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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지기 전 연합군을 구성한 군대의 각 지휘관들은 모두 총사령관의 막사로 모였다. 서로의 공을 논하고 그에 따른 전리품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아킬레우스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평소 아킬레우스를 좋아하지 않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조차 그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 군 모두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아킬레우스는 특별히 기뻐하거나 뿌듯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건 꽤 뜻밖의 일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이런 자리에서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저마다 조금씩 의아함을 품었다. 이제 와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기에도 이상했던 탓이다. 자리에 앉은 아킬레우스는 결코 겸양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지자면, 그는 사실상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며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에게는 당연하다 못해 쉬운 일이었다고 드러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다른 일이 있는 건지.’
오디세우스는 힐끗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보며 스치듯 생각했다.
만약 전자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이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의 오만함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성격상 그렇게까지 해 가며 칭찬을 듣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본인이 나서서 과시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의 빛을 알아보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으니, 애초에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금세 전자의 가능성을 지워 낸 오디세우스는 후자의 짐작 가운데 그가 저렇게까지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일은 무엇이 있을지 떠올렸다. 곧장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봤던 그 여자…….’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그는 자연스럽게 아킬레우스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속으로 그냥 웃고 말았다.
그나마 오디세우스이기에 그 정도까지 생각했던 것이고, 다른 지휘관들은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다가도 이내 그 태도를 여상하게 넘겼다.
어차피 아킬레우스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장군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칭찬을 건네면 일단 입으로 대답은 했으니, 조금 수상하기는 해도 대단히 무례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침내 전리품을 분배할 때가 되어, 가치 있는 전리품 다수를 자신의 소유로 하게 되었음에도 태도의 변화가 없자 그때부터는 정말로 의아함의 수위가 깊어졌다.
가장 큰 공을 세운 만큼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가는 전리품의 양은 상당했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그 사실에 일말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 듯 변함없이 무표정한 낯이었다. 이쯤 되자 막사 안의 대부분이 아킬레우스를 정말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관 자격으로 함께 참석했던 파트로클로스가 곤란하게 눈을 굴리며 상황을 수습해 보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빠르게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아킬레우스, 혹시 전투 중 부상을 입었나?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기라도 한 건가?”
연합군 최고의 무력을 지닌 장군을 염려하는 것인지, 혹은 비꼬는 것인지, 둘 다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말투였다. 아킬레우스는 말을 꺼낸 사람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평소 그들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막사 안은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오늘 같은 날 아가멤논이 저런 시비조의 말을 꺼냈다면, 그들이 아는 아킬레우스는 결코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모두의 예상과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좀 그렇군요.”
무덤덤한 말투로 내뱉은 말은, 무려 긍정이었다.
아가멤논조차 멍한 얼굴을 하고 되묻고 말았다.
“……응?”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단 뜻입니다. 먼저 물어보셨잖습니까?”
“그, 지금…….”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조였으나 내용이 지나치게 뜻밖이었다. 본인 입으로 피곤하다는 말을 꺼내는 아킬레우스라니, 이쯤 되자 아무리 아가멤논이라 해도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아가멤논은 반사적으로 아킬레우스 곁의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항상 아킬레우스의 곁에서 함께 다니던 부관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에서였다.
그러나 그 파트로클로스조차 이번에는 눈을 크게 뜨고 아킬레우스를 보고 있었다. 몹시 놀란 낯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도 이 순간의 당황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을 듯했다.
아가멤논과 파트로클로스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지휘관들까지, 수많은 이들을 한 번에 당혹스러움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말없이 막사 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서늘한 시선이었다. 뒤이어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침 잘되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먼저 갑니다. 필요한 일은 다 끝냈으니 제가 없다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군요. 이어질 연회는 남은 분들끼리 즐기시길.”
말을 맺음과 동시에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유유히 막사를 나가 버렸다. 몇 초의 침묵 후 급히 일어난 파트로클로스가 막사 안의 전원에게 재빠르게 인사를 건네고 아킬레우스의 뒤를 따라 나갔다.
기어코 막사를 탈출해 버린 아킬레우스를 보며 아연하게 눈을 깜빡인 오디세우스가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하기 전까지, 막사 안은 계속해서 침묵이 내려앉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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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 그대로,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만’ 하고 막사를 빠져나온 탓에 해는 이제 겨우 서쪽으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주황색이 섞인 엷은 분홍색으로 어렴풋이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아킬레우스는 막사 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피곤하다는 건 거짓말이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질문을 꺼내고 말았다.
“아킬레우스, 너 진짜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멀쩡해.”
“그럼 왜 그랬는데?”
……대답이라도 듣지 않으면 너무 어이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할 일도 다 했는데 남아 있어 봤자 뭐 해? 아가멤논이 기분 나쁘게 구는 꼴이나 계속 봤을 텐데.”
힐끗 그를 돌아본 아킬레우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미간을 좁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에 나온 것도 아니고, 할 일은 다 했으니 상관없잖아.”
“허…….”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긴 파트로클로스는 복잡한 눈으로 아킬레우스를 응시했다. 이미 나온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음 날쯤 정신을 차린 아가멤논이 이 행동을 트집 잡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아킬레우스도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텐데, 보아하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요새 확실히 좀 더 멋대로 굴기 시작했지.’
파트로클로스는 새삼스럽게 최근 아킬레우스의 태도를 되짚었다.
사실, 아킬레우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 뿐.’
지난 십 년 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갑작스레 멈춰서는 옆길로 방향을 트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으니, 볼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부분에 대고 무어라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아가씨와 거리를 두라고 말할 자격도 없으니까.’
속으로 혀를 찬 파트로클로스는 결국 그 이상 입을 열지 않길 택했다.
파트로클로스의 묵인으로 평화롭게 자신의 진영에 도착한 아킬레우스는 더 거칠 것 없이 본인의 막사로 돌아가려는 듯 전차에서 빠르게 내리더니, 불현듯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또 뭐가 문제인가 싶었던 파트로클로스도 함께 걸음을 멈추며 아킬레우스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나온 탓에, 그들은 전리품들을 옮기는 하인들과 거의 동행하다시피 해 진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아킬레우스가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은 그들 중 두 명이 달라붙어 옮기고 있던 거대한 상자였다. 상자는 가득 채워져 미처 닫히지 않아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었다.
“저건……. 에에티온 왕의 보석들이네.”
정체를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가멤논이 저걸 좀 탐내는 기색이었지. 특히 맨 위에 있는 저 리라.”
“그랬나?”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을 나누는 내내 조금도 집중하지 않고 있었음은 파트로클로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기대도 않았기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에에티온 왕의 물건이잖아. 그렇다 보니 가질 명분이 없어서 포기하는 모양이었어. 뭐, 전쟁터에서야 쓸모없다지만 아름답게 생겼고, 게다가 장식이 전부 금과 은이다 보니 그 자체로 값나가니까.”
파트로클로스의 말을 들으며 아킬레우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그 상자로 가까이 다가갔다. 상자를 옮기던 하인들이 멈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파트로클로스가 언급한 리라를 꺼내 들었다.
“그래 보이는군.”
앞뒤로 뒤집어 보며 상태를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리라를 그대로 손에 든 채 상자로부터 등을 돌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가 헛웃음과 함께 물었다.
“……챙겨 가게?”
“그러려고.”
누구를 위한 것일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