, 어제 네 태도 때문에 아가멤논이 화가 났다더라고.”
어제 아킬레우스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막사를 막 빠져나갔을 때는 당황한 나머지 말리거나 붙잡지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짚어 보자 그 일을 본인이 무시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사실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감흥 없는 낯을 한 그대로 점토판에 시선을 돌리더니, 눈으로는 글씨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되짚어 생각해 보니 불쾌했나 보지. 그리고 솔직히 네가 이상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
“내가 뭘.”
“누가 봐도 거짓말 같은 핑계나 대고 말이야.”
타박 같은 어조에 아킬레우스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후회도 반성도 없는 태도였다.
물론 파트로클로스도 아가멤논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고 거대한 국가의 군주였다. 지금 아킬레우스가 하듯이, 아가멤논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무시한 채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명한 일은 아니라는 걸 파트로클로스는 알고 있었다.
지휘관들이 부관을 두는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었으니,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결코 스스로 나서서 하지 않을 일을 대신이라도 해야 했다.
“아무튼, 그가 좀 과하게 구는 건 있지만 원인 제공을 네가 한 셈이라 대충 달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
“그래서 뭐라도 건네서 입을 막자고?”
“입을 막…….”
총사령관에게 할 만한 언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익숙한 태도로 찰나의 당황을 수습했다.
“그래, 뭐. 그게 틀린 표현은 아니지. 그래서 뭘 주는 게 낫겠어?”
아킬레우스는 보고 있던 점토판을 다 확인하고 옆으로 내려놓은 뒤, 다음 것을 집어 들기 전 파트로클로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제도 계속 생각했듯 그는 사실 최근 들어 전쟁터를 벗어날 생각만 잦았고, 전쟁 자체에도 약간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아가멤논이 무엇을 하거나 말거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도 그가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지내 왔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진심으로 싫었다.
“알아서 해 줘.”
“응?”
“뭘 줘도 상관없어. 조용히 시킬 수 있을 만한 걸로 아무거나 던져 주고 끝내.”
건조한 어투로 말하고는 다시 점토판으로 시선을 내리는 아킬레우스를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속으로 침음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일말의 관심도 갖고 싶지 않은 듯했다. 되짚어 보면 어제도 생각했듯 최근 유난히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잦았으니, 어쩌면 사랑에 빠진 탓에 전쟁 그 자체에 질려 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원래도 좋아하지는 않았으니 질렸다는 표현도 안 맞나.’
파트로클로스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킬레우스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뭐……. 그럼 마침 신분 높은 여자 몇몇을 포로로 잡았으니, 그들 중 하나쯤 아가멤논에게 넘기도록 할게. 마침 넌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
답을 들은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근처에 쌓인 점토판들을 잠시 뒤적이더니, 그 가운데 전리품 목록이 적힌 것을 찾아냈다. 나무 막대로 그 위에 몇 자를 써 넣고 선을 긋던 파트로클로스는, 문득 목록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아킬레우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킬레우스, 아가씨께서 새 몸종이 필요하다고는 안 하셔?”
칼리에가 떠난 이후로, 해인은 테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랬듯이 진영에 남은 여종들이 돌아가며 적당히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해인은 그에 대해 딱히 불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는 혼자 옷을 입어도 모양새가 어설프지 않다 보니 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킬레우스가 먼저 누군가를 붙여 주겠다고 권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예전과 다른 망설임이 생겨나 있어서 미처 그러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그것이 또 짐을 건네는 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된 것이다.
“글쎄.”
대답은 한 박자 늦고 짧았다. 그러나 아까 전 아가멤논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는 그 목소리나 표정부터가 질적으로 달랐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낯에 속으로 헛웃음 지은 파트로클로스가 대꾸했다.
“또 안 내켜 하시나? 그래도 이제는 예전처럼 경계할 필요성까지 느끼실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여쭤 보기나 해 봐. 어차피 너 앞으로는 또 계속 바쁠 거잖아. 여기 보니까 아가씨 곁에 붙여 둬도 괜찮을 만한 여자들이 꽤 있는 것 같아서.”
