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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95)화 (9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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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나가고 난 이후 계속해서 막사 안에 있기도 싫어진 탓에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리노스와 텔라몬은 아주 여상하게 그녀를 반겨 왔다.

해인은 그들과 사소한 대화라도 나누며 매 순간 따라붙는 불안함을 잊어 보려 했고, 리노스와 텔라몬은 영문은 몰라도 해인이 무료하다면 얼마든지 대화 상대가 되어 줄 용의가 있었다.

“옛날이야기라도 해 드릴까요?”

잠깐의 고민 끝에 리노스가 제안했다. 막사 앞 의자에 앉았던 해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옛날이야기요?”

“예, 왕자님의 아버지인 펠레우스 님께서도 참가하셨던 아르고 호의 원정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유명한 이야기이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말했듯 펠레우스 님께서 참가하셨던 만큼 저희는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지요.”

옛날이야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약간 미묘한 기분이었으나, 뒤이은 설명에 해인도 흥미가 생겼다.

무엇보다 아르고 호의 원정은 엄밀히 말해 인간 영웅들의 이야기였던 만큼, 현대에서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리노스의 짐작과는 달리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듣는다는 전제가 붙자 어느 정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되는구나. 신화 속 과장 섞인 모험담 같은 게 아니라…….’

심지어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참가했다면 아주 먼 옛날까지도 아닌 듯했다. 아마도 몇 십 년 정도일 것이다.

“네, 들어 보고 싶어요.”

“좋습니다.”

……그러나 기껏 시작된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했다.

고작 원정 초반에 대해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아킬레우스가 태연한 낯으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나갈 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무엇 때문에 나가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 말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던 해인은 정말로 금세 돌아온 아킬레우스를 보며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리노스와 텔라몬도 마찬가지였다.

세 명의 놀란 시선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해인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총사령관 앞에서는 내내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는 씩 웃으며 해인의 뺨에 살짝 입 맞추고는 속삭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해인은 당황한 채 되물었다.

“……그랬긴 한데. 정말 이렇게 일찍 와도 괜찮은 거 맞아요?”

“당연하지.”

파트로클로스가 들었더라면 쓰게 웃었겠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다.

그는 이내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고는 그만 돌아가도 좋다며 사실상의 퇴근을 명했다. 이미 아킬레우스가 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둘은 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해인에게는 ‘다음에 계속 이어서 이야기해 주겠다’는 눈짓을 보내고서 멀어졌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던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막사 안으로 이끌며 물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어?”

“……아르고 호 원정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아.”

잠시 웃으며 테이블에 들고 있던 리라를 내려놓은 아킬레우스가 연이어 물었다.

“재밌었어?”

“네.”

“마저 듣고 싶을 만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당신도 돌아왔고.”

가만히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맺은 해인은 이내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아킬레우스가 내려놓은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것은 크기가 다소 작은 하프처럼 보였다. 잠깐의 생각 끝에 해인은 그 물건의 정체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저건 리라인가요?”

사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직전에 한 말에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기분이 되어 있었지만, 질문을 들은 이상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답했다.

“……맞아. 혹시 처음 보나?”

“네, 처음 봐요.”

리라는 말 그대로 고대의 악기다. 해인이 알기로 현대에도 리라라는 이름의 악기는 존재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는 모양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해인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리라를 가만히 바라보다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연주할 수 있어요?”

“있지.”

아킬레우스는 대답과 함께 망설이는 기색 없이 리라를 다시 챙겨 들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내 현 위로 손끝이 올라오고, 뒤이어 익숙한 듯 낯선 현악기 소리가 막사 안으로 깊이 울려 퍼졌다.

가져온 사람이니만큼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기에, 테이블 앞 의자에 앉은 해인은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감상하듯 응시했다. 커다란 손이 가볍게 움직이며 현을 훑는 광경은 탐미적인 즐거움마저 느끼게 했다. 되짚어 보면 이전 팀블레에서 꽃을 엮는 모습을 보고도 엇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곡의 형태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연주가 끝날 때까지 해인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사실에 희미하게 웃은 아킬레우스는 리라를 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해 볼래?”

“……네.”

