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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93)화 (93/149)

***

이틀이 더 흘렀을 때, 줄곧 이어지고 있던 한시적 평화가 깨졌다.

테베가 결정을 내린 탓이었다.

그들은 명예를 버리고 명맥을 이어 가는 대신, 신의를 지켜 타올라 사그라지길 선택했다. 명예를 잃고 구걸하듯 목숨을 이어 가 봐야 소용없다는 뜻과 같았다. 테베의 사자가 연합군 진영에 의사를 전달했고, 이후 연합군 진영에서도 바로 회의가 소집됐다.

회의에서 당장 내일부터 전투가 재개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킬레우스는 한숨과 함께 그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관 자격으로 함께 참석했던 파트로클로스가 당황하는 사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사령관의 막사를 빠져나간 그는 잠시 후 뒤따라 빠져나온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진영으로 돌아가며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그렇게 신의와 명예를 중시할 거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그러게 말이다.”

테베가 보낸 암살자로부터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는 파트로클로스도 아주 잘 알았다. 직전 회의에서 약간의 무례를 보이기는 했으나, 아킬레우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파트로클로스는 결국 지적 대신 한숨처럼 동의의 말이나 꺼낼 뿐이었다.

***

다음 날 약속대로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테베의 성벽은 완전히 함락됐다.

부서진 성벽과 활짝 열린 성문을 넘어간 아카이아 연합군은 테베를 철저히 무너트리고 불태웠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이번에도 아킬레우스였다. 그는 연합군 최고의 무위를 지녔다는 평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다.

“테베의 왕에 이어 일곱 명의 왕자까지 홀로 죽이다니…….”

누군가의 감탄 섞인 중얼거림 그대로였다.

전투가 끝나고 아직 전장이 정리되기 전이었지만 그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나아가 맞서 싸우거나, 혹은 등을 돌려 도망치던 테베의 왕족들이 하나둘씩 붙잡히고 쓰러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연합군 소속의 병사들이나 장군들은 모두 아킬레우스가 이번에도 가장 큰 전공을 세웠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킬레우스는 정작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거나 의기양양한 기색을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전투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피범벅이 된 채로 역시나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한 채 일찍이 자리를 떴을 따름이었다.

***

한낮에 진영으로 돌아온 군대는 누가 보더라도 대단한 승전을 거둔 군대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고양감에 들뜬 병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지휘관이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 그의 무용이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해인은 막사 바로 앞에서 아킬레우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휘관의 막사이고, 리노스와 텔라몬을 곁에 둔 해인이 문 바로 앞에 앉아 있다 보니 감히 근처로 접근하는 병사들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워낙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탓에 해인은 본의 아니게 전투 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몇 마디 정도를 주워들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다 했다고……?’

정확히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킬레우스가 테베를 기어코 무너트리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트로이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복잡한 심경이었다. 해인은 슬쩍 눈을 굴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얼마쯤 시간이 더 흐르자 멀리서부터 기다리던 사람이 오는 게 보였다. 타인에 비해 체격이 확연하게 큰 데다 머리 색마저 명백히 눈에 띄어서, 거리가 멀더라도 알아보고자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킬레우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아킬레우스도 해인이 막사 앞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그는 문득 멈칫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자신보다 늦게 전장을 떠난 병사들이 지금처럼 앞서 진영에 모두 돌아와 있을 만큼, 그는 몸에 묻은 피를 상당히 오랫동안 씻어 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불현듯 자신의 주위에 여전히 혈향이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적의 피는 사실 지금까지도 꽤 여러 번 뒤집어썼지만, 오늘처럼 여러 명의 목숨을 한 번에 거두었던 것은 팀블레를 무너뜨린 이후로 오랜만인 탓일지도 모른다.

사실 테베에 대해 좋은 감정은 조금도 없었던 만큼, 에에티온 왕과 일곱 왕자를 쫓으며 목숨을 하나씩 거두는 중에는 그들에게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를 품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랬었는데.’

막상 지금, 이렇게 돌아와 해인을 마주하려니 어째서인지 죄를 지은 것만 같다.

해인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당장 빠르게 달려가고 싶다가도, 착각인지 실제인지 모를 피 냄새 탓에 망설여지는 감각이 발목을 감쌌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차마 뛰지 못하고 걷던 속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해인의 지척에 이르렀다.

계속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가까워지자 몇 걸음 마주 다가섰다.

“아킬레우스.”

“……다녀왔어.”

짧은 망설임 끝에 아킬레우스는 조용히 인사해 왔다. 해인은 답하는 대신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손을 뻗어 이마 위로 늘어진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드물게 어깨 위로 물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을 만큼 물기가 남아 있던 머리카락은 저항 없이 넘어가 그대로 고정됐다. 반듯하게 드러난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해인은 문득 쓰게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당신처럼 고생했나요.”