“……줘 봐.”
잠깐의 침묵 끝에 아킬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곧장 들고 있던 점토판을 넘겨주며 파트로클로스가 덧붙였다.
“여기. 이제 그 어린애도 없는 마당에 혼자 계시면 무료하기만 할 텐데, 안 그래도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게 좋을 리는 없지 않겠어?”
“……그렇겠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낯으로 중얼거리는 아킬레우스를 바라본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그럼 아가멤논 문제는 이야기한 대로 처리할게. 나도 할 일 하러 간다.”
“그래, 수고해.”
들고 있던 점토판을 완전히 내려놓으며 아킬레우스가 짧게 배웅했다. 가볍게 웃어 보인 파트로클로스는 등을 돌려 금세 멀어졌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는 힐끗 자신의 뒤에 위치한 막사 문을 돌아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날 저녁이었다.
“해인.”
“네?”
“……혹시 예전처럼 계속 곁에 붙어 있을 몸종은 필요 없어?”
아킬레우스는 결국 파트로클로스의 말대로 물어보고 말았다.
혹시나 자신의 권유가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망설임으로 내내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였으나,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게 좋을 리는 없다’는 파트로클로스의 말이 순간 깊숙이 파고든 탓이었다. 그렇잖아도 내내 장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대가 이대로 계속 지내기는 불편할 것 같아서.”
“음…….”
해인은 작게 침음하며 눈을 굴렸다.
실제로 칼리에가 떠나고 난 이후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는 했다. 몸은 원래 편한 것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언제 돌아가게 될지도 어느 정도 시기가 잡혔고, 그런 마당에 누군가를 또 곁에 둘 용기는 차마 생겨나지 않아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예전에 했던 말처럼 ‘짐이 될까 봐’ 언급하길 망설이는 모양이었는데, 그에 대고 먼저 무어라 말을 얹기도 애매했다.
‘그냥 이렇게 입 다문 채 넘어가려고 했는데.’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망설임 위로 신경 쓰이는 감정이 더 컸던 모양이다. 솔직히 이제는 정말 거절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솔직히 답했다가 아킬레우스가 혹시나 상처받을까 봐 망설이게 됐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기억이다. 고작해야 며칠 전, 막 떠나기 직전의 칼리에가 해인을 올려다보며 했던 말이었다.
아가씨 덕분에 저는 사실 아주 안전하게 지냈어요. 어리면 다들 만만하게 보고, 또 저는 여자애니까 여러모로 위험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요.
……정말 뜬금없게 떠오른 기억이었지만, 어쩌면 시기적절하기도 했다.
해인은 한숨을 삼켰다. 그리 내키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에게 괜한 고통을 심어 주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기분을 신경 써 주는 김에 한 명이나마 더 안전할 수 있다면, 공리적인 관점으로 따져 나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네, 괜찮으면 한 명만 붙여 주시겠어요?”
찰나의 고민 끝에 해인은 수락했다. 그리고 그 말에 아킬레우스는 멈칫하고 말았다. 뒤이어 해인이 수락하다 못해 오히려 먼저 부탁해 왔음을 완전히 이해하자, 그는 찰나에 깊이 안도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럴 때가 아닌 것은 알지만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
매번 이곳에 정 붙이고 싶지 않아 하며 무엇이든 거절하려 들던 해인이 거절의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건, 물론 실제로는 아닌 것을 알지만, 최소한 이 짧은 순간의 기분만이라도……. 해인이 이곳에 더 머물 것만 같은 느낌을 줬다.
“당연히 괜찮지.”
아킬레우스는 웃으며 해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가까이 다가온 상대로부터 느껴지는 들뜸을 모를 수 없던 해인은 약간 당황했다. 꼭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신나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였고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어떤 기분인지를 금세 파악했다. 그러자마자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드는 씁쓸함을 느끼며, 그녀는 한숨처럼 마주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