답을 들은 그는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뻗었다. 해인이 일어나 다가서자 그는 해인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히고는, 허리 옆으로 팔을 뻗더니 리라를 가져와 해인에게 안겨 주었다. 얼떨결에 안기다시피 해 리라를 들게 된 해인은 고개를 비틀어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원래 이러고 가르치지는 않죠?”

“글쎄.”

맞는 지적이었으나 짐짓 모른 척 답하며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현의 어디에 손을 올리면 되는지를 짚어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는 사실 재능이 없는 편이었기에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해인은 금세 따라와 배웠다.

몇 번 짚어 준 것만으로 금세 그럴듯하게 손이 움직였다. 이내 아킬레우스가 앞서 짚어 주지 않아도 알아서 현을 짚을 줄 알게 된 듯해, 그는 손을 떼고 해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손이 리라의 현 위를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목덜미 위로 얼굴을 묻으며 눈만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리라와 섬세한 손의 모양이 잘 어울렸던 탓에, 그는 문득 낮쯤에 했던 생각을 또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역시 이런 곳은…….’

좋지 않았다.

피와 함성과 살육이 근처에 머무르는 장소가 아닌, 지금처럼 해인과 어울리는 화려하고 예술품 같은 리라가 위화감 없을 만한 곳에서 머무르는 게 옳을 것 같다. 언제나 평화롭기만 한 프티아 같은 곳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오히려 길지 않은 시간이니만큼 그런 곳에서 지내는 게 사실상 맞는 방향 같았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해인이 문득 현에서 손을 떼더니 손끝을 내려다봤다. 단단하지 않은 손끝으로 계속해서 현을 만지다 보니 조금 아픈 모양이었다. 달아오른 손가락 끝을 본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해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챘다.

“그만하는 게 낫겠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해인은 순순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써서 리라를 곁에 내려놓고, 아킬레우스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며 질문을 꺼냈다.

“오래 배웠어요?”

“남들보다는.”

“얼마나?”

잠시 생각하던 아킬레우스가 천천히 답했다.

“어릴 때 잠시 배웠다가……. 금세 그만뒀는데, 스키로스에서 지내며 할 일이 없다 보니 그때 다시 시작했었어. 여장하고 있으면서 검을 휘두르기는 애매해서.”

조용히 말을 듣던 해인은 끝쯤에 들린 단어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여장이요?”

“아.”

그 물음에 아킬레우스도 같이 멈칫했다.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스키로스에서 지냈었다고만 말했었지.”

“네…….”

“그건 나에 관한 예언 때문이야. 내게 내려진 예언을 들은 어머니가 날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으려고 떠올린 방법이었거든. 섬에 두다 못해, 혹시 누군가 찾아오더라도 나인 걸 들키지 않게 만들기 위해 곁들인 게 여장이었고.”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주로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검을 수련하고는 했지만, 하루 종일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너무 할 일이 없어서 그동안 차선책으로 배웠었어.”

해인은 고개를 옆으로 틀어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이니 만큼, 선이 굵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면 여장을 하더라도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을 법도 했다.

본인은 결코 바라지 않았을 테니 그런 방법을 강요받은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웠으나, 동시에 테티스가 얼마나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선명히 다가왔다. 당장 하루마다 그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는 해인으로서는 사실 테티스의 마음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그녀는 다만 아킬레우스에게 위로만 건넸다.

“……고생 많았네요.”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지.”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답한 아킬레우스는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목덜미에 가볍게 이를 댔다. 방심하고 있던 해인이 흠칫 어깨를 떨자, 그가 가볍게 웃더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아까 미처 못 한 게 있었잖아.”

그와 동시에 몸이 들리는가 싶더니 침대 위로 쓰러트리듯 내려졌다. 갑작스레 바뀐 시야에 약간의 어지러움은 감수해야 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해인은 다음 순간 발목을 감싸듯 쥐는 손길에 숨을 들이켰다. 아킬레우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잡히는 발목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놓고는 몸을 기울였다.

“기억 안 난다고 할 건 아니겠지?”

이어진 물음은 허락을 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억나요.”

“그래야지.”

그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속삭인 아킬레우스가 고개 숙여 입을 맞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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