확연히 가까워진 거리에, 자신이 느끼고 있던 혈향이 해인에게도 느껴질까 봐 약간 긴장했던 아킬레우스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라고 해도 고생이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어.”

“당신이 다 했다던데?”

“누가?”

“진영의 모두가요.”

아킬레우스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다. 그는 혼자서 테베의 왕을 비롯해 일곱 왕자의 목을 거뒀다. 테베 왕실의 직계 남성 여덟 명을 혼자 쓸어버렸으니,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킬레우스가 모든 일을 다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해인에게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죄책감과 함께 혹여나 피 냄새가 느껴질까 긴장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험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여유는 없었다. 정확한 내용을 들은 해인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아킬레우스가 진정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약간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떤 말을 들었어?”

찰나의 치열한 갈등 끝에 아킬레우스는 결국 대놓고 묻고 말았다. 얼핏 여상한 것 같은 말투였으나 해인은 그 속에서 일말의 불안함을 스치듯 읽었다.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던 해인이 느릿하게 답했다.

“그냥 당신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만 들었어요.”

“……그래.”

무심코 안심한 아킬레우스는 그런 스스로를 내심으로 조소하고 말았다.

그는 엷은 한숨과 함께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해인의 손을 잡아 올렸다. 새삼스러울 만큼 얇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원래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불현듯 그 사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검의 손잡이가 이보다 더 무겁고 단단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전쟁터와 어울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들어갈까.”

“그래요.”

조용히 권해 오는 말에 해인은 망설일 것 없이 수락했다. 둘은 나란히 막사로 향했고, 그동안 조용히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아킬레우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완전히 막사 안으로 들어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해인을 내려다보다 양손으로 해인의 뺨을 감싸 올렸다. 잠시 시선을 마주한 그는 뒤이어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해도 된다는 듯 느린 속도로 입술을 겹쳐 왔다.

돌아왔을 때부터 아킬레우스가 어딘지 묘한 태도였음을 인지하고 있던 해인은 피할 생각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상대가 불안함을 느낀다면, 그리고 이 정도로 그것을 달랠 수 있다면 받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해인은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제야 안심한 듯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가르고 깊이 입 맞췄다.

피 냄새니, 죄책감이니, 거슬리는 것은 많았으나 동시에 아킬레우스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성과 살육으로 가득 찬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게 날뛰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명 시작은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혀를 섞기 시작하자,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뇌 속에 남았던 고양감이 다른 방향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입맞춤은 결코 가볍거나 산뜻하지 않았다.

“응…….”

다소 벅찬 기색을 보이면서도 해인은 최근 며칠간 계속 그랬듯 굳이 아킬레우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자연스레 해인을 안아 들어 침대로 걸어가서는 그녀를 그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그 몸 위를 덮어 오르며 다시 입 맞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괴롭혔던 것이 무색하게도 얼마 후 아쉬운 듯 떨어진 아킬레우스는, 이다음의 행위를 더 이어 가는 대신 위치를 바꿔 해인을 자신의 몸 위에 올린 뒤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느려지고, 마침내 숨이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그저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몸에 닿는 상대의 흥분이 여전히 선명했다. 해인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아킬레우스의 가슴팍을 짚고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더 안 해요?”

듣기에는 상당히 대담한 발언이었다. 잠깐 눈을 크게 뜬 아킬레우스는 이내 손을 뻗어 약간 붉어진 해인의 눈가를 쓰다듬더니, 나직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하고 싶어?”

그러나 해인은 그 물음에 당황하거나 얼굴을 더 붉히는 대신, 깨달았다는 표정을 했다.

“다시 나가야 하는구나.”

“……맞아.”

순간 말문이 막혔던 아킬레우스가 쓴웃음과 함께 답했다.

누가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를 다시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전리품을 나누는 등의 절차가 남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누구에게든 맡겨 두고 이대로 있었으면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수긍에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진 해인을 보자 떨어져 있기 싫은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동질감, 안쓰러움, 그리고 부정 못 할 저열한 기쁨이 혼란하게 뒤섞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달래듯 조용한 속삭임과 함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손길로 상대의 뺨을 덧그리며 아킬레우스는 문득 생각했다.

‘……계속 전쟁터에 있어야만 할까.’

사실 그는 이전부터 이와 비슷한 결의 생각을 떠올린 적이 없지 않았다.

전쟁터 같은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해인과는 맞지 않았다.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 단순히 생각해도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닌 것부터가 명백했다. 위험하고, 불편하고, 무엇보다 시시때때로 지금처럼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함께 있기만 해도 부족할 시간들인데, 그걸 이런 장소에서 낭비하듯 버리고 있는 건 역시